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122화주사위는 던져졌다(2)
* * *
어느덧 달력이 10월 말을 향해가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완연한 가을날이었다.
나는 이사장실에서 이사장님과 대면하고 있었다.
“서류 합격 축하한다.”
이사장님이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내게 합격통지서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통지서를 두 손으로 받았다.
1년 내내 학수고대해 왔던 합격 소식인데 생각보다 덤덤한 기분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쩔 줄 모르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더니만.
결심이 완전하지 않았던 걸까?
“별로 기쁘지 않은가 보구나.”
이사장님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있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좀 얼떨떨하기도 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내 어휘력으로는 이 복잡미묘한 심정을 온전히 표현하기가 어려웠으니까.
이사장님이 다 이해한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통지서의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합격’이라는 단어를 확인하고 나서 상의 주머니에 통지서를 집어넣었다.
“이제 면접만 통과하면 최종 합격이다. 그러면 내년 3월부터 너는 한성고의 학생이 되는 셈이지.”
“면접일은 언제인가요?”
통지서에서 확인하지 못한 내용이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11월 10일이야.”
지금으로부터 대략 2주 뒤.
왠지 모르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2주가 아직은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면접 준비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이사장님이 검지손을 치켜세웠다.
“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네?”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는 답을 줄 것처럼 하더니만.
이사장님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가 한성고에서 면접을 본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걱정 않아도 된다. 영재 너라면, 분명히 잘할 수 있을게야.”
“그럴, 까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이사장님의 말처럼 잘 해낼지 어떨지 확신이 없으니까.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면 돼.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신뢰가 담긴 눈길을 보내는 이사장님.
“네. 알겠습니다.”
목에 힘주어 대답하자 이사장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만 가보거라.”
인사를 하고 나서 이사장실을 나왔다. 목적지는 당연히 스터디드림.
구름다리를 건너 별관 2층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멤버들이 일제히 시선을 들었다. 내가 부재중인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군.
참 보기 좋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왔네.”
지아 누나가 가장 먼저 반겨주었고, 주현 누나는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면담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실없이 웃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어서 와.”
윤희의 눈매가 호를 그리고 있었고, 규원이는 우는 소릴 했다.
“영재야아! 나 오늘 수학 좀 가르쳐 줘! 방정식 너무 어려워어.”
“그래, 알았어. 문제집 펼쳐 봐.”
“여기!”
규원이가 문제집을 내 책상으로 밀었다. 나는 문제를 파악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이대로 이어질 것만 같은 스터디부 활동 시간이었다.
* * * *
부 활동을 마친 뒤 40분을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나 왔어.”
“오빠아, 어서 와!”
슬기가 번쩍 손을 들며 맞아주었다.
“아들 이제 왔네.”
옆에서 엄마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엄마가 오랜만에 쉬는 날이었지.
나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왔다.
“엄마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었어?”
“아니. 슬기 오기 전까지 청소하고 있었어.”
나는 집안을 빙 둘러보았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깔끔해졌구만.
“슬기 돌아오고 나서는 잠깐 장도 봐왔고.”
“아하.”
“엄마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도 사줬다!”
슬기가 방긋방긋 웃으며 자랑했다.
“내 거는?”
“후후. 엄마랑 다 먹었지!”
무척 당당하게 얘기하는구만.
좀 아쉽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엄마와 슬기는 밥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저녁이라도 먹는 줄 알았는데 아무도 상을 차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데 우리 저녁 안 먹어?”
엄마를 향해 질문을 던졌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전에 치킨 한 마리 시켰거든. 안 먹은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오오. 진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아, 빨리 먹고 싶어어.”
슬기는 기대에 찬 음성을 내며, 말아쥔 주먹으로 밥상을 가볍게 몇 차례 두드렸다.
나도 밥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 주문했어?”
“15분 전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거야.”
“엄마가 오랜만에 큰돈 쓰네.”
희희낙락하며 말하자,
“얘는. 이게 무슨 큰돈이라고 그러니.”
엄마가 손을 한 번 내저었다.
대략 15분을 더 기다리자 치킨이 도착했다.
