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119화그러나 에정대로(2)
* * *
눈꺼풀만 깜빡거리고 있자 이사장님이 목소리를 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 아뇨.”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러면?”
이사장님이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 그게, 그냥…….”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컵을 매만지며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뭐랄까. 안 올 것만 같았던 날이, 바짝 다가왔구나 싶어서……. 좀, 놀랬다고 해야 할까요.”
현재 느끼는 심정을 털어놓았지만 어쩐지 말이 붕 뜨는 듯했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커피를 들이켰다.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던 ㄴ이사장님이 짤막한 한숨을 내보내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렇구나. 그럴 만도 하지.”
담담한 음성으로 말한 이사장님이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나는 종이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허벅지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나는 네가, 나의 예상보다 더 잘해줘서 기쁘기 그지없구나.”
이사장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통폐합 얘기가 없어진 건 아니지만 말이야.”
“네? 그럼,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 않나요?”
반문했더니 이사장님이 그렇다고 하며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그런데 제가, 한성고로 편입해도, 되는 걸까요?”
“가기 싫으니?”
나는 얼른 양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말꼬리를 삼킨 채 무릎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한성고에 가기 싫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확실한 성과를 낸 상태는 아니니까.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주먹을 말아쥐고 다시 눈을 들었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요? 눈에 띄는 성과도 없는데.”
“성과가 없다니. 그렇지 않아.”
이사장님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한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까 통계 그래프에서 보았던 것처럼 실제로 학업 성취도가 올라갔으니까.”
“하지만 이사장님. 방금 통폐합 얘기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이사장님이 내 말허리를 잘랐다.
“그게 조금이 아니라, 동진고등학교와 근접할 정도가 되었다는 게 중요한 게지.”
이사장님의 눈빛이 확신에 들어차 있었다. 그 확신에는 분명히 근거가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할 시기잖나.”
“네. 그렇죠.”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에 우리 학교도 입학 설명회를 시작했지. 그때 학생들의 반응을 살펴보려고 직접 참관했었다.”
나도 작년 이맘때에 이 학교, 저 학교 설명회를 열심히 들었지.
그게 벌써 1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사장님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좋은 반응들이었어. 성적 수준도 나쁘지 않게 되었고, 공학 전환이 되었다는 소식이 작년보다 많이 전해진 덕분이지. 입학할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목소리들을 들었을 땐 뿌듯한 기분마저 들더구나.”
음색이 조금 들떠있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네요.”
“물론 낙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 작년에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으니까. 이번엔 그리되지 않도록 노력할 거란다.”
이사장님의 눈이 결연한 빛을 띠었다.
“그런데 이사장님. 어떻게 학교 전체의 학업 성취도가 오르게 된 걸까요?”
“네 공이 크단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날아온 즉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내가 실제로 기여한 점은 거의 없다고 여겨왔기 때문이었다.
“저는, 학교 전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적이 없어요.”
내 공부를 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스터디드림의 멤버들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까.
윤희는 이사장님과 멤버들과의 관계 문제.
규원이는 모든 과목의 공부를 봐줘야만 하는 상태였다.
지아 누나 또한 일부 과목에 도움이 필요했고.
주현 누나는 가족 간의 불화와 수동적인 자세가 문제였다.
이런 일들에 신경을 빼앗겼으니, 학교에 신경 쓸 수 있는 여력이 있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네.”
이사장님이 팔짱을 끼더니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나는 이사장님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남아있던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네가 제안했던 주말 학생 교사제도가 도움이 되었단다.”
“그래요?”
놀라서 반문했다.
이사장님께 이 의견을 제시했을 때 칭찬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서 제시한 의견일 뿐, 큰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부란 결국 스스로의 의지로 해야 하는 것이니까.
“같은 또래를 통해 공부를 배운다, 이건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때와는 느낌이 또 다르게 다가오지. 네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았니?”
“어……. 글쎄요.”
