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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화 〉 120화­그러나 예정대로(3) (120/131)

〈 120화 〉 120화­그러나 예정대로(3)

* * *

이사장님과 면담을 한 지 이틀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한성고 편입 신청서에 아무런 내용도 적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목표를 이루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스터디드림을 내버려 둔 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까?

아마 예전 같았으면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내 인생 목표만큼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6교시 쉬는 시간에 나는 필기 노트의 앞부분을 펼쳤다.

그때 바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

스마트폰을 꺼내서 확인해 보니 형준이가 보낸 깨톡이었다.

형준 : 오늘저녁 같이 김밥극락어떰??

그러고 보니 형준이랑 못 만난 지도 좀 됐구나.

나 : ㅇㅋ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슬슬 복습을 해야지.

노트로 시선을 내리는 순간 도연이가 나를 호출했다.

“영재야.”

“응?”

도연이는 상체를 살짝 숙이고는 내 필기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깔끔하네. 여전히 글씨도 작고.”

“뭐, 필기 정리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 분야니까.”

약간 으스대자 도연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아아. 담임선생님이 너 찾으시더라. 그래서 전해 주러 왔지.”

“지금?”

되묻자 도연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무 쉬는 시간 때나 와도 된다셨어.”

“그렇구나.”

내가 머리를 주억거리자 도연이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이 얘기 전해 주러 온 거니까 이만 갈게. 공부 열심히 해.”

나는 도연이에게 화답하고 나서 벽시계를 향해 슬쩍 곁눈질했다. 다음 수업 시간까지 7분 정도의 여유가 있군.

속독을 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윤희가 나를 불렀다.

“갑자기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네.”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나서 눈을 돌렸다.

문득 윤희의 책상을 바라보니 시집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요새 선생님께 자주 불려다니길래 신기해서.”

맑은 눈망울이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눈빛과 표정, 안색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것.

나는 콧김을 내쉬고 나서 어깨를 한 번 들먹였다.

“어쩌겠어. 내가 이 학교 유일한 남학생인데.”

“스터디부에 관련된 일이야?”

윤희가 평소보다 볼륨을 낮추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까. 잠깐 생각한 뒤 말을 자아냈다.

“응. 하지만 뭐 큰일은 아니야.”

“흐음.”

윤희는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 담임선생님이 스터디부 담당이기도 하니까.”

일단은 납득한 것 같은 얼굴이로군.

“공부 방해해서 미안해.”

“아냐. 신경 쓰지 말아.”

내가 손을 내젓자 윤희가 수긍하는 고갯짓을 한 뒤 시집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필기 노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 *

그로부터 한 시간 뒤인 7교시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교무실로 향했다. 교과 선생님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내가 다가가자 선생님이 옆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를 가리켰다.

뭐지? 얘기가 길어지려는 건가?

의문을 품은 채 일단 의자에 앉았다.

“잠깐만 기다려 봐.”

담임선생님이 책상 서랍장을 열더니 거기서 꺼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아직 안 받았지?”

그것은 바로 한성고 편입 신청서 용지였다.

“아! 이건 이미 이사장님께 받았어요.”

“그랬구나.”

담임선생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용지를 구겼다. 그러고는 책상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왜? 이미 있다면서.”

“그렇긴 하죠…….”

“어차피 너 말고 한성고 편입하려는 애가 없거든.”

“아하…….”

그럴 만하다. 한성고에 편입하려면 중학교 성적이 최상위권이어야 하니까. 더구나 추천서도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까다롭다.

“이사장님이 언제까지 제출하라고 하셨냐?”

“따로 얘기 안 하셨어요.”

“그렇구만.”

선생님이 팔짱을 꼈다.

“이사장님이 직접 추천서 적어주신댔지? 그럼 빨리 제출하는 게 좋을 거다.”

“네.”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선생님은 내 얼굴빛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고민하고 있어?”

“음……. 네.”

“그럴 만하지.”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

나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였다.

“치열하게 고민해 봐. 이왕이면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게 낫잖아.”

선생님이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고 나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 곧 수업 시작하겠네. 어서 돌아가 봐.”

“네.”

자리에서 일어난 뒤 선생님에게 목례를 했다.

