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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화 〉 123화­주사위는 던져졌다(3) (123/131)

〈 123화 〉 123화­주사위는 던져졌다(3)

* * *

6교시 쉬는 시간.

몸이 뻐근하여 기지개를 쭈욱 켠 다음, 목을 돌리면서 뭉친 근육도 풀어주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만.

나는 펼쳐놓은 필기 노트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잠시 후 무언가가 내 왼쪽 어깨를 쿡쿡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지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윤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잠깐만 자리 옮기자.”

윤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남들이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려는 걸까.

나도 뒤따라 일어섰다.

윤희가 눈짓을 하고 나서 교실 뒷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다.

“뭐길래 여기까지 온 거야?”

내 물음에 윤희가 몸을 홱 틀고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까 도연이에게 했던 얘기 말야.”

“어떤 거?”

했던 얘기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내 표정을 살피던 윤희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내년 스터디부 계획에 대한 거.”

“아, 그거.”

“정말로 담임선생님이 그 얘길 너에게 해준 거야?”

마치 사실 관계를 따지려는 듯한 어조.

“응. 그랬어.”

일단 고개를 움직이며 긍정했다.

“그런데 그게 왜?”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되물었더니 윤희가 대답 대신 신음 소릴 냈다.

무언가 납득이 되지 않는 듯한 모양새.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왠지 날카롭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할아버지를 통해서 비슷한 얘길 들었거든.”

“직접 얘기하신 거야?”

윤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건 아니고, 할아버지가 방에서 중얼거리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됐어.”

“아하.”

그제야 윤희가 여기까지 와서 얘기를 하자고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윤희의 할아버지가 이 학교의 이사장이라는 사실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상황이니까.

팔짱을 낀 윤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그런데 네 입에서도 똑같은 얘기가 나와서 의심이 되는 거지.”

“진짜로 담임선생님이 얘기해준 거야.”

능청을 떨었다.

“그렇다면 책상을 더 늘리겠다는 계획은 확정 사항인 거네.”

“그런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윤희가 쩝, 입맛을 다시고 나서 팔짱을 풀었다. 어딘가 개운치 않은 듯한 표정.

“그래.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가 선생님께 전달했을 만해. 담임선생님이 일단은 스터디부의 담당 교사니까. 너는 부장이니까 전달을 받았을 테고…….”

윤희는 바닥을 내려다보는 상태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기, 윤희 씨?”

조심스레 부르자 윤희가 시선을 들었다.

“응. 납득할 만하네.”

“뭐가?”

되묻자,

“그런 게 있어.”

윤희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의심할 거리가 있었던 걸까. 지금 윤희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 의문에 대답을 들려줄 것 같지는 않고.

일단은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진짜로 담임선생님께 들은 거지?”

윤희가 재차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알겠어. 일부러 불러내서 미안해. 돌아가자.”

우리는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그대로 자리로 복귀하려는데, 이번에는 규원이가 나를 호출했다.

“영재야!”

고개를 돌리자 내게 다가오는 규원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뭔 일 있어?”

“아. 그게, 궁금한 게 있어서 말야.”

“뭔데?”

“우리 스터디부 내년에 부원 또 모집해?”

뭐지?

오늘따라 날 보는 애들마다 스터디부의 미래 계획에 대해서 물어보네.

규원이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을 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싶어?”

“응. 응!”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찬 머리 운동을 하는 규원이. 뭐, 이 정도 내용은 알려줘도 상관없겠지.

“그럼 천원.”

“아, 왜애!”

규원이가 어깨를 흔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다섯 살배기 같다.

“가르쳐 조오. 우리 사이에 비밀 없잖아.”

“난 그런 약속한 기억이 없는데?”

반응이 재밌어서 일부러 약 올리는 말투를 썼다.

“아이, 부장니임!”

규원이가 내 손목을 붙잡고 흔들어대는 통에 장난은 그만 두자고 생각했다.

