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제일고 외전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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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고 외전 1
겨울방학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와 윤희, 그리고 규원이는 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교실에서 방송을 통해 졸업식을 치르고 난 다음, 우리는 각자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나와 윤희의 관계를 알고 있던 우리 엄마는,
“어머나. 혹시 윤희 양의 어머님이신가요?”
윤희 아주머니에게도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나도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아드님이 잘…… 공부 잘하게 생겼네요.”
뭔가 중간에 말이 바뀐 듯했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내 마음에 스크래치가 날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졸업식을 기회로 가족 인사까지 나누게 되었으니 이제 나와 윤희 사이는 공인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스터디부에서 따로 뒤풀이할 예정이라고 하며 엄마를 먼저 돌려보냈다.
“휴우.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네.”
다른 자리에서 부모님과 사진을 찍고 돌아온 규원이가 이마를 훔쳤다. 어째 오버하는 건 3년 내내 변하질 않는구만.
윤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피식 웃음 소릴 냈다.
“어어? 지금 나 보고 웃은 거야?”
눈을 한껏 부라리는 규원이.
그런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기에 이번엔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규원아. 잠시만 그대로 있어 봐. 사진으로 남기게.”
윤희는 아예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규원이가 눈을 풀어버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슬슬 가자. 우리 애들 기다리겠다.”
내가 걸음을 떼자 윤희와 규원이도 곧장 뒤따라왔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바로 별관의 2층에 위치한 스터디드림 부실.
제일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거의 매일 다녀서 이제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4층에 있는 3학년 교실을 빠져나온 우리는 중앙 계단을 따라 3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별관과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왜 이리 급해. 같이 가자.”
윤희의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앗,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네. 미안.”
내가 오른손을 내밀자 윤희가 덥석 손을 잡았다.
“와아. 이젠 진짜 물 흐르듯이 자유롭구나. 이야.”
규원이가 감탄하든 말든 우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적이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스터디드림 부실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민영이와 하민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졸업 축하해요, 선배님들!”
둘은 우리 얼굴을 보자마자 실내가 떠나가라 박수를 쳤다.
참고로 민영이는 2학년이고 하민이는 1학년이다. 그리고 둘 다 여학생이다.
분명히 내가 2학년이 된 이후부터 남학생이 입학했는데, 어째서 스터디부에 오는 건 여학생들뿐인지 모르겠다.
우리 셋은 두 후배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봄방학에 학교 오기 귀찮았을 텐데.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귀찮긴요. 마지막으로 선배들 얼굴 보고 싶어서 왔죠.”
민영이가 은근히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뒤풀이 땐 영재 선배가 쏜다고 했으니까요!”
하민이는 옆에서 팔을 높이 쳐들며 의욕을 보였고.
“잠깐만. 누가 그런 얘길 했지?”
“엣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규원이가 보였다.
“저 입이 또 오두방정을…….”
“에이, 솔직히 3년 내내 부장하면서 한 번도 안 샀잖아. 인정?”
“으음…….”
여기서 팩트를 들먹이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
헛기침으로 무마해보려 했으나 후배들의 열렬한 눈빛 공격을 감당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와. 마지막 날조차 이러기야?”
규원이가 바람을 넣자 민영이와 하민이가 얼른 동참했다.
여론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린 이상 도망칠 구멍이 없었다.
내 지갑에 얼마나 있더라…….
대놓고 동전 지갑을 꺼내기엔 체면이란 게 있으니(?) 나는 최대한 기억을 뒤져보았다. 다행히 학교에 오기 전에 지갑 속을 확인해둔 덕분에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12,330원!’
학교 근처의 BU편의점에서 과자 몇 개와 음료수를 살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제 다음 주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야겠지.
“그래. 졸업했는데 부장인 내가 뭐라도 해야지.”
“오오! 드디어 우리 영재가 달라졌구나!”
아니, 이 정도로 감격스러워한다고?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규원이를 쳐다보았다.
“영재 선배. 저는 선배가 사주는 거면 뭐든 다 잘 먹을 수 있어요.”
“저도 그래요, 선배!”
아니, 얘네들도 이러기야?
“하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BU편의점 갔다 올 테니까.”
내 한 마디에 규원이와 후배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럼 나도 같이 가자.”
내내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윤희가 곁으로 다가왔다.
“어? 설마 윤희랑 같이 튀는 거 아니지?”
“날 뭘로 보고 그러냐. 어이가 없네.”
기가 차서 헛웃음을 웃어도 규원이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윤희가 그냥 같이 가는 것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으휴. 그래 이 부러운 것들아. 빨랑 갔다 와.”
규원이가 날벌레를 쫓는 것마냥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윤희와 함께 부실을 나오자마자 자연스레 손을 맞잡았다.
“지갑 사정 괜찮은 거야?”
“응. 아마도…….”
사실 오늘 탕진하면 나흘 간은 집밥만 먹어야 한다. 뭐, 엄마가 해주는 반찬은 뭐든 다 맛있으니까 괜찮긴 하지만.
“얼마 있는지 얘기해 봐.”
“12,330원…….”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나마 윤희 앞이니까 얘기한 거지, 다른 녀석들 앞에서는 절대로 이런 얘길 하지 않는다.
“그 정도면 괜찮겠네.”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한 윤희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치킨은 내가 살 테니까, 넌 과자랑 음료수만 사면 되겠네.”
“매번 도움만 받네. 미안해.”
솔직히 남친으로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하지만 내 현실이 비루한 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탓일까, 윤희가 내 등을 가볍게 때렸다.
“허리 펴. 남자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해야 하는 법이잖아.”
“그렇긴 한데…….”
