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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화 〉 제일고 외전 3화 (131/131)

〈 131화 〉 제일고 외전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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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고 외전 3

윤희와 동거할 오피스텔로 이사할 날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챙겨갈 짐이라고는 옷가지가 전부였다. 이사 갈 때 몸은 참 편할 것 같았다.

나는 습관처럼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충전 중인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윤희는 가져갈 짐이 많은지 궁금하여 깨톡을 보내봤더니 자신도 비슷하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윤희 : 방에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우리가 필요한 것만 사면 될 것 같아.

나 : 그러고보니 근처에 다있소가 있었지?

윤희 : 응. 웬만한 건 거기서 사면 될 것 같아.

나 : 그게 좋겠네. 미리 사봤자 이삿짐만 늘어날 테니까.

윤희가 내 답변에 대해 동의를 표했다.

우리는 미리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윤희는 개인용 접시와 머그컵, 수저 등을 먼저 이야기했다.

나는 과제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 컴퓨터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꺼냈다.

나 : 아! 말하고 보니 생각난 건데, 난 컴퓨터고 노트북이고 아무것도 없네...

윤희 : 우리 엄마한테 부탁할까?

나 : 아니아니아니아니안히ㅓ아!

급하게 치다 보니 오타가 난무했지만, 고칠 새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답장이 늦었다간 윤희가 진짜로 부탁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윤희는 그냥 한 소리라고 둘러댔다. 십년감수했네.

나 : 그냥 내 돈 모아서 노트북 마련할거야!

윤희 : 바로 알바 시작하려는 거지? 바쁘겠다.

나 : 어쩔수 없지 머.. 가능하면 엄마한테 손 안 벌리고 싶기도 하고....

엄지손을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윤희랑 깨톡 중이야?”

“응. 방에 뭐가 필요할지 의논하는 중이었어.”

내가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 사이 엄마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이제 아들 얼굴 보기 힘들겠네.”

“그래봤자 서울 안인데 뭘.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자 엄마의 입술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벌써 우리 아들이 이렇게 컸구나 싶어서.”

“엄마 아들이니까 이렇게 잘 컸지.”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무슨 얘길 하려고 찾아왔는지 물어보았다.

“네 애인 얼굴 좀 보고 싶어서.”

엄마들 마음은 다 비슷한 것 같다. 윤희 아주머니도 날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 엄마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생각해 보니 많이 궁금하겠네. 졸업식 때 말곤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게다가 네가 애인 자랑도 많이 했잖니. 어떤 앤지 엄마가 궁금해서 그래.”

“안 그래도 윤희도 그런 얘길 하더라고. 이사하기 전에 엄마한테 인사하고 싶다고 말야.”

그러자 엄마가 잘됐다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면 윤희에게 얘기해줄래? 내일이나 모레에 시간이 되는지.”

“잠깐만.”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고, 윤희가 보낸 깨톡 무더기를 발견했다.

아니, 그새 이렇게 많이 보내뒀다고?

나는 내 의향을 묻는 깨톡에 대해 답하고 나서 엄마와 잠시 대화하느라 못 봤다는 말을 덧붙였다.

윤희 : 혹시 내가 방해한 거야?

나 : ㄴㄴ ㄱㅊ아

윤희 : 다행이네.

나 : 글고 엄마가 내일이나 모레중에 너랑 만나고 싶다는데 시간돼?

윤희 : 응! 난 언제든 괜찮다고 전달해 줘.

나는 엄마에게 윤희의 깨톡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엄마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고민에 잠긴 표정을 내비쳤다.

“내일 저녁에 고깃집에 갈 건데, 괜찮은지 물어봐 줄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깨톡에 엄마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윤희에게서 곧바로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 저녁 6시 반까지 OO고깃집으로 데려와 줘.”

“알았어.”

내가 깨톡 메시지를 보내는 사이 엄마가 방을 나갔다.

윤희 : 갑자기 떨리네……. 어떻게 입고 가야 될까?

나 : 음.. 그냥 자연스럽게 입고와도 될거 같은데?

윤희는 자신이 알아서 생각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내 대답이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나 보네.

밤 인사를 하고 나서 나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솔직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꿈속의 일 같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대된다.”