“알았어. 특별히 알려줄 테니 손 좀 놔 봐.”

“넵!”

이럴 때만 말 잘 듣는다니깐.

“담임선생님이 내년에 책상을 더 늘린다고 하셨어.”

“오오! 그럼 부원 모집도 하겠구나?”

“응. 내년에 새 학기 시작하면.”

“크으. 뉴페이스라니.”

규원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환희에 찬 얼굴을 했다. 누가 보면 내일 당장 모집하는 줄 알겠구만.

규원이가 만세 포즈를 했다.

“나도 드디어 선배가 되는구나!”

“아마 너 같은 선배를 원하는 후배들은 없을 거야.”

지적해도 규원이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내 말이 귀에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근처에서 다른 애가 말을 건넸다.

“영재야. 내년에 스터디부 부원 추가 모집한다고?”

“어, 응.”

우연히 듣게 된 모양이로군.

“그럼 나도 내년에는 들어갈 수 있겠네?”

“오, 나도!”

“나도 희망함.”

근처에 있던 다른 애들도 손을 들어 올렸다.

한창 부원 모집할 때만 해도 희망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

“규원이가 스터디부 들어간 뒤로 성적 많이 올랐잖아. 나도 성적 올리고 싶거든.”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애들이 한목소리로 동조했다. 규원이는 자랑스러워하며 어깨를 한껏 폈다.

“우리 부장님이 짱이라니까.”

애들이 규원이를 향해 부러워하는 눈길을 보냈다.

“영재야. 그럼 내년에도 네가 부장할 거지?”

“아, 그건…….”

“당연한 소릴! 한 번 부장은 영원한 부장이라구!”

규원이가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내 등을 두드리기까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규원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오히려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기대감 가득한 눈빛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응. 아마도…….”

말꼬리를 흐리자 규원이가 곧장 쏘아붙였다.

“아마도라니! 당연히 너지. 너밖에 없다구.”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해.”

때마침 종이 울리자 여기저기서 떠들던 애들이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해, 우리 부장님.”

인사말을 남긴 규원이도 자리로 돌아갔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말하는 수밖에 없겠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

오늘도 별 탈 없이 스터디부 활동을 마쳤다.

완만한 경사로를 다 내려왔을 쯤, 지아 누나가 내게 다가왔다.

“영재야. 잠깐 데이트할래?”

“네?”

누나, 제 심장도 좀 생각해 주세요.

덕분에 앞서가던 세 사람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왜들 그래? 영재랑 잠깐 얘기 좀 나누려고.”

정작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지아 누나는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런고로 나랑 영재는 이쯤 해서 빠질게. 다들 잘 가!”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어, 응. 잘 가.”

윤희와 규원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주현 누나는 말없이 손만 흔들었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작은 카페였다.

“누난 이런 데 좋아하나 보네요.”

“진득한 대화를 나누려면 조용한 데가 좋지. 안 그래?”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왠지 불안해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지아 누나는 싱긋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손님이 별로 없어 조용했다.

“내가 먼저 청한 거니까 내가 음료 살게. 뭐 할래?”

“저 그럼,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알았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지아 누나가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사장님이 직접 우리 자리로 음료를 서빙해 주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켰다. 이제는 이 쓴맛에도 완전히 적응이 되었다.

지아 누나의 주문은 휘핑이 올라간 따뜻한 카페 모카.

하지만 정작 음료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턱을 괸 채 검지손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릴 뿐.

“누나?”

누나는 대답 대신 콧숨을 내뱉었다.

“요 며칠 스터디부 활동 자주 늦었잖아. 담임쌤하고 면담하느라 그랬다면서?”

“윤희가 얘기해 줬어요?”

“물어보니까 알려주더라구.”

“아하.”

고개를 몇 차례 주억거렸다. 그것 자체가 비밀에 부칠 사안은 아니니까.

이사장님과 면담을 한 일은 숨겨졌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지아 누나가 카페 모카를 들이켜고 나서 입을 열었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거야? 예를 들면…….”

