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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화 〉 121화­주사위는 던져졌다(1) (121/131)

〈 121화 〉 121화­주사위는 던져졌다(1)

* * *

다음날, 1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슴팍 주머니에 손가락을 살짝 집어넣었다. 반듯하게 접힌 한성고 편입 신청서의 감촉이 느껴졌다.

준비는 모두 끝난 셈.

담임선생님에게 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윤희가 나를 불러세웠다.

“어디 가?”

“교무실에.”

“…….”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을 돌아보았다. 윤희의 맑은 눈동자가 내 안색을 살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담담한 투로 응답한 윤희가 내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뭔가 읽어내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교무실로 가서 담임선생님에게 편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여기, 신청서예요.”

“빠짐없이 적었어?”

“네.”

선생님은 신청서를 펼쳐서 내용을 확인했다.

“잘 써놨네.”

만족스러운 투로 중얼거린 선생님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확실히 정한 거지?”

나는 목에 힘을 주고 그렇다고 답했다.

“그래. 이건 내가 점심시간 전까지 이사장님께 전달할게.”

“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이사장님께 찾아가 봐. 아마 편입 신청 건으로 이래저래 할 얘기가 있으실 테니까.”

“네. 안 그래도 오늘 뵈러 갈 생각이었어요.”

“그래. 편입 신청이 너한테 무척 중요한 일이잖야. 이것저것 물어보고, 조언도 구하고 그렇게 해.”

거기까지 얘기한 담임선생님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잠시 후 수업 시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2교시는 영어 수업이로군.

우리 담임선생님의 교과목.

“네, 선생님.”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인 다음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 * * *

오전 수업이 훌쩍 지나가고 어느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종이 울리자마자 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급식실을 향해 뛰쳐나갔다. 아마 이런 모습은 내년이나 내후년이 되어도 변함이 없겠지.

나는 필기 노트를 펼친 채 복습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윤희 쪽을 슬쩍 곁눈질했는데, 웬일로 시집을 읽는 대신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 일 있는 건가?

그때 옆에서 규원이가 발랄한 음성으로 날 불렀다.

“영재야아! 같이 점심 먹자!”

“그러자.”

나는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규원이가 의외라는 눈길을 보냈다.

“오호라.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윤희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규원이가 내 옆구리를 검지로 쿡 찌르더니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쉿.”

그러더니 규원이가 윤희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윤희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상태.

“왜 그리 심각해?”

어떤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읊자 윤희가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움찔했다.

“아니, 눈빛이 좀 심각해 보이더라구.”

“그랬어?”

“응.”

고개를 주억거리는 규원이.

하긴, 윤희의 표정은 한눈에 봐도 진지해 보였으니까. 눈치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규원이마저 알아차렸을 정도면 말 다한 셈이다.

“음. 그냥……. 그런 게 있어.”

“아하. 근데 우리 같이 밥 먹으러 갈 건데 너도 올래?”

규원이가 권유하자 윤희가 규원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그렇게 우리 셋은 급식실로 이어지는 줄에 합류했다.

대략 10분쯤 기다린 끝에 우리는 배식을 받았다. 내부를 둘러보니 다행히 세 사람이 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윤희와 규원이는 나란히 앉았고, 나는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한참 밥을 먹던 중 윤희가 내게 눈길을 쏘았다.

“요새 교무실에 자주 가던데.”

“어 맞아!”

규원이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윤희가 비슷한 얘기를 했었지.

오늘은 그것의 연장선인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도 어디 가더니만. 그게 교무실 갔던 거였구나?”

대답해보라는 듯 내게 턱짓을 하는 규원이.

“응. 맞아.”

머리를 움직이며 긍정했다.

“영재야. 우리 친구지?”

“그렇지.”

내 대답을 들은 규원이가 진지한 눈빛을 했다.

“그러면 친구니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거지?”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혼자서 또 대단히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윤희는 규원이가 하는 양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규원이가 덥석 내 왼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영재야. 괜찮아. 내가 다 들어줄게. 무슨 잘못을 했든 간에 이 규원신님께서 용서해 주실 거라구.”

덤덤한 얼굴이던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한숨을 토해냈다.

“영재 같은 범생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리가 없잖아.”

나는 윤희의 발언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컨닝하다 걸린 게 아니고?”

규원이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윤희가 이마를 짚었고,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내가 미쳤냐. 그런 양심 팔아먹는 짓하게.”

“진짜로 컨닝을 했었으면 벌써 난리가 났겠지.”

윤희가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어, 음……. 아니면 말구.”

규원이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헛소리 좀 적당히 해.”

“옙.”

나는 윤희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냥 뭐, 개인 상담 같은 거니까. 너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아하! 그랬구나.”

곧바로 납득하는 규원이와 달리, 윤희는 어딘가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밥 식겠다. 빨리 먹자.”

내 말에 모두가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는 교실로 돌아왔다.

“아, 배부르니까 잠 온다.”

규원이가 크게 하품을 하며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오전 수업 내내 안 자고 버텼으니 잠이 올만도 하겠지.

“난 좀만 잘게에.”

규원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곧장 엎드렸다.