나는 지금 무척 설레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

다음 날, 나는 윤희를 마중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서 15분쯤 기다렸더니 버스에서 하차하는 윤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야, 여기!”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윤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평소랑 약간 달라 보였다. 아니, 약간이 아니라 좀, 이라고 해야 될까.

“뭐야. 왜이리 기합이 잔뜩 들어갔어?”

“사복 차림으로 뵙는 건 처음인데 잘 보여야지. 네가 봤을 땐 어때?”

나는 그 물음에 은근한 기대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2년 넘게 사귀었는데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윤희의 차림새를 살펴보았고,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상의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아래로는 검은색 머메이드 스커트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의 윤희에게서 보기 어려운 스타일.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아주 적절하게 예의를 갖춘 복장이었다. 아마 이것도 엄청 고심해서 고른 거겠지.

“…….”

“언제까지 볼 거야?”

“아!”

그제야 내가 넋 놓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얼른 정신을 수습했다.

윤희는 다시 한 번 차림새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매우 완벽하다고 생각해.”

나는 진지한 음성과 함께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래도 윤희는 불안한 모양인지 자꾸만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는 그런 윤희에게 다가가서 귀밑머리만 살짝 정리해 주었다.

“이제 진짜로 완벽해. 가자.”

“후우. 갑자기 떨리네.”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오른손을 내밀었고, 윤희는 얼른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윤희가 부츠를 신고 있었기에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약간 경사진 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자 엄마가 이야기한 OO고깃집에 도착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맞은편 의자 앞에 다가가자 윤희가 얼른 90도 인사를 했다.

“어서 자리에 앉으렴.”

“네, 아주머니.”

오호라. 확실히 긴장하긴 했네.

겉으로 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거지였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나 좋아?”

내가 윤희를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엄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렇게 보니까 윤희가 조금 아깝긴 하네.”

“앗, 아니에요! 저에게 정말 잘해줘요.”

윤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바람 소리가 날 만큼 손사래를 쳤다. 내가 참, 여자친구 복은 타고 났구만…….

엄마는 윤희의 반응이 재밌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나서 삼겹살 3인분을 주문했다.

“혹시 다이어트 같은 거 하니?”

“아녜요. 저 먹는 거 좋아해요.”

“그럼 잘 됐네. 아줌마도 오늘 많이 먹으려던 참이었거든.”

잠시 후 선홍빛깔을 자랑하는 삼겹살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엄마가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자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외식해보는 게 얼마 만인지…….

엄마가 집게로 고기를 뒤집자 먹음직스럽게 익은 면이 드러났다. 그 사이, 나는 윤희와 함께 반찬 셀프 코너에서 김치와 쌈 채소, 양파 등을 담아왔다.

원래는 혼자 가려 했는데, 윤희가 눈치껏 따라온 것이었다.

고기가 다 익자 엄마가 고기를 잘라서 나와 윤희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많이 먹으렴.”

“감사합니다.”

“응!”

윤희는 참기름장에, 나는 카레 가루에 고기를 찍어서 먹었다.

아, 고기가 좋아서 그런지 육즙이 입안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엄마의 굽기 솜씨가 더해지니 이보다 더 맛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맛은 괜찮니?”

엄마가 다음 고기를 불판 위에 올리면서 윤희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윤희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밝은 음성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술은 마셔봤니?”

음? 왜 우리 엄마가 갑자기 술 얘길 꺼내는 거지?

고개를 돌려보니 윤희도 당황한 듯 눈꺼풀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렸는지,

“네. 부모님하고 한두 번 마셔봤어요.”

라며 차분하게 응답했다.

참고로 나는 엄마랑 맥주 500ml짜리 한 캔을 나눠서 마셔본 게 전부다. 별로 궁금하진 않겠지만.

“그렇구나.”

엄마는 그러더니 직원을 향해 소주 한 병을 달라고 주문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 줄 알았더니…….

내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바라보았더니 엄마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릴 따름이었다.

마치 말괄량이 소녀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윽고 초록색 병과 소주잔 세 개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생각해 보니 소주를 마셔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질 않았네. 우리 엄마가 술 마시는 모습을 거의 못 봐서 그런 거겠지.

엄마가 소주병을 몇 번 흔들고 나서 뚜껑을 열었다. 그런 뒤 윤희에게 먼저 따라주었다.