거기서 말꼬리를 흐리는 누나.

“어떤 거요?”

“그게, 음……. 집안, 사정이라든가…….”

뜸을 들이던 누나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무척 조심스레 말했다.

“아녜요. 그런 건 아니니까.”

얼른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지아 누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짤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구나. 혹시나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응답하고 나서 음료를 들이켰다. 누나도 뒤이어 머그잔을 입술에 대었다.

대화가 멎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울리는 풍경 소리.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장님의 인사 소리가 가게 내부에 조용하게 울렸다.

나는 온기가 남아있는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궁금하세요?”

넌지시 물어보더니 지아 누나가 테이블 위에 팔짱을 올렸다.

“응.”

누나의 눈빛이 오랜만에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여러모로 걱정을 많이 끼친 모양이다.

“요즘 들어서 고민할 거리가 생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주현이도 이 부분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고. 물론 규원이도.”

참고로 윤희는 가장 먼저 내 이변을 알아차렸다.

너무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던 걸까. 한편으로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가능하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해줬으면 해. 다들 널 도와주고 싶어하니까.”

“…….”

말문이 막혔다. 지아 누나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이건 남들과 함께 나눠서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그 안에서 답을 내려야 한다.

머그잔으로 눈길을 내렸다.

지아 누나에게만이라도 먼저 알리는 게 좋을까?

아니다. 그건 별로 좋지 않은 듯했다. 어차피 모두에게 알려야 할 일이니까.

“말하기 어려운 거야?”

누나가 이쪽을 빤히 응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자연히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아 누나.”

낮게 깔린 음성으로 불렀다.

“응.”

“언젠가 때가 되면 꼭 얘기할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실래요?”

“좋아. 그렇게 할게.”

수긍하는 누나의 표정이 진지했다.

“네가 편할 때 얘기해 줘. 나는 언제든 좋으니까.”

“그럴게요.”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유예하고 말았다.

* * * *

그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면접일까지 앞으로 남은 기간은 열흘 남짓.

어제도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나는 벽시계를 쳐다봤다. 저녁 6시 50분.

이대로 30분 뒤면 오늘 스터디부 활동도 마감이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윤희야. 나 이 문제가 잘 파악이 안 돼.”

“보여줘.”

규원이가 윤희에게 냉큼 문제집을 건넸다. 참고로 오늘은 윤희가 규원이의 국어 공부를 봐주는 날이다.

“여기서는 이 문장이 핵심 포인트야. 그러니까…….”

윤희의 설명에 규원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나들은 자습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지아 누나가 주현 누나를 쳐다보았다.

“주현아. 이것 좀 가르쳐 줄래? 아무리 해봐도 잘 안 풀려서.”

“으, 응.”

주현 누나가 지아 누나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누나들은 오늘 수학 공부를 한다고 했었다.

나는 혼자서 영어 모의고사 문제 풀이.

다시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했다. 고정하려고 노력했다.

이대로 오늘도 미루게 되는 걸까. 그리 생각하자 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그래?”

윤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냐. 그냥…….”

얼버무리는 답변했더니 윤희가 내게서 눈길을 돌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자꾸 맴도는데도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질 뿐이다.

그래, 아직은 늦지 않았다. 아직은.

“저기, 할 말이 있어.”

진중한 목소리를 내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서두는 던졌다. 이제 남은 말을 쏟아낼 차례.

“정말, 중요한 얘기야.”

나는 몬아미 볼펜을 세게 움켜쥔 채 심호흡을 했다. 입술을 몇 차례 달싹거리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뜸을 들인 끝에 결심이 완전히 섰다.

나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드디어 고백했다.

“나, 내년부로 한성고로 편입하려고 해. 이미 서류 전형은 합격한 상태야.”

이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발언.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뭐?”

갑자기 정적을 깨부수는 목소리.

소리가 난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윤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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