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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화 〉 118화­그러나 예정대로(1) (118/131)

〈 118화 〉 118화­그러나 예정대로(1)

* * *

다섯 명이서 뒤풀이를 한 지 어느덧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

이제는 10월이 되었고, 완연한 가을 날씨가 되었다. 나는 슬쩍 시선을 틀고 창밖 풍경을 구경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드높고 청명했다.

이제야 좀 살 만한 날씨가 되었구만.

수업이 모두 끝나고 종례 시간이 되었다. 교실 안으로 들어온 담임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서, 종이 뭉치를 쿵,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자, 얘들아. 이게 뭔지 알지?”

선생님이 우리를 빙 둘러보며 종이 뭉치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선생님이 입꼬리를 귀밑까지 올렸다.

“너네 성적표다.”

그 발언의 위력은 굉장했다. 반 애들 모두가 비명을 질렀으니까.

몇몇은 자신의 머리채를 부여잡은 채 절규했다.

“결과가 어떻든 부모님께 꼭 보여드려야 한다. 알겠냐?”

“네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가장 마지막 순서는 나였다.

모두가 성적표를 받고 나자 도연이가 일어서서 구령을 외쳤다.

“차렷, 경례.”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갔고, 하나둘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볼멘소리가 귓가에 날아와 꽂혔다.

“아아, 나름 열심히 했는데도 이 모양이야.”

“엄마가 전교 70등은 넘기랬는데, 망했다…….”

이번에 실패를 맛보았으니 다음엔 잘하겠지.

내가 가방을 다 챙겼을 쯤 규원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 챙겼어?”

“곧 끝나.”

나와 규원이는 윤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윤희는 이제 막 성적표를 가방에 집어 넣는 중이었다.

“윤희가 꼴찌네.”

규원이가 실실거리는 동안 윤희가 가방 지퍼를 닫았다. 그러고는 규원이를 향해 눈빛 레이저를 쏘았다.

“과연 성적도 그럴까?”

“…….”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규원이는 천장을 올려다본 채 억지로 휘파람을 불려고 했다. 꼴사납게도 입술만 튀어나올 뿐,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았지만.

그리하여 최종 승자는 윤희가 되었다.

“성적 가지구 그러다니 너무해.”

규원이가 뒤늦게 불만을 표시했지만, 윤희는 가볍게 피식 웃을 따름이었다.

“거기까지 해. 이제 스터디부 가야지.”

말을 마친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규원이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했다.

“가서 서로 성적 공개도 해야 하니까.”

두 사람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그렇게 스터디부로 발길을 옮겼다.

* * * *

스터디드림 문 앞에 도착했더니 지아 누나가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주현 누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곧바로 내렸다.

우리 셋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누나들도 성적표 받았죠?”

“당연하지.”

지아 누나가 시원스레 답하는 걸 보니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로군.

나는 모두가 자리에 착석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서로 성적 공개하고 나서 공부할 거예요.”

여기저기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주현 누나는 음성을 내는 대신 고개만 살짝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 다들 가방 속에 고이 모셔놓은 성적표를 꺼냈다.

여기서는 부장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게 좋겠지?

저번에 지아 누나에게 선수를 뺏긴 적도 있었으니까.

나는 흠흠,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나서 입술을 벌렸다.

“내가 먼저 할…….”

“스토옵!”

오른편에 앉아 있는 규원이가 팔로 내 가슴팍을 막는 시늉을 했다.

“왜?”

“넌 보나마나일 거잖아.”

규원이가 불만에 찬 눈초리를 보냈다. 지아 누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움직였고.

그리고 윤희와 주현 누나마저도 규원이에게 동조했다.

역시, 내 편은 한 명도 없어…….

“야. 그래도 들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지.”

“너 어차피 올 백일 거 아냐.”

그것이 당연하다는 투로 내뱉는 규원이.

“…….”

“맞아, 아니야?”

규원이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응. 올 백이야.”

“그럼 그렇지.”

머리를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규원이. 둘러보니 나머지 멤버들도 비슷한 행동을 했다.

일심동체가 바로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그래도 축하해. 항상 1등 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테니까.”

지아 누나의 축하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머지 인원들도 각자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고 하자 모두들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윤희가 우리를 빙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그럼, 이제 내가 성적 발표할게. 평균은 가채점한 대로 94점. 등수는 17등이야.”

“우와. 등수 꽤 높다.”

지아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했고, 주현 누나는 옆에서 소심하게 박수를 쳤다.

“고마워요, 언니들.”

빙긋 웃는 윤희.

“좋아. 그 다음은 나!”