“또 그런다, 또.”
그러면서 윤희가 검지로 내 볼을 쿡쿡 찔렀다.
“습관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거.”
“이게 참, 잘 안 고쳐지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윤희가 이번에는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걱정 마. 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윤희야…….”
감동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자 윤희가 눈썹을 움찔했다. 잠시 후엔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쑥스러워했다.
저러는 모습 볼 때마다 참 귀엽단 생각이 든다.
윤희는 헛기침을 하고는 얼른 가자며 앞장섰다.
뺨이 발그레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이미 봤다.
“같이 가!”
나는 얼른 윤희 곁으로 다가갔고, 손을 맞잡은 채 BU편의점으로 향했다.
* * * *
과자와 음료수에 더해 윤희가 산 치킨까지 더해지면서 풍성한 뒤풀이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윤희가 샀다는 것은 다른 멤버들에겐 비밀로 붙였지만.
“드디어 영재가 쏜 치킨을 먹다니. 이젠 아무 여한도 없어…….”
또 되도 안 한 소릴 하고 있구만.
그때 치킨을 우물거리던 하민이가 나와 윤희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영재 선배랑 윤희 선배는 이번에 한성대학교에 합격하셨다고 했죠? 축하드려요!”
바로 옆에 있던 민영이도 하민이를 따라 축하한다고 했다.
“얘들아? 나도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규원이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안달 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착한 후배들은 그런 규원이에게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긴, 1학년 때의 규원이 성적을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이뤘지. 그때는 아예 대학교도 못 가는 줄 알았으니까.
“이제 부실에서 선배들을 못 볼 거라 생각하니 아쉬워요.”
이제 곧 3학년을 앞둔 민영이가 시무룩한 기색을 내보였다.
“맞아요. 지아 선배랑 주현 선배랑 헤어질 때도 아쉬웠는데, 선배들마저 다 떠나면…….”
1학년인 하민이까지 말을 얹으면서 화기애애했던 뒤풀이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렸다.
이럴 땐 부장인 내가 교통 정리를 해야지.
“어쩔 수 없지. 언제까지나 고등학생일 수는 없잖아.”
“그건 알지만요…….”
성에 차지 않는 듯 민영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솔직히 이럴 땐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무작정 괜찮다고 말하는 건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고.
어느새 윤희와 규원이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쩝, 입맛을 다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야. 3년 동안 정든 공간을 떠나는데 아쉽지 않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떠날 사람은 떠나야지. 그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어?”
“그쵸…….”
대답하면서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는 민영이.
뭐, 너무 맞는 말만 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성격이 이 모양이라서.
나는 민영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민영아.”
“네, 선배.”
“스터디드림을 잘 부탁할게.”
명료한 음성으로 말하자마자 민영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검지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저, 저요?!”
“응. 차기 부장으로는 네가 제일 적임이거든.”
내 발언에 윤희와 규원이도 의견을 같이했다.
사실 전부터 민영이를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일한 2학년 멤버이기도 했고, 학년 내에서 성적으로 톱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도 찬성이에요!”
하민이까지 찬성표를 던지면서 민영이가 차기 부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영재 선배처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내가 해온 걸 봤잖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물티슈로 손을 닦은 다음, 민영이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민영이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열심히 해보겠다며 결심을 굳혔다.
“맡아줘서 고마워.”
“네, 선배. 저, 열심히 할게요. 부원 모집도 열심히 하고.”
“응원할게.”
윤희와 규원이도 파이팅을 외쳤다.
이젠 정말로 마음 편히 제일고를, 스터디드림을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뒤풀이 정리를 마치고 나서 모두와 함께 부실을 나섰다.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내려오자 어느덧 큰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규원이는 후배들과 함께 2차를 가겠다면서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잠깐 산책이나 할까?”
나는 윤희의 권유에 곧장 응했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선 윤희의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가며 우리는 지난 3년 간 스터디부에서 쌓은 추억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추억 얘기는 언제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느덧 우리는 한적한 공원에 도착했다.
“잠깐 쉴까?”
“그러자.”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벤치에 앉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우리가 졸업을 하게 될 줄이야…….”
“나도 신기해. 이런 날이 오는구나.”
나는 윤희의 옆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느꼈는지 윤희도 이쪽을 향해 눈길을 틀었다.
“통학은 어떻게 할 거야? 네 집에서 멀잖아.”
“음……. 그래도 2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데?”
물론 버스랑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니 교통비가 많이 들겠지만.
하지만 이 정돈 감수해야지.
윤희는 내 대답이 별로 성에 차지 않는지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며칠 전에 엄마랑 통학 문제로 얘길 좀 해봤어. 우리 집에서도 1시간 30분 이상 걸리니까.”
“기사님이 태워다 주시지 않고?”
반문하자마자 윤희가 검지로 내 어깨를 세게 쿡 찔렀다.
“그렇게 눈에 띄기는 싫거든?”
“알아. 그냥 농담 한 번 해본 거야.”
가볍게 웃었더니 윤희가 검지로 한 번 더 응징했다.
패딩을 입고 있어서 아프진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아픈 시늉을 했다.
“장난은 그쯤 해.”
“알았어.”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윤희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통학 말고 근처에 원룸을 잡기로 했어.”
“와아. 진짜 편하겠네.”
“네 생각에도 그게 훨씬 낫겠지?”
윤희의 재력이라면 원룸에 나가는 돈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겠지.
나는 그럴 것 같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나랑 같이 방 알아보러 가자.”
“나도?”
되물었더니 윤희가 생각지도 못한 발언을 입에 담았다.
“그야, 너도 같이 지낼 거니까.”
으잉?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