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7화 〉 127화­방황 끝에서야 (127/131)

〈 127화 〉 127화­방황 끝에서야

* * *

금요일이 찾아왔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결전의 날.

나는 반쯤 멍한 정신으로 오전 수업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도연이가 내게 다가왔다.

“영재야. 담임쌤이 교무실에 오라고 하셨어.”

이건 분명 이사장님의 호출이겠군.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교실을 두리번거렸다. 윤희와 규원이는 이미 급식실로 향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먼저 교무실로 발걸음했다. 예상한 대로 담임선생님은 곧장 이사장실로 올라가 보라고 했다.

중앙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때마침 아래층에서 올라온 윤희, 규원이와 마주쳤다.

“이제야 밥 먹으러 가?”

“그 전에 어디 갈 데가 있어서.”

나와 규원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윤희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어디? 오늘 메뉴 동그랑땡인데.”

“아…….”

나는 슬쩍 윤희의 눈치를 보고 말했다.

“이사장실에. 오늘 한성고 면접날이거든.”

“아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머리를 주억거리는 규원이와 달리 윤희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래. 잘해 봐. 파이팅.”

윤희는 아무 말 않고 곧장 교실로 향했고, 규원이는 얼른 그 뒤를 쫓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반응은 좀 섭섭한데…….

점차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입바람을 불었다. 그런 뒤 이사장실로 올라갔다.

노크를 하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거라.”

이사장님은 책상에 앉아있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노트북은 덮어놓은 상태.

책상 앞으로 다가가자 이사장님이 서랍장에서 누런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물음표를 입에 담자 이사장님이 옅게 웃었다.

“이번 학기까지의 성적과 모의고사 성적, 인적 사항 서류가 들어가 있단다.”

“아하.”

나는 종이봉투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이사장님이 나를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면접은 오늘 오후 4시까지 한성고의 교무기획부에 가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아, 이사장님. 그러면 출석은 어떻게 되나요?”

“나중에 조퇴로 처리하라고 담임한테 얘기해 두마.”

“넵.”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준비는 잘했고?”

“그닥요…….”

애초에 무슨 질문을 던질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까.

이사장님의 입술이 약간 휘어졌다.

“너무 긴장하지 말려무나. 편하게 답하면 돼. 어려운 질문을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네. 명심할게요.”

눈에 힘주고 응답했다. 이사장님이 격려해 주었다.

“잘해 보거라.”

“열심히 할게요.”

나는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이사장실을 나왔다.

* * * *

6교시 수업이 끝난 직후, 나는 가방을 챙겼다. 한성고까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일찍 출발해야 했다.

윤희는 시집에 눈길을 고정한 채 내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 영재 너 어디 가?”

“설마, 수업 째는 거?”

내가 가방을 메고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몇몇 애들의 이목에 내게로 쏠렸다. 한성고 편입 사실을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적당히 둘러댔다.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서 조퇴하려고. 먼저 갈게.”

나는 곧장 교무실에 들러 얼굴도장을 찍었다. 선생님은 조퇴 처리해 뒀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나는 그 길로 교사를 나서 버스 정류장까지 발걸음했다.

한성고까지는 버스로 대략 20분 거리.

스마트폰을 켜고 깨깨오톡을 실행하자 곧바로 스터디부 단톡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확실히 내가 스터디부를 나간다고 한 이후로 깨톡방의 활력이 많이 죽기는 했다.

그 전에는 서로 아침 인사도 나누고, 물어볼 거리가 있으면 바로 질문도 올리고 그랬는데.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는데, 한낮이라 그런지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출입문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창밖 풍경을 멍하니 감상했다.

긴장되거나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뿐.

한편으로 찝찝한 마음도 있었다.

‘만약 바다에 중심이 있다면, 파도는 왜 그리 가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 와서도 이 시구의 의미를 여전히 해독해내지 못했으니까.

일주일째 윤희와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한 일도 마음에 걸리고.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와중에도 버스는 착실히 이동하여 목적지인 한성고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하차한 뒤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성고등학교라고 큼직하게 쓰여진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제일고보다 훨씬 더 큼직한 정문.

괜히 명문고가 아니었어…….

왠지 모르게 주눅 드는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 * * *

교무기획부는 1층 복도 끝에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길에 이따금 교실 풍경을 곁눈으로 살폈다.

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눈을 빛내며 집중하는 모습.

형준이의 설명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역시나 명문고는 다르구나.

교무기획부에 들어갔는데, 나 말고도 편입 면접을 보러 온 학생이 더 있었다. 눈짐작으로 세어봐도 스무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다들 옆구리에는 누런 종이봉투를 끼고 있었다.

나는 줄의 맨 끝에 합류했다. 줄은 금방금방 빠졌고, 순식간에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종이봉투를 직원에게 제출했다.

“옆에 있는 면접대기실로 가세요.”

면접대기실까지 따로 마련돼 있는 거냐! 역시 명문고는 급이 다르구나.

나는 출입문 앞에서 대기하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직원이 대기실에 있는 학생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면접은 오후 4시 반부터 시작하고, 한 번에 세 명씩 면접을 보게 될 거예요. 어려운 질문을 없으니까, 편하게 대답하면 됩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답했다.

여유 시간이 30분 넘게 남았군.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스터디부 깨톡방을 다시 들어갔다.

물론 지금은 다들 수업 중일 테니 새로운 깨톡이 왔을 리 만무하다.