박스를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치킨이 고운 자태를 뽐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양쪽 엄지를 치켜세웠다.
“우와아아.”
슬기는 두 손을 모은 채 감탄하기 바쁜 상태.
엄마가 치킨무의 물을 빼고 나서 밥상 위에 올려 놓았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나와 슬기가 우렁차게 답했다.
오랜만에 먹는 치킨은 정말로 꿀맛이었다. 바삭하게 씹히는 튀김옷과 그 속에 숨겨진 부드럽고 뽀얀 속살.
치킨은 정말 인류가 만든 최고의 음식이 아닐까.
“너희들 요즘 학교생활은 어떻니?”
“아 맞다! 나 오늘 중간고사 성적표 나왔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실토하는 슬기.
“잘 나왔어? 이번에 친구들하고 공부 열심히 했다면서.”
“아, 그게…….”
내 물음에 슬기가 말꼬리를 흐렸다.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처참하게 망했다는 것을.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는 거 아니겠니.”
“응…….”
엄마의 온화한 어조에 슬기가 머리를 몇 차례 움직였다.
“어려우면 오빠에게 배워도 되고.”
“뭐, 그건 슬기가 원한다면야.”
슬기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 좀 해보구.”
답변을 끝낸 슬기가 손에 쥐고 있던 치킨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은?”
“나야 뭐…….”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역시 스터디부 얘기가 좋으려나?
“최근에 스터디부 멤버들 모두 평균 점수가 꽤 큰 폭으로 올랐어.”
“전에 얘기했던 그 애도?”
“그 애라니?”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네가 부원으로 받아들이기 싫다고 했던 애 있잖니. 이름이 규원, 이랬었나?”
“아, 걔. 규원이 맞아.”
생각해 보니 반년 전에 그런 얘기를 털어놓았지.
스터디부에 정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진짜 많이 올랐어. 나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열심히 가르쳤구나.”
“당연하지. 들어온 이상 빡세게 굴리겠다고 약속했거든.”
“잘했네, 우리 아들.”
엄마가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추켜세우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냥,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니까.”
“그렇구나.”
나는 고갯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치킨을 다 먹고 나서 슬기가 중간고사 성적표를 공개했다. 평균 점수 41점.
엄마는 말없이 성적표를 응시한 뒤 슬기에게 돌려주었다.
“잘했어. 다음엔 좀 더 열심히 해보자.”
“응. 그럴게.”
슬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기야.”
“왜?”
내게 시선을 던지는 슬기.
“기말 땐 나한테서 배우는 걸로 하자.”
“그, 그건 좀…….”
“엄청 친절하게 가르쳐줄 생각인데 왜?”
“하루에 몇 시간, 할 거야?”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무난하게 4시간 정도.”
“싫어어.”
슬기가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도리질을 했다. 엄마가 그런 슬기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딸, 열심히 하면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진짜로?”
대번에 반색하네.
“오빠! 나 그럼 열심히 배울게.”
역시 우리 엄마가 최고다.
* * * *
어느덧 잠들 시간이 되었다.
슬기는 이미 단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고, 엄마는 밥상 앞에 앉아서 오랜만에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볼륨을 최대한 죽인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한성고등학교 편입에 대해 밝혀야 할 때.
아마 얘기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일 것이다.
TV를 끄고 밥상으로 다가가자 엄마가 눈을 들어 이쪽을 응시했다.
“왜 그러니?”
“잠깐 할 얘기가 있거든.”
나는 엄마 옆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책을 덮고 고개를 이쪽으로 향했다.
“사실은, 이번에 한성고 편입을 하려고 해. 1차 서류 전형은 이미 합격했어.”
“…….”
엄마가 잠시 말을 잃은 채 두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후 엄마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전에 편입 얘기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맞아.”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어쩐지. 왜 갑자기 그런 얘길 하나 싶었는데.”
엄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니? 네가 충동적으로 움직일 성격은 아니니까.”
“3월달부터.”
“그렇게 오래 전부터?”
“응.”
팔짱을 끼는 엄마.
“뭔가 더 있구나?”
