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제일고 외전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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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고 외전 2
내가 벙찐 표정을 짓고 있자 윤희가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물어보는 건데 말야.”
“굳이 안 물어봐도 돼. 네가 들은 게 정확하게 맞거든.”
윤희는 내게 반문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정공을 때렸다.
다행이다. 내 고막이 제기능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구나…… 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저기 윤희 씨? 이건 좀 많이 갑작스러운데…….”
“곤혹스러운 건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아서.”
윤희가 고개를 돌리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윤희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아래턱을 쩍 벌린 채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이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는데.”
윤희가 조금 전과 달리 겸연쩍은 목소리를 냈다.
“난 솔직히 네 입에서 동거하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다소 뜻밖의 대답이 되돌아왔기에 나는 눈짓으로 반문했다.
“효율성을 따져보고 나서 내린 결론이야.”
“미안한데, 구체적으로 얘기해주면 안 될까?”
그러자 윤희가 치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참고로 한 달 전에 나온 샘숭의 최신 모델이다. 나는 여전히 고1 때 산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나 다른 점투성이인데도 연인 사이가 된 게 참 신기하다.
뭐, 너무나 다른 극에 위치해있어서 오히려 잘 맞았던 걸지도 모르지만.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윤희가 내게 화면을 보라고 했다. 큼직한 액정에는 지하철 노선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너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기준으로 한성대역까지 환승만 4번을 해야 돼.”
“그렇지. 2시간 동안 꼼짝없이 지하철에 갇혀 있어야 하는 셈이지.”
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교통비가 좀 아깝기는 하지만, 한성대를 다니는데 그 정도는 투자라고 생각한다.
원래는 기숙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매일 그렇게 다니려면 쉽지 않을 거야.”
“그렇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 사귀었어도 윤희의 팩트 폭격만큼은 여전히 매운맛이었다.
아니, 이번에는 놀라자빠질 맛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런데 만약 한성대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고 생각해 봐. 교통비는 물론이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어. 그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것보단 다른 일을 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윤희의 발언을 끝까지 경청하고 나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만, 그렇게 되면 월세를 부담하는 건 자연스레 윤희의 몫이 된다.
“정말로, 괜찮겠어?”
“우리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빠랑 엄마도 허락해줬어.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신다고 일전에 약속했으니까.”
“언제 그렇게 다 해놓은 거야.”
이미 여러 번 놀라서 그런지 이제는 놀랄 힘도 없었다. 윤희는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를 띤 채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이 상황이 다소 어이가 없기도 해서 나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월세를 어떡하지.”
“그건 부모님이 내주실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혹시 나랑 같이 살기 싫은 거야?”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 타이밍에 기습이 들어올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윤희는 그런 내게 눈길을 고정한 채 응? 하고 되물었다. 그 표정은 얼핏 순수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요망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거 솔직히 외통수잖아.
여기서 대체 어떤 미친놈이 애인한테 싫다고 할 수 있겠냐고.
나야 당연히 윤희와 동거하는 건 찬성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24시간 내내 같이 있는 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로망이니까.
다만, 내가 일방적으로 얹혀사는 느낌이 드는 건 사양이다. 이제 나도 20살이고 책임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싶었다.
“윤희야. 나도 같이 살고 싶어.”
명료한 음성으로 내 의지를 밝히자 윤희가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기쁘네.”
윤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나는 잠시 넋을 놓고 그 모습을 감상했다. 전에는 풋풋한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20살이 되어서 그런지 한층 성숙한 느낌을 풍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에겐 과분한 여자친구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걸지도 모르겠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가 검지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자 윤희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월세의 절반은 내가 부담할 거야. 알바라도 뛰어서 말이야.”
“너도 참 한결같네.”
부드러운 톤으로 말한 윤희는 이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윤희의 동거 제안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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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윤희 아주머니의 차에 오르게 되었다. 내 옆자리에는 윤희가 앉아 있었는데, 설렌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설레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그걸 너무 티낼 수는 없었다. 윤희 아주머니께 감점 당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영재 군?”
“아, 네!”
너무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났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뻣뻣하게 앉아 있지 않아도 돼.”
백미러에 비친 아주머니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등받이에 조심스레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속으로 기나긴 한숨을 흘려보냈다.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한참을 달린 벤쯔 자동차가 한성대학교 근처의 원룸촌에 도착했다.
나와 윤희는 아주머니를 따라 근처에 있는 부동산 사무소로 이동했다. 아주머니가 사무소장과 매물을 알아보는 동안, 나는 윤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윤희야. 혹시 생각해 놓은 원룸 있어?”