후회 없는 선택이라…….

교무실에서 나온 뒤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결정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오늘 안으로 결정을 내리자고 다짐하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

종례를 마친 뒤 나와 윤희, 규원이는 곧장 스터디부로 향했다.

누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자리 잡고 공부를 하는 동안, 누나들도 스터디부에 도착했다.

교재와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덧 활동을 마칠 때가 되었다. 우리는 가방을 챙겨서 부실을 나섰다.

누나들과 규원이는 앞장서서 걸었고, 윤희는 내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뒤에서 보고 있으니 주현 누나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려고 노력하는 게 많이 보였다. 두 사람도 주현 누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고 노력했고.

참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가로등에 일제히 불이 들어오자 어두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나와 윤희는 입을 다문 채 다리를 움직였다. 선두 그룹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분위기.

하지만 이런 침묵이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요새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던데.”

침묵을 깨고 윤희가 목소리를 냈다.

“그래?”

나는 윤희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윤희가 이쪽을 향해 시선을 홱 틀었다.

“넌 얼굴에 잘 드러나는 편이거든.”

“여기서 또 팩트 폭력을 하네.”

장난스레 웃었더니 윤희가 진지한 눈빛을 했다.

“그렇게 해도 다 티 나.”

“그런가.”

내가 뒷머릴 긁적이자 윤희가 담담한 투로 말했다.

“영재야. 고민거리가 있으면 나에게 털어놓아도 돼.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니까.”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윤희. 무척이나 온화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성고 편입을 지금 당장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상황.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별일 아니니까.”

이건 오로지 내 스스로 고민해서 답을 내려야 할 문제니까.

“그렇구나. 알겠어.”

윤희가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 * * *

멤버들과 헤어지고 난 뒤, 곧장 김밥극락으로 향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야! 한영재!”

안쪽 테이블을 차지한 형준이가 팔을 번쩍 들고 흔들어댔다. 나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와. 얼마만이냐.”

형준이의 목소리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여름방학 전이었을 걸?”

“여전히 말랐구만.”

“내가 원래 안 찌는 체질이잖아.”

“그건 인정.”

이젠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너 뭐 먹을 거야?”

형준이가 주문서를 내 쪽으로 밀었다.

목록을 주욱 살펴보다가 떡라면을 골랐다. 형준이는 제육덮밥과 라볶이.

“요상한 조합으로 먹네.”

“뭐 어때 임마. 먹고 싶은 거 골랐을 뿐인데. 너 달라고 해도 안 준다?”

“난 라면 하나면 충분해.”

“네가 그러니까 살이 안 찌지.”

가볍게 타박한 형준이가 종업원을 불러서 주문을 했다. 우리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근황 토크를 나누었다.

“형준아. 이번 중간고사 어땠냐?”

고등학생들의 가장 큰 난관을 화제로 올렸더니 형준이가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우울한 얘기는 하지 말자.”

“왜? 난 별로 안 우울한데.”

일부러 밝은 어조로 말했다.

뭐, 진짜로 우울할 만한 성적은 아니니까.

“아악. 갑자기 짜증 난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형준이를 향해 좀 더 도발을 가했다.

“나 먼저 성적 공개할까?”

“너 보나 마나 100점일 거 아냐.”

“어떻게 알았어?”

눈꺼풀을 깜빡거리자 형준이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한영재. 딱 한 번만 점수만큼 때리면 안 되냐?”

“안 돼. 병원 가기 싫어.”

“병원비 대주는 조건으로.”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

“야. 내가 진짜로 하겠냐? 그냥 한 소리지.”

“쳇.”

그러자 형준이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도 농담으로 하는 거야. 설마 진심인 줄 알았어?”

내 질문에 긍정의 고갯짓을 하는 형준이. 사실 반 정도는 진심이었지만…….

“그래서 너는 이번에 어땠는데?”

턱짓을 곁들이며 묻자 형준이가 대답 대신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설마, 망했어?”

“그건 아닌데…….”

대체 어떻기에 저러는 거지.

의아한 눈으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준이가 시선을 내리깐 채 양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평균은 92점이라 저번 학기랑 거의 같은데…….”

“그 정도면 괜찮은데?”

