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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화 〉 128화­우리가 찾아낸 답(完) (128/131)

〈 128화 〉 128화­우리가 찾아낸 답(完)

* * *

면접장을 박차고 나온 덕에 한성고 편입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무척 좋은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격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참 신기했다. 한때는 한성고에 편입을 못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는데.

하지만 그때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제일고등학교의 스터디부인 스터디드림의 부장 자리에 만족하고 있으니까.

한성고에 가지 않게 된 이후, 나는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느라 혼났다.

엄마, 담임선생님, 이사장님, 도연이, 형준이.

담임선생님과 이사장님의 경우에는 곧바로 그 소식을 접했다. 덕분에 나는 다음 날에 바로 교무실과 이사장실에 각각 불려갔다.

먼저 담임선생님은 나를 슥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뭐, 막연히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

“그랬군요…….”

“사람 정이 꽤 대단하지 않냐?”

담임선생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으로는 이사장님과 대면했다. 이사장님은 내게 믹스 커피 한 잔을 내어주었다.

“면접장을 박차고 나왔다고 들었다.”

“네.”

명료한 어조로 답하자 이사장님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성고에 편입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런 눈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지금은 아녜요.”

“그런 것 같구나.”

이사장님이 고개를 몇 차례 주억거렸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아?”

“그렇습니다.”

힘주어 답했다.

“알겠다.”

그날 밤에는 엄마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엄만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쌤도 그랬어.”

나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입을 움직였다. 엄마가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성공도 중요하지만, 엄마는 우리 아들이 주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엄마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럴게.”

그로부터 이틀 후 도연이에게 이 건에 대해 전했다. 도연이는 다행이라고 하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스터디부는 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런가?”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매만졌다.

“응.”

고개를 주억거린 도연이가 빙그레 웃었다.

“전에 얘기한 거 기억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연이가 살짝 불만스러운 눈빛을 쏘았다.

“2학년 되면 스터디부 들어가겠다고 한 거 말이야.”

“아 맞다!”

“너무해.”

흥, 하고 도연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미안. 요새 좀 정신이 없었거든.”

“알아. 사실 그냥 해본 거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형준이에게 털어놓았다. 녀석은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거봐라, 내가 뭐랬냐. 별로라고 했잖아. 잘 선택했어!”

그러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말로만 하면 될 걸 왜 굳이 때리는 거냐. 한 마디 따지고 들자 형준이가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그냥 왠지 때리고 싶어서.”

“나 샌드백 아니거든!”

“어쩔?”

그러면서 오히려 더 열심히 때리는 형준이.

덕분에 평생 등을 못 펴는 줄 알았다.

언젠가는 되갚아 줄 테다. 나는 등을 문지르며 그렇게 다짐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내가 벌인 한성고 편입 해프닝을 수습할 수 있었다.

며칠간 숨을 돌리고 나서 우리 스터디드림은 기말고사 대비를 시작했다.

주말 학생 교사 활동도 열심히 참여했다. 물론 이번에도 규원이는 학생 교사를 하지 못했다.

“으으. 문상이 또 날아갔어…….”

“나중에 내 거 줄게.”

윤희가 옆에서 규원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크으!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땡큐땡큐!”

규원이는 윤희를 얼싸안은 채 감격에 겨워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그 열정을 알아준 건지 애들이 정말 열심히 따라와 주었다.

덕분에 전체 성적이 중간고사 대비 소폭 상승했다.

그렇게 불태운 끝에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우리는 여름 방학 때와 마찬가지로 주 3회 부 활동을 했다. 이번에는 여름 방학 때와 달리 주현 누나도 참여했다.

역시 스터디드림은 5명이 다 있어야 되는구나. 나는 멤버들을 둘러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2월 7일. 개학식이 치러졌다.

나와 윤희, 규원이는 18살이 되었다. 지아·주현 누나는 19살이 되었고.

개학식은 운동장이나 체육관이 아닌 각각의 교실에서 진행했다.