“우선 시설이 깔끔했으면 좋겠어. 바퀴벌레 같은 거라도 나왔다간…….”
눈살을 찌푸린 채 몸서리치는 윤희.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여차하면 내가 잡을게. 많이 잡아봤거든.”
“…….”
윤희가 입술을 동그랗게 벌린 채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별세계 사람을 구경하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그냥 내가 사는 공간에 출몰했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해.”
“하긴. 없는 게 최고지.”
윤희는 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주방 공간이 적당히 넓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인덕션이 있으면 금상첨화라든지.
침대는 두 사람이 넉넉하게 누울 수 있으면 좋겠다든지.
“치, 침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자 윤희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무슨 생각한 거야?”
“아, 그게……. 착한 생각.”
윤희는 짤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예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말야, 여기서 그런 생각은 자제하도록 해.”
“넵.”
잡담을 나누는 사이, 사무소장과 이야기를 마친 아주머니가 사무소장과 함께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우리는 방을 구경하러 가기 위해 사무소를 나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10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어라? 원룸을 알아보러 온 거 아니었나?
“애들 둘이 살려면 이런 곳이 더 좋을 듯하네요.”
“예. 내부 시설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어요. 사모님이 보시기에도 만족하실 겁니다.”
우리가 구경할 방은 902호실.
사무소장이 현관문을 열어준 순간,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원룸이 아니라 투룸이었으니까!
대체 월세가 얼마나 나오려나……. 내 머리로는 이미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절반을 부담하려면 알바를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데.
윤희는 방을 보자마자 표정이 환해졌다. 아주머니에게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고 나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영재야. 이리 와봐. 저기 인덕션 있어!”
이렇게 흥분한 윤희를 보는 건 참 오랜만인데.
나는 윤희의 텐션에 어울려 주었다. 방을 다 둘러보고 나서 윤희는 여기로 하겠다고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평소의 윤희라면 몇 군데 더 둘러보겠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이 방이 마음에 든 거겠지.
“영재 군 생각엔 어떠니?”
“네. 저도 좋은 것 같아요.”
윤희가 좋아한다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 집보다 훨씬 좋기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나서 윤희는 개운한 얼굴로 부동산 사무소를 나섰다. 나는 윤희가 즐거워하는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여주면 좋아할 것이다.
“영재 군.”
갑작스레 들려온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하마터면 소중한 스마트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죄송합니다! 사진은 지금 바로 지울…….”
아주머니는 사진에 대해 잔소리하려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우리 윤희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윤희가 나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좋은 이야기를 참 많이 들려줬어. 영재 군 덕분에 공부를 더 잘할 수 있게 되었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게 되었다고.”
“다 윤희가 스스로 해낸 일이에요.”
겸양을 떨기 위한 말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아줌마도 영재 군에겐 감사하고 있어.”
“그러신가요?”
내가 놀라서 되묻자 아주머니가 덕분에 윤희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유를 알려주었다.
나는 윤희가 그렇게 바뀌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제일고등학교에 스터디드림이 처음 개설되었을 때였지. 그땐 이사장님이 윤희를 반드시 부원으로 데려오라 하셔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니 이것도 이젠 다 추억이 되었구나.
“앞으로도 우리 윤희를 잘 부탁해.”
나는 아주머니와 시선을 마주했고, 아주머니의 눈빛에 깃든 신뢰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둘이 지낸다고 해서 너무 젊음을 불태우진 말고. 알았지?”
“다, 당연하죠. 절 뭘로 보시고…….”
나는 애초부터 윤희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때 저만치 앞서가 있던 윤희가 나와 아주머니를 불렀다. 나는 한달음에 윤희에게로 달려갔고, 아주머니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윤희는 내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레 손을 잡았다.
“우리 엄마랑 무슨 얘기했어?”
“널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
“잘됐네. 안 그래도 엄마가 널 무척 만나고 싶어하셨거든.”
“아직도 긴장돼…….”
“힘내.”
등 뒤에서 윤희 아주머니가 점심을 먹고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긴장은 되지만, 좀 더 믿음직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영재야 어떡할래?”
나는 윤희에게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나는 생애 처음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편안한 분위기였기에 나는 금세 적응했고, 아주머니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윤희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세상은 넓고, 음식이 매우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
“만족스러웠다고 하니 다행이야.”
아주머니는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를 끌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아마 우리끼리 대화할 시간을 주려는 듯했다.
“영재야. 문득 든 생각인데.”
“응?”
“나도 네 어머니를 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윤희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가 언제 한 번 윤희를 데려오라고 했지…….
“이사 가기 전에 자리를 마련해볼게.”
“응. 미리 알려줘. 여러모로 준비해야 하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정말로 동거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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