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2)화 (2/91)

2화.

내 인생은 망했다.

차분하게 열 번 정도 생각해 봤지만 진짜 망했다.

“이게 뭐야!”

양 손바닥으로 눈앞의 전신거울을 쾅 내리쳤다.

“이게 말이 돼? 차라리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가 낫지. 아니, 하다못해 길거리의 돌멩이로 환생하는 게 백 배, 천 배 낫겠다!”

울분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하필, 하필!

많고 많은 소설 속 인물 중에 이안 클라우드의 전 부인에 빙의할 수가 있냐고!

“말도 안 돼….”

죄 없는 거울만 쾅쾅 쳐대던 내가 번뜩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지, 아직 결혼 전일 수도 있잖아?”

그래, 속단하긴 이르다.

내가 엘로이즈에 빙의한 건 맞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어.

주먹을 꽉 쥔 순간 거울에 비친 벽면의 휘장이 눈에 들어왔다.

용맹한 매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가문 인장이었다.

“미친….”

힘이 잔뜩 들어갔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푸른 매는 소설에서 지겹게 묘사된 클라우드 대공가의 상징이었다.

“…했구나.”

했네, 했어.

응, 망했어.

이쯤 되자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왔다.

이건 절대 꿈이 아니며, 난 환생트럭인지 저주트럭인지 뭔지에 치인 죄로 이안 클라우드와 결혼한 엘로이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운명의 신은 잔혹하기도 하시지!

이왕 빙의시켜 주는 거 사랑스러운 다이아나의 지나가는 일개 친구1, 정도로 만들어 주시면 어디 덧나는 건가요?

“이런 씨….”

“저… 마님?”

거울에 머리를 쾅 박은 순간 열린 문틈으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갈색 머리 하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팍 숙였다.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방금 왔어요, 정말이에요.”

다 봤구만, 뭘.

“…무슨 일이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물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엘로이즈의 몸이라서 그런지 목소리며 몸짓에 절로 우아함이 묻어났다.

‘오, 빙의라는 게 이런 거였나?’

우물쭈물하던 하녀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조찬 시간이 다 되어서요. 이제 그만 내려가셔야 합니다.”

“조찬? 아.”

한 박자 늦게 원작 내용이 생각났다.

이혼을 하기 전까지, 이안과 엘로이즈의 부부 생활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따지자면 부부가 아니라 하우스메이트 같았다. 그것도 엄청나게 사이가 안 좋은.

특이한 점은, 그 와중에도 매일 조찬은 함께했다는 점이었다.

필요한 대화는 그때 전부 하자는 아주 효율적인 이유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건 이안과 엘로이즈가 저택 안에서 얼굴을 맞대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생각할수록 대단한 부부야.’

회상을 끝낸 뒤 혀를 쯧쯧 찼다.

‘일단은… 내려가 봐야겠지?’

“금방 내려간다고 전하렴.”

“네, 네! 알겠습니다.”

목이 떨어져라 끄덕인 하녀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거대한 나무 문이 닫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다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엘로이즈의 서늘하고도 청초한 모습이 비쳤다.

나는 조용히 탄식했다.

참, 엘로이즈도 남자 복 하나는 지지리 없었군.

이 얼굴로 하필이면 이안이랑 결혼했다니.

‘다른 남자를 만났더라면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감정을 죽인 이안과 메마른 엘로이즈, 두 사람의 끝은 당연하게도 그리 좋지 않았다.

다이아나를 향한 감정을 깨달은 이안이 통보하듯이 이혼을 요구했고, 엘로이즈의 가문인 알피어스 후작가는 클라우드 대공가와 거의 척을 지다시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엘로이즈도 참 딱한 인물이었다.

‘엘로이즈도 무뚝뚝해서 그렇지,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이제 보니 이안은 참 여기저기 민폐를 잘도 끼치고 다녔다.

다이아나에게만 똥차였던 게 아니잖아, 이 인간.