항상 혼자서 공부를 익힌 터라 잘 모르겠는데.
“더구나 그렇게 하면 복습의 효과도 있지.”
“하지만 한두 번 듣는 걸로는 복습의 효과가 없을 겁니다.”
나 또한 시험 기간이면 평균 대여섯 번은 복습을 하니까. 이사장님이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물론. 하지만 주말 학생 교사제의 가장 큰 장점은 따로 있지. 바로, 다 함께 공부를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거지.”
나는 놀라서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단다.”
“무슨 말인지, 좀 알 것 같아요.”
스터디부 활동을 하다 보면 함께 힘내서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까.
“네가 제안한 주말 학생 교사제는 그런 점에서 스터디부의 활동과 흡사하지.”
“그 말인 즉.”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않느냐. 브라질 나비의 날개짓 효과를 기대한다고 말이야.”
“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사.
이사장님의 발언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주말 학생 교사제는 스터디부에 국한되었던 활동이 학급 전체로 퍼지게 만든 셈이었다.
만약 내가 스터디드림의 부장을 맡지 않았더라면 그런 의견을 제안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야간자율학습 같은 시덥 잖은 주장이나 되풀이하고 있었겠지.
이사장님이 그린 그림에서 핵심은 결국 나였다. 그런 내가 일으킨 작은 날개짓이 학교 전체를 변하게 한 것이다.
“영재야. 너는 정말로 잘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질문하자 이사장님이 눈을 감은 채 생각에 빠졌다.
“자연스러운 경쟁 심리도 한몫 했을게야. 스터디부에 이규원 학생도 있지?”
“네.”
“특히 그 아이의 성적이 큰 폭으로 향상되었더구나. 아마 그걸 본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으리라 본다.”
“그렇군요.”
“이제 남은 일들은 걱정 말거라. 이사장인 내가 신경 쓸 일들이니까.”
나는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사장님이 남아있던 커피를 모조리 들이켰다.
“내년이 되면 스터디부의 책상을 더 늘릴 계획이란다. 그렇게 되면 부원도 그만큼 더 받을 수 있을 테니.”
“좋네요.”
“그러니 영재야. 슬슬 뒤를 이을 부장을 정해주었으면 한다.”
이사장님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응답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잠깐만 기다리거라.”
소파에서 일어난 이사장님이 종이 한 장을 손에 쥔 채 되돌아왔다. 그러더니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한성고등학교 편입 신청서다. 미리 챙겨 놓은 거지.”
“감사합니다.”
나는 양손으로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내용을 눈으로 슬쩍 훑고 난 다음 반듯하게 접어서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수고 많았다. 이제 가봐도 좋아.”
자리에서 일어선 이사장님이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걱정 말거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알겠습니다…….”
나도 일어나서 이사장님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를 마치고 나서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이사장실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들 자습하고 있을 때였다.
“한성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상했다. 분명히 원하던 목표였고,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어째서 가슴 한구석이 착잡한 걸까.
나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스터디부로 발길을 옮겼다.
* * * *
평소와 다름없이 스터디부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TV를 켜놓은 채 꿈나라로 향한 슬기를 깨우고 나서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의 메뉴는 흰쌀밥에 시금치 무침, 콩나물 무침, 김치가 전부였다.
밥상을 들고 거실로 향하자 슬기가 얼른 자리를 잡았다.
“그나저나 슬기야.”
“응?”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들다 말고 슬기가 나를 쳐다보았다.
“너네 곧 중간고사 아냐?”
“응! 다음 주야.”
슬기가 김치를 밥 위에 내려놓고는 후후 웃었다.
“걱정마. 나 요즘 친구들이랑 공부하고 있다구.”
“뭐? 진짜?”
세상에 이런 일이…….
감격에 겨운 눈으로 바라보자 슬기가 의기양앙하게 어깨를 폈다.
“이제 나한테 잔소리 안 하겠지?”