“등수가 망했어, 등수가. 전교 60등밖에 못 했다구.”

“그 점수가?”

믿기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응. 한성고 원래 그런 학교잖아.”

“하긴. 전국 최고의 명문고니까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미친 걸로도 전국 최고일걸.”

형준이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드디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고마워. 잘 먹을게.”

“친구끼리 뭘.”

우리는 수저를 손에 쥐었다. 배가 고팠던 탓에 음식을 와구와구 흡입했다.

불과 15분 뒤, 우리는 접시를 말끔하게 비웠다. 형준이가 냅킨으로 입술을 슥슥 닦았다.

“맞다! 너 그 소식 들었어?”

“어떤 거?”

나는 물컵을 내려놓고 형준이를 쳐다봤다.

“우리 학교 요새 편입 신청받고 있던데. 알아?”

“아, 그거. 들어는 봤어.”

사실은 편입신청서를 이미 받아둔 상태지만, 지금 당장은 함구하기로 했다.

“너 작년에 한성고 떨어졌다고 엄청 낙심했었잖아. 이번에 한 번 해보는 거 어때?”

“음. 글쎄…….”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직 스스로도 확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이니까.

“쩝, 좋은 기회일 텐데.”

입맛을 다시던 형준이가 돌연 태세를 전환했다.

“아! 아니다. 생각해 보니 꼭 좋은 기회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왜?”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던진 물음표였다.

“주변에서야 다들 명문고, 명문고 거리니까 마냥 좋다고만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가 않거든.”

녀석의 눈에 진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녀석의 얼굴을 응시했다.

“뭐랄까, 반 친구들끼리 서로 친하다는 느낌을 받기가 힘들어. 왜냐면 한성고 안에서는 모두가 다 라이벌이거든. 성적이란 게 결국 상대 평가잖아? 남보다 내가 잘해야 되는 거. 그러다 보니 쉬는 시간에도 교과서 펼쳐서 읽는 애들 부지기수고.”

“야자도 엄청 빡세게 시킨다고 하지 않았어?”

“응! 맞아.”

형준이가 세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튼 그래. 한성고라는 공간에 있는 이상 모든 게 다 경쟁이야. 성적이나 등수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공부했는지 같은 것들도 경쟁의 대상이 되거든. 수업 시간에는 자는 놈 하나 없고.”

“우리 학교랑 정반대네. 여긴 수업 시간에 네댓 명 정도는 엎어져 자거든.”

1학기 때 반수 이상이 곯아떨어지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나아진 편이지만.

“차라리 그게 나아. 한성고는 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거든.”

“그렇구나.”

나는 물을 들이켰다.

“뭐, 네가 만약 온다면 금방 적응할 것 같긴 하다. 근데 굳이 올 이유는 없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눈썹을 치키면서 물었더니 형준이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너 지금 설마 몰라서 묻는 거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한 번 들먹였다. 형준이가 짤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스터디부 있잖아. 미소녀들하고 하하호호 하면서 공부하는 활동. 크으. 우리 학교에도 그런 거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야.”

“아, 그 얘기였구만.”

나는 담담한 어조로 읊조렸다. 그때 형준이가 내 양쪽 어깨에 자신의 손을 턱, 얹었다.

“그냥 혹시나 해서 말해둘게. 한성고는 안 오는 게 좋아. 피 말리는 경쟁이 벌어지는 전쟁터거든. 그리고 몇 달 가까이 보낸 시간을 훌훌 털어버리기엔 아깝기도 하잖아.”

비장한 눈빛과 어조에 짓눌려서 나도 모르게 수긍의 고갯짓을 하고 말았다.

형준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린 채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래. 너는 제일고에서 잘해. 나는 한성고에서 아등바등 살아봐야지.”

“힘내라.”

“너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 * * *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고민을 거듭했다.

형준이의 말마따나 제일고에서 보낸 몇 개월의 시간은 소중하다. 하지만 나의 인생 목표 또한 중요하다.

진심은 두 가지.

하지만 나는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속으로 계속 저울을 달아본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멀티책꽂이에 끼워둔 편입신청서를 꺼냈다. 그리고 몬아미 볼펜을 쥐고 빈칸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이제 번복은 없다, 고 결심을 굳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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