“…어쨌든 지금은 이안 그놈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거지.”

슬쩍 문 쪽을 곁눈질했다.

당연하게도 지금 난 이안의 머리털조차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소설의 작가는 작품을 쓰는 내내 이안의 얼굴에 대해 구구절절한 묘사를 늘어놓았다.

눈부신 은발에 심해와 여명이 뒤섞인 듯한 자청색 눈동자, 수려한 눈매와 장인이 정교하게 깎아 놓은 것 같은 콧대,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붉고 탐스러운 입술… 이하 생략.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렇지, 한 화에 한 번씩 외모 찬양이 나오는 건 너무하지 않나?

어찌나 구구절절하게 공을 들이는지,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안의 미모를 묘사하는 부분은 가볍게 스킵할 정도였다.

“하여간 작가가 지독한 남주 팬이라니까.”

그래서 더 인기가 있었지만.

아무튼, 소설로 읽을 땐 그랬지만 막상 ‘그’ 이안을 눈앞에서 볼 기회라고 생각하니 혹하는 건 사실이었다.

고민하던 나는 결심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좋아. 어떻게 생긴 얼굴인지 한번 보자고.”

무슨 얼굴이 나오든 면전에 침부터 뱉어 주마.

***

…라고 결심한 게 고작 30분 전인데.

“…….”

저게 사람이야? 진짜로?

1층 메인 다이닝 홀에 입장한 나는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드넓은 다이닝 홀 안에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잘생긴 미남이 하나 앉아 있었다.

빛을 받아 시리게 빛나는 결 좋은 은발과, 눈부시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고스란히 흡수해 반짝이는 흰 피부.

반쯤 내리감은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오묘한 자청색 눈동자는 나른하고 황홀했으며, 그 아래로 곧게 뻗은 콧대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선이 굵으면서도 수려했다.

마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우아하고도 단정한 몸짓까지.

‘미쳤네….’

내가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동안 보고 들은 온갖 미남을 다 갖다 붙여도 저 남자 앞에선 오징어 쭉정이가 될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CG를 눈앞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저 인간이 이안 클라우드라고.’

직접 보고 나니 지겹게 이어지던 작가의 외모 찬양이 조금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침을 뱉기는커녕 정신을 똑바로 잡지 않으면 침이 줄줄 흐를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한참 속으로 감탄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고개를 든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뭡니까?”

“네?”

“서서 식사하실 겁니까?”

그 순간 누군가 머리를 한 대 억세게 친 것처럼 감탄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나는 사람이 존댓말을 하면서도 사람 기분을 잡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 순간 처음 깨달았다.

‘맞다… 이 자식 또 다른 별명이 공.주였지. 공포의 주둥아리.’

이안이 내 안의 똥차로 굳어진 데에는 비단 다이아나를 홀대하고 무뚝뚝하게 굴어서만이 아니었다.

이안은, 그러니까.

정말로 싸가지가 없었다.

모든 일에 감정을 배제하고 임하다 보니 늘 간결한 본론으로만 의사를 전달했고, 기본적으로 날카롭고 삐딱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지금도 보라.

아침부터 사람한테 ‘뭡니까.’하고 다짜고짜 묻는 꼴이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탄식하고 있을 동안, 나를 짧게 훑은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재개했다.

서 있든 말든 자기 알 바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조찬 생각이 없으시면 이만 올라가 보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먹을 거예요.”

근데 그 와중에 목소리가 좋아서 더 열 받았다.

싸가지가 없을 거면 목소리도 좀 모기처럼 얍삽하게 만들어 주든가.

심기가 꼬인 나는 저벅저벅 홀을 가로질러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접시 위에서 움직이던 이안의 손이 느려졌다.

“부인.”

“네.”

“그렇게 쳐다본다고 사람이 뚫어지진 않습니다.”

…너 목소리 그렇게 쓸 거면 이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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