입꼬리를 올리는 슬기.
“흠.”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슬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슬기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애?”
“그렇다면, 좋은 성적을 기대해도 되겠지?”
“어, 음. 그건 좀…….”
슬기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구만…….
나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래. 열심히 해봐.”
“응!”
슬기가 주먹을 들고 파이팅 자세를 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뒷정리는 슬기에게 맡긴 채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정리를 끝낸 슬기가 옆으로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오빠. 나 게임하면 안 돼?”
“그래.”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시원스레 넘겨주었다.
“그런데 오빤 지금 공부 안 해?”
“우린 시험 끝났으니까.”
“공부 벌레면서.”
“내가 좀 그런 게 있어.”
나는 딴 데로 가란 의미로 손을 휘휘 저었다. 슬기는 바닥에 엎드린 채 게임을 시작했다.
이 복잡한 심경을 네가 어찌 알겠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
밤 11시가 되자 엄마가 돌아왔다.
멍하니 스마트폰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얼른 일어나서 엄마를 맞이했다.
슬기는 이부자리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든 상태.
30분 전, 공부를 마저 더 하겠다고 기세 좋게 교과서를 들고 오더니만. 결국 채 10분도 못 버티고 수마에게 KO당하고 말았다.
나는 엄마의 저녁상을 차려준 다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우리 아들, 고민거리라도 있니?”
아, 이 얘길 어떻게 시작한담.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린 끝에 가정법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엄마. 만약에 말이야, 내가 우리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로 편입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어느 학교로?”
“어느 학교든.”
가정법이니까 일부러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엄만 항상 네 뜻을 존중해. 네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라면 결코 반대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말렴.”
“만약이야, 만약.”
물론 엄마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는 없겠지만.
문득 시선을 내려다보니 엄마가 여전히 숟가락을 들고 있지 않았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공부해야겠다.”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지 말고.”
“응. 그럴게.”
응답하고 난 뒤 방으로 향했다.
* * * *
방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책상으로 향했다.
저녁 내내 TV나 쳐다보며 쉬었으니 마음을 다 잡아야 한다.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갖은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은 뒤 스마트폰을 일부러 멀리 치웠다. 그러고 나서 수학 모의고사 문제집을 펼쳤다.
나는 숨을 가만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심신이 안정되어야만 집중력을 끌어올릴 수 있으므로.
하지만 머릿속에 들어찬 상념을 도저히 비워낼 수가 없었다.
나는 몬아미 볼펜을 문제집 위에 떨어뜨렸다.
물자국이 드문드문 자리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그대로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3월에 이사장님과 거래를 했을 때는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만큼 한성고에 가고 싶었으니까.
한성고를 가야만 앞으로의 내 인생도 탄탄대로를 밟을 테니까.
7개월 가량이 지난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의구심이 고개를 쳐든다.
이대로 한성고에 편입해도 괜찮은 걸까, 하고.
“누가 딱 이거다, 하고 정해주면 좋을 텐데…….”
공기 중에 흘려보낸 혼잣말.
스마트폰에서 깨톡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확인해 보니 규원이였다.
규원 :크으으~ 나 집에서 30페이지넘게 공부해따!!
그러자 멤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지아 : 오오 대단한데?
지아 누나는 엄지를 치켜세운 이모티콘까지 보냈다.
윤희 : 열심히 하네.
주현 : 파이팅...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나 : 잘하고있네 그대로 계속해
규원 : 아냐아~ 많이햇다구 이제 배탈그라운드할 거야 ㅎㅎㅎ
그래. 그 정도로 공부했으면 쉬는 것도 괜찮지.
나는 열심히 하라는 깨톡을 보낸 뒤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규원이는 이제 정말 잘하고 있다. 스터디부에 들어오겠다며 떼를 썼던 애가 맞나 싶을 만큼.
후우우.
입김을 세차게 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편입신청서를 꺼내놓지도 않았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밤을 지새우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