“그동안 확신이 안 서서 말하지 못했어. 이제 다 말할게.”
나는 엄마에게 그간 있었던 자초지종을 모조리 설명했다.
한 번 열리기 시작한 말문을 좀처럼 닫히지 않았다. 덕분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음. 그랬었구나…….”
엄마의 진지한 눈빛이 똑바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원들에게 다 얘기했어?”
“아니, 아직은…….”
나는 뺨을 긁적였다. 어떻게 털어놓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으니까.
엄마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렴.”
“물론 그렇게 할 거야. 할 건데…….”
엄마가 가만히 내 말을 기다려 주었다.
나는 한 호흡을 내뱉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한편으로 걱정이 돼서. 이대로면 내가 부원들을 속인 것 같으니까…….”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기에 나는 눈길을 내리깔았다.
“아들.”
엄마의 부름에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엄마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지 않을 건 아니잖니.”
“응. 맞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하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인 아니다. 늦든 빠르든 반드시 거쳐야만 할 일.
“모두가 이해해주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분명 네 결정을 존중해 줄 친구도 있을 거라고 믿어.”
“그렇, 겠지?”
“그럼.”
부드러운 어조로 응답하는 엄마.
“그래도, 스터디드림 부원들은 모두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이건 순전히 내 욕심이겠지?”
“욕심이지.”
우문현답은 이럴 때 쓰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엄마가 가볍게 웃었다.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해보기 전엔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다.”
“그렇네. 엄마 말이 맞는 것 같아.”
납득의 표시로 고개를 움직였다.
“그럼 엄마는 이번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엄만 언제나 우리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
엄마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
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 * * *
다음날 2교시 쉬는 시간.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역시 실행으로 옮기려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긴 한숨을 흘려보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런 뒤 필기 노트를 펼쳐서 복습을 시작했다.
“영재야.”
도연이의 명랑한 음색.
시선을 들어보니 문제집 한 권을 품에 안고 있었다.
“응? 모르는 문제라도 있어?”
나는 검지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 응. 방해한 건 아니지?”
눈치를 살피며 질문하는 도연이에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손을 흔들었다.
“어떤 문제야?”
“이 문제가 좀 어려워서.”
도연이가 책상 위에 문제집을 내려놓았다. 비문학 영역 문제였다.
문제를 재빠르게 훑고 나서 핵심을 파악했다. 그런 뒤 도연이에게 풀어서 설명했다.
설명을 마치자 도연이가 활짝 웃었다.
“역시 우리 학교 범생이!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
나 또한 가벼운 미소로 응대했다.
“그나저나 영재야. 내년에 스터디드림에서 부원 추가 모집해?”
“그건 갑자기 왜?”
“내년부터 학원 하나 그만두기로 했거든.”
“아하.”
도연이는 그동안 스터디부에 들어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현재 다니고 있는 학원과 시간대가 겹쳐서 아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음표를 던졌다.
“도연아. 너 설마 스터디부 들어오려고 학원 그만두는 거야?”
“응. 당연하지. 학원보다 더 재밌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랬구나.”
그 정도로 열렬하게 원할 줄은 미처 몰랐는데.
“아무튼, 내년에 추가 모집 계획은 있어?”
“음. 담임선생님이 책상을 더 늘릴 거라고 하셨으니까 더 모집할걸?”
사실은 이사장님의 입을 통해 들은 내용이지만.
“엇! 담임쌤이 담당 교사였어?”
“아. 몰랐구나.”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군.
도연이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집한다니 다행이네. 새 학기 시작하면 바로 들어갈게. 영재 넌 그때도 부장할 거지?”
마치 내가 부장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음. 글쎄.”
내가 모호하게 답하자 도연이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난 네가 꼭 했으면 좋겠는데. 또래 중에서 너만큼 잘 가르쳐주는 애가 없으니까. 아무튼 나는 내년을 기대해 봐야겠다. 알려줘서 고마워.”
도연이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으로 화답했다.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도연이의 뒷모습을 나는 그 멀거니 응시했다.
잘 말할 수 있을까?
걱정이 다시금 밀물처럼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