나는 스크롤을 천천히 올리며 그동안 주고받은 깨톡들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저 시간을 때우려는 행위일 뿐.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미련이 남은 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 단톡방에 남아있으니까.

면접 시간이 다가오자 없던 긴장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을 풀려고 했다.

할 수 있어.

속으로 되뇌었다.

대략 5분쯤 지났을까, 직원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부터 편입 면접을 시작합니다. 호명하는 학생은 차례로 저를 따라와 주세요.”

그런 뒤 세 명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을 따라갔다.

가나다순으로 호출했으니 나는 가장 마지막 차례겠군.

이사장님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1차 서류 합격을 하면 사실상 면접도 합격이라고.

괜찮다. 할 수 있다.

수없이 되뇌며 자신을 다독였다.

대기하던 애들이 하나둘 줄어들면서 내 차례도 점차 가까워졌다. 묘한 압박감 탓일까,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가슴 한편이 갑갑한 듯한 느낌도 들고.

“탁지훈, 편인곤, 한영재 학생.”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면접실로 들어갔더니 책상에 앉아있는 면접관 세 명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한성고의 선생님들이겠지.

나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오른쪽 창가 자리에 섰다. 면접관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옆에 선 녀석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음. 그럼, 일단 자기소개부터 들어보지. 왼쪽부터.”

가운데에 앉은, 머리가 O형으로 벗겨진 면접관의 발언이었다.

녀석들은 간단하게 이름과 나이 등을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영재입니다. 현재 17살입니다.”

나도 간략하게 소개를 끝마쳤다.

이어 우리들을 향해 면접관이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는, 현재 다니는 학교와 지난 1년간의 성적.

우리가 제출한 서류상에 다 나와 있을 텐데. 뭐,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들 테니까.

대답을 마치자 두 번째로 평소의 공부 습관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다. 나는 있는 그대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머리가 O형으로 벗겨진 면접관이 우리를 주욱 둘러보았다.

“한성고등학교에 지원한 계기가 뭔지, 왼쪽부터 들어보지.”

이 질문은 앞선 질문들보다는 대답하기 까다롭겠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제 이것만 대답하면 면접도 끝이다.

좀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걸 위해 스터디드림에서 나온 건가.

가운데에 선 녀석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가 한성고에 지원한 이유는, 명문 학교인 이곳에서 저의 꿈을 펼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정말 진심으로 오고 싶어 하던 학교입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표를 하고 있는 녀석의 표정이 무척이나 간절했다.

지원한 이유는 나도 똑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떠오른 직후, 윤희가 말했던 수수께끼 같았던 구절이 떠올랐다.

……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지?

“음 한영재 학생?”

면접관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둘러보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려 있었다.

“아, 네.”

“그래. 지원한 계기가 뭐지?”

“저는…….”

목소리가 나오다가 말았다. 면접관들의 눈길은 여전히 내게 쏠려 있는 상황.

나는 입김을 불었다.

“저는, 편입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상관없었다. 더 이상 얼굴 볼 사람들도 아니니까.

나는 그대로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 * * *

한성고등학교의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뛰어가는데 정류장에 서 있던, 제일고등학교로 가는 버스가 이제 막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아저씨이! 잠깐만요오!”

목이 터져라 외치며 버스를 쫓아갔다.

다행히 외침이 닿았는지 버스가 다시 멈춰 섰고, 나는 곧장 버스에 올라탔다.

빈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20분.

호흡을 가다듬은 뒤 시구를 다시 속으로 읊었다.

‘만약 바다에 중심이 있다면, 파도는 왜 그리 가지 않을까?’

저번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상황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바다가 만약 내 마음이라면?

그리고 중심을 나의 진심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3월 2일.

나는 여전히 한성고에 가고 싶어 했다.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한 그 날부터 계속.

그건 당연히 진심이었다. 그래서 이사장님이 제시한,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그런 거래에 응했지.

하지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공부를 하다 보니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멤버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몇 달 동안 함께 부 활동을 하며 겪었던 일들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언제부턴가 한성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불과 조금 전까지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던 3월부터 지금까지 한성고 편입은 나의 유일한 목표였으니까.

그러니 파도가 바다의 중심으로 가지 않을 수밖에.

한성고에 편입하고 싶다는 내 마음이 더 이상 진심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의 파도가 그리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정답이 나왔다. 이제 이것을 출제자에게 들려주면 된다.

한참을 질주하던 버스가 제일고등학교 정류장에 멈췄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뜀박질을 시작했다.

완만한 경사로를 올라가는 내내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제일고 정문을 통과.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였다. 아직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으니까.

심장이 요동을 쳐도 나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별관 입구로 들어가 2층까지 한달음에 올라갔고, 드디어 스터디드림 부실에 도착했다.

나는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몰려들었다.

“영재야?”

무척 반가운 지아 누나의 목소리.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희야. 알아냈어, 알아냈다고.”

윤희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내가 왜 한성고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계속 망설였는지.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어. 진심이 아니니까 자꾸만 망설였던 거야. 파도가 바다의 중심으로 가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네 진심은?”

윤희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곧게 펴고 대답했다,

“앞으로도 계속 스터디부 부장을 하고 싶어. 졸업할 때까지!”

그제야 윤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멤버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지아·주현 누나가 왼손을, 윤희, 규원이가 오른손을 잡았다.

“나, 돌아왔어요. 이제 어디에도 안 갈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 멤버들 모두가 밝은 표정을 띤 채 기뻐했다.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응!”

윤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세차게 움직였다.

나는 그렇게 스터디드림의 부장으로서 복귀하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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