“영재야. 잠깐만 시간 내어줄 수 있어?”

윤희가 평소보다 진지한 톤으로 얘기했다.

그렇게 말하는 의도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답이라면 이미 들려줬는데.

“매점에서 얘기하자.”

윤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쉽사리 물러설 기세가 아니로군.

“그래.”

결국 나는 윤희의 부탁에 따라 매점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저기서 기다려.”

“아냐. 내 건 내가 살게.”

“내가 사주려고 하는 거야. 그냥 앉아있어.”

그리 말하는 윤희의 눈빛이 단호했기에 나는 얌전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윤희가 양손에 레스피 캔커피를 든 채로 돌아왔다.

“고마워.”

나는 윤희가 건네준 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달달한 맛이 목구멍을 시원하게 적셨다.

“아깐, 규원이가 있어서 말하기 껄끄러웠던 거야?”

관자놀이에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입술에서 캔을 떼고 시선을 옆으로 틀었다.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맑은 눈망울. 거기에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아직은 그 무엇도 말할 수가 없다. 편입신청서가 통과될지 어떨지 모르니까.

확정된 이야기가 아니면,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윤희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더라도.

“너무 참견하는 것 같았다면 사과할게.”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윤희. 그러고는 쥐고 있는 캔을 허벅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말야. 네가 그렇게 무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면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어. 스터디드림 멤버이자, 친구니까…….”

‘친구’라는 흔한 단어가 이렇게 신선하게 들렸던가.

아마 윤희의 음성을 통해 들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캔커피를 들이켰다.

“윤희야.”

“응.”

고른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아직은 나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거든.”

진지하게 내리깐 어조.

윤희가 눈꺼풀을 두세 번 깜빡거리다가 응답했다.

“알겠어.”

“이해해 줘서 고마워.”

“좋은 소식 들려오길 바랄게.”

윤희이 입술이 옅은 미소를 그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금세 적절한 대답을 들려줄 수 있었다.

“그럴게.”

* * * *

종례가 끝나자마자 나는 잽싸게 가방을 챙겼다.

“윤희야. 나 잠깐 교무실 좀 다녀올게.”

그러고 나서 부실 열쇠를 전달했다.

“오래 걸려?”

“그건 잘 모르겠어.”

윤희가 고개를 끄덕거린 뒤 열쇠를 챙겼다.

규원이가 스터디드림에 함께 가기 위해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나는 교무실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재차 얘기해 주었다.

“또?”

“그런 일이 있대.”

반문하는 규원이에게 윤희가 대신 나서서 답변해 주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니, 사실은 교무실로 가려는 게 아니다. 진짜 목적지는 바로 이사장실.

뒤를 돌아보니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이사장실까지 달음박질을 했다.

똑똑.

안에서 들어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등 뒤를 한 차례 더 확인하고 나서 이사장실로 입장했다. 이사장님은 안경을 낀 채 노트북과 눈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오, 왔구나.”

안경을 책상 위에 벗어두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이사장님을 향해 나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사장님. 혹시 신청서는…….”

“걱정 말거라. 네 담임을 통해 전달 받았으니까.”

이사장님이 인자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 마음을 정했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지?”

“네.”

묵직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사장님의 눈길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이.

“좋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머리를 주억거렸다.

“신청서도 받았으니 오늘부터 추천서를 적어야겠구나. 아마 내일 중으로 완성해서 제출할 수 있을게야.”

“잘 부탁드립니다.”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앞으로의 인생이 달린 일이니까.

“물론. 걱정 말거라. 그간 네가 성의를 보여주었으니 나도 그만한 보답을 해야지.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이제 스터디부에 가니?”

이사장님의 질문에 나는 네, 하고 답하며 고개를 움직였다.

“유종지미를 잘하도록 하려무나. 무슨 일이든 마무리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명심할게요.”

나는 인사를 하고 나서 스터디부로 향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

저녁 7시 20분. 땅거미가 내리깔린 때.

스터디부 활동을 마친 우리는 귀갓길에 올랐다.

완만한 경사로를 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별것 아닌 화제로 수다를 떨었다.

경사로 끝에 다다르자 우리는 정답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나는 주현 누나와 나란히 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보도를 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발소리와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음이 우리 사이를 대신 채우고 있었다.

“영, 재야…….”

돌연, 주현 누나가 목소리를 냈다.

“네?”

나는 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나지막하지만 확실히 귀에 박히는 목소리. 나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 그냥……. 하고, 싶어서……. 도, 도움 받은, 일도, 많고…….”

“그거야 뭐, 스터디부 멤버니까요.”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 그래도, 고마워…….”

주현 누나의 눈길이 나에게로 달려들었는데,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당연한 거라니까요.”

부드러운 어조로 일렀다.

“응…….”

누나가 살짝 고갯짓을 했다.

계속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주현 누나와도 헤어질 때가 되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누나. 내일 봐요.”

“으, 응!”

주현 누나가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집으로 향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뭐가 어찌 되었든, 한 번 내린 결정은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정면을 응시했다.

그로부터 2주 뒤, 편입 신청 결과를 통보받았다.

그토록 원하던 한성고 편입 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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