TV를 통해 지루한(?) 이사장님의 말씀을 들었다. 몇몇 애들이 잘 익은 벼마냥 고개를 수그렸다.

그나저나 저번보다 이마의 M자가 더 넓어진 듯한데……. 나는 머리숱이 많으니 탈모가 오지는 않겠지?

이사장님이 마무리 인사를 하자 담임선생님이 곧장 TV를 끄고는 종례를 했다.

“오늘은 이걸로 끝. 내일부터는 정상 수업하니까 그리들 알고.”

““네에.””

선생님이 우리들의 인사를 받은 뒤 교실을 나섰다. 내가 가방을 챙기는 동안 옆에서 윤희가 말을 걸었다.

“잠깐 할아버지랑 얘기 좀 하고 올게.”

“그래. 알겠어.”

윤희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규원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늘 스터디부 올 거야?”

물어보자 규원이가 신음을 내며 턱을 문질렀다.

“역시 오늘 같은 날에는 놀아야지.”

“배탈그라운드?”

“당연하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규원이.

“그나저나 윤희는 아까 어디로 간 거야?”

“잠깐 이사장실에 들른다고 하더라.”

나는 가방 지퍼를 닫았다. 교실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그래애?”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이상야릇한 미소를 머금는 규원이.

“뭔데? 기분 나쁘게.”

“아니, 그냥.”

도리질을 하면서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진짜 왜 저러지?

그때 규원이가 내 등을 가볍게 터치했다.

“그럼 잘해 봐. 이만 갈게!”

규원이는 열렬하게 손을 흔들고 나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쟤가 웬일이래.

가볍게 웃고 나서 책상 서랍에 손을 집어넣었다. 쪽지 하나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그것을 조심스레 바깥으로 꺼냈다.

「11시까지 스터디부로 와 줘.」

바로 윤희가 보낸 쪽지였다.

* * * *

3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혹시나 하여 이사장실에 눈길을 주었는데, 문이 열릴 기미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오전 10시 51분.

먼저 부실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나는 구름다리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2학년 교실들을 하나하나 지나쳐 가는 도중에 지아·주현 누나와 마주쳤다.

“어라? 오늘 스터디부 가?”

지아 누나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고, 주현 누나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럴 만한 일이 있거든요. 누나들은요?”

“우린 오늘…….”

지아 누나가 말끝을 흐리면서 주현 누나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뭐할까?”

“으, 응?”

갑자기 의견을 물어보니 놀란 모양새였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갈까?”

주현 누나가 그러자고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아 누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런고로 오늘은 빠질게.”

지아 누나는 내게 귀여운 윙크를 날렸다.

“참, 규원이는?”

“게임하러 간다던데요.”

“좀 있다 전화해봐야겠네.”

혼잣말을 내뱉은 지아 누나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사실은, 아쉬운 생각도 들어.”

“제가 한성고에 안 가서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지아 누나가 당황하여 얼른 손을 내저었고,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너어!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려고 하는데.”

“이제 제대로 들을게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 사인을 보냈다. 지아 누나가 목을 가다듬었다.

“네가 계속 부장을 맡아준다고 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는 결국 친구로 남는 걸까 생각하면 아쉬움도 남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름 방학 때 나는 지아 누나의 고백을 거절했으니까.

“지아 누나.”

“응.”

고개를 위아래로 한 번 움직이는 누나.

“누나랑은 계속 좋은 인연으로 남고 싶어요.”

“그래. 그럼 이제 나한테 기회는 없는 걸까?”

“그건, 대답하기 어렵네요.”

“너무하네.”

불퉁한 어조로 내뱉은 지아 누나.

나는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내 얼굴을 응시하던 지아 누나가 콧숨을 내쉬었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 되었다.

“괜찮아. 안 될 일은 안 되는 거니까.”

“저는 누나도 좋아해요.”

“고마워.”

지아 누나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영재, 파이팅…….”

대화를 듣고만 있던 주현 누나가 응원의 한 마디를 전했다.