대체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첫 만남부터 술을 먹이려는 거지?

“아들도 받아.”

“아, 응.”

엄마가 따라준 술을 받은 다음, 나도 엄마의 잔에 술을 따랐다.

건배하고 나서 엄마는 그대로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나와 윤희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잔을 비웠다.

“엄마. 갑자기 웬 소주야?”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질문을 입에 올렸다.

엄마는 턱을 괸 채 손에 쥔 소주잔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할 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기는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소주잔을 내려놓고 집게와 가위를 손에 쥐었다. 그런 뒤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면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그냥……. 이런 게 엄마 꿈이었거든.”

잘라낸 고기를 불판 가장자리로 밀어놓고 나서 엄마가 새로운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아들이 여자친구 데려오면 이렇게 마주 앉아서 술 한 잔 마시는 거 말야. 엄마 생각보다 빨리 꿈을 이루게 되어서 기분이 좋네.”

엄마의 입술에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엄마에게 이런 꿈이 있었다니. 나는 그런 엄마가 새롭게 보였다.

“그래서 네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엄마의 시선을 받은 윤희가 예의 바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이대로 애인 한 번 못 만들고 노총각이 되면 어떡하나 했는데, 요즘 보면 사람 구실을 좀 하게 된 것 같아.”

“아, 엄마…….”

왜 갑자기 낯 부끄러워지는 소릴 하는 거냐고…….

하지만 한 번 열린 엄마의 입술은 닫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공부 열심히 하고, 한성대까지 합격했으니 대단하긴 해. 내 아들이란 게 가끔 안 믿기기도 하고.”

“맞아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학교생활도 그랬어요.”

윤희의 맞장구에 엄마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그게 다 스터디부 활동 덕분 아니겠니. 그래서 이사장님께도 감사하고 있어.”

“외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게요.”

편안하게 말을 주고받는 걸 보니 윤희도 어느정도 긴장이 풀어진 기색이었다.

엄마는 바삭바삭하게 익은 삼겹살 조각을 나와 윤희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그런데 나보다 윤희에게 고기가 좀 더 많이 갔다.

“많이 먹고, 앞으로도 우리 아들 좀 잘 부탁할게.”

“네. 제가 잘 챙길게요.”

“혹시나 잘못하면 아줌마한테 얘기해. 아줌마가 책임지고 혼내줄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저한테 정말 잘해주거든요.”

“윤희야…….”

나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윤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 내가 여자친구 복만큼은 타고난 것 같다.

* * * *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서 나는 윤희와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주머니께서 좋게 봐주신 것 같아서 다행이야.”

윤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동안 내가 네 얘기 많이 했거든.”

“나도 그랬어. 이런 점은 또 비슷하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자 윤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리 집 들어가야겠다.”

“버스 시간 확인해 봤어?”

“아까 나오기 전에. 한 15분 뒤면 오더라고.”

문득 시선을 내려보니 윤희의 손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기보다 추위에 약하다니깐.

나는 윤희의 손을 잡고는 내 페딩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좀 낫지?”

“음. 네 손도 차가운데.”

이런, 별 효과가 없다니.

약간의 무안함을 느끼려는 찰나, 윤희가 그래도 이렇게 하고 있으니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것을 끝으로 한동안 우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던 겨울바람이 우리의 머리칼도 흩뜨려 놓았다.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질 무렵 윤희가 청아한 음성을 냈다.

“이제 사흘 남았네. 기대된다.”

“그러게. 나도 아직 꿈인 거 같아.”

“첫날에 뭐할까?”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더니 윤희의 기대감 어린 눈빛과 마주했다.

“딱히 생각 안 해봤는데, 아마 짐 정리하느라 정신없지 않을까?”

“어휴. 진짜 감성 깨는 덴 선수야, 선수.”

“아니, 근데 진짜 그럴 것 같단 말이야.”

그러자 윤희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네 말대로일 것 같아. 우리가 이삿짐을 정리해본 경험이 없기도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래도 말야. 너랑 같이 하는 거면 뭐든 즐거울 거 같아.”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지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윤희가 버스에 올랐다. 나는 버스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사흘 뒤면 윤희와 함께 살 수 있어!’

마음이 들뜨자 발걸음도 절로 가벼워졌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경사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우리는 오피스텔의 901호실에 정식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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