“어, 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교실에서 규원이가 왜 잘해 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누나들이 그런 식으로 말한 이유도.

다들, 알고 있는 거구나.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10시 55분.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 * * *

스터디드림 부실에 당도했다.

여기에 있을까, 없을까.

살짝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연보랏빛 머리칼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가슴 속에 서서히 퍼지는 안도감.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윤희는 여전히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윤희에게 다가갔다.

“우리 둘만 있네.”

윤희의 담담한 어조.

“그러게.”

윤희가 돌아섰고, 자연스레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어.”

“그렇구나.”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움직였다. 윤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지만 너도 내게 하고 픈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반문해도 윤희의 얼굴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알지. 눈치 백단.”

역시 윤희에게는 못 당하겠군.

“아……. 뭐라고 해야 할까.”

막상 문장을 자아내려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윤희는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첫 마디를 떼었다.

“사실 그 구절에 대해서 더 생각해 봤어.”

“만약 바다에 중심이 있다면, 파도는 왜 그리 가지 않을까?”

“역시 출제자 아니랄까 봐…….”

윤희의 눈썹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무튼, 생각을 해봤어. 내가 왜 스터디부에 남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

“단 한 가지 요인만으로 결정을 내리지는 않으니까.”

정론이라는 의미로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스터디드림이라는 공간과 분위기가 편안하고, 멤버들도 다 마음에 들고, 학교의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마음에 들고…….”

이유를 한 가지씩 댈 때마다 손가락을 접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바다의 중심은 아니었던 거야.”

잠시 말을 멈추고 윤희의 기색을 살폈다. 자못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바다의 중심은, 따로 있었어. 작년 3월부터 말이야.”

“…….”

윤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 대화했을 때 기억 나? 스터디드림 입부 권유했을 때. 엄청 쌀쌀맞게 대했잖아. 말 걸지 말라면서.”

“아……. 응. 그랬지.”

창피한 듯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만약 그때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같은 반 친구 정도로만 남았을 거야. 필요한 대화나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어. 그땐 진짜로 한성고 편입만이 목적이었으니까.”

윤희가 살며시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난 편입을 포기했지. 아까도 말했듯이 바다의 중심을 찾았기 때문에. 그게 스터디부가 소중하기 때문만이 아니었어.”

명료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호흡을 골랐다.

“윤희야.”

“잠깐만.”

윤희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어? 아, 그래.”

나는 내심 기대하며 윤희를 바라보았다. 윤희의 입술이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이번에 남학생이 좀 들어온대.”

이 타이밍에 갑자기 그런 얘기를?

어리둥절하여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희는 아랑곳않고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10명 정도 온대. 게다가 이번에는 입학생 수도 작년보다 많다고 하고.”

“아아. 그렇구나.”

아무 대답도 안 하면 어색할 것 같아서 되는대로 입술을 놀렸다.

이사장님이 원하던 결과가 나왔으니 다행이긴 하구만.

……단지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가가 의문이지만.

“이제 우리 학교의 유일한 남학생이랑 타이틀을 벗어던질 수 있겠구나. 아쉬울 것 같아.”

“아냐, 전혀 안 그래.”

오히려 불편했던 경우가 많았기에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 학년의 유일한 남학생으로 남을 것 같아.”

왜냐면 지금 들어오는 남학생들은 다 내 후배뻘이니까.

나와 직접적으로 만날 일이 없는 녀석들이다.

“좀 의외네.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

윤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윤희야.”

“응.”

“내가 말한 바다의 중심은 말이야……. 바로 너야.”

“…….”

윤희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좋아해. 정말로.”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긴장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담담히 고하는 느낌이랄까.

윤희의 얼굴에 서서히 행복감이 번졌다.

“나도. 좋아해.”

윤희의 뺨에 옅은 홍조가 자리 잡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윤희가 자신의 손을 포개어 왔다.

늦겨울의 햇살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쌌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해.”

나는 윤희를 바라보며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윤희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답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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