규원이가 성적표를 활짝 펼쳤다. 입꼬리가 귀밑에 걸렸다.

“68점에 89등!”

자랑스러워하는 어조였다.

남들 눈에는 별ㄴ것 아닌 성적. 하지만 규원이 본인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스터디부에 와서 꾸준히 성적이 오르고 있으니까.

등수도 이번에 두 자릿수가 되었고.

“나, 두 자릿수 등수에 들어오는 거 살면서 처음이야! 완전 좋아!”

세상에나, 이번이 처음이었다니…….

모두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단 한 명, 지아 누나를 제외하고.

“맞아. 얜 항상 100등 바깥이었거든.”

“응!”

자랑스레 끄덕거릴 일은 아닐 텐데.

“아무튼, 잘했어.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자.”

나는 마무리 멘트를 내뱉고 나서 손뼉을 치자 모두가 날 따라서 박수를 보냈다.

규원이의 얼굴이 무척 환해졌다.

다음은 지아 누나가 발표했다.

“음. 나는 84점에 48등이야. 50등 안에 든 건 처음이라 뿌듯해.”

“그만큼, 노력, 했으니까…….”

주현 누나의 발언.

주현 누나는 스터디부로 복귀한 이후 지아 누나의 공부를 봐주었다. 아마 보람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네 덕분이지 뭘.”

지아 누나가 주현 누나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지아 누나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마지막은 주현 누나.

“나, 나는……. 95점, 에, 7등.”

누나가 말을 끝맺자마자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언니이! 다음엔 올 백!”

“그, 그건 좀…….”

규원이의 발언에 머쓱해하는 누나.

“누나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내가 규원이의 말에 찬성하자 누나의 동공이 커졌다.

“응……. 노력, 할게.”

주현 누나가 살짝 고갯짓을 했다.

“다들 성적이 향상됐네. 자축의 의미로 박수 한 번 치자.”

멤버들이 나의 제안에 응하여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런 뒤 성적표를 가방에 챙겨 넣고 교재를 꺼냈다.

이제 공부에 집중해야지.

마음먹은 직후에 규원이가 옆에서 내 팔을 콕콕 찔렀다.

“왜?”

“오늘 수학 가르쳐 주면 안 돼?”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 수학 점수가 제일 낮았거든. 좀 더 보강하면 좋겠다 싶어서. 게다가 또 기말엔 함수가 나오니까.”

규원이가 이렇게나 기특한 소릴 하다니!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감탄했다.

“후후. 나 요즘 열심히 하지?”

왼손으로 V자 사인을 만드는 규원이.

“음. 칭찬해 주려고 했는데, 안 해야겠네. 먼저 선수를 쳐버리니까 감흥이 사라졌어.”

“에잉. 그래도 해줘어.”

다섯 살배기 마냥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진짜 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실제로 열심히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칭찬해주자.

“그래. 진짜 열심히 하고 있어. 앞으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부장님. 다음에는 전교 2등을 노려보도록 하지요.”

“아냐. 하지 마.”

정색하자 규원이가 곧장 넵, 하고 답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내 공부를 하고 싶어서 그런데 내일부터 가르쳐 주면 안 될까?”

“음……. 알았어.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혼자 해야겠네. 수학만 아니면 나머지 과목은 이제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규원이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럼 영어는?”

윤희가 끼어들었다.

“아 맞다. 영어도 있었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규원이를 향해 윤희가 슬며시 웃었다.

“그건 내가 도와줄게. 물론 국어도 계속 봐줄 테고.”

“오오! 윤희 짱!”

규원이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윤희는 그런 규원이를 향해 검지손을 치켜세웠다.

“단, 나도 내일부터.”

“허럴. 너네 이렇게 나오기야?”

“나도 오늘은 자습하고 싶거든.”

줄곧 우리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지아 누나가 말을 꺼냈다.

“난 주현이한테 배우고 싶어. 영재 너에게 계속 부담을 주는 것 같거든.”

“설마요. 누나 같은 미인을 가르칠 수 있는데 마다할 리가 없죠.”

“그래도.”

지아 누나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때 주현 누나가 슬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이젠, 내가…… 봐, 줄게. 계속…….”

“진짜? 나야 고맙지!”

이렇게 되면 자리 배치를 바꾸는 편이 나아 보이는데.

나는 잠깐 고민한 뒤 규원이와 윤희를 번갈아 보았다.

“규원아. 네가 윤희 자리로 옮기자.”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는 규원이.

“주현 누나가 지아 누나를 가르쳐야 할 거 아냐.”

“아, 그렇네!”

“주현 누나는 규원이 자리로 오시구요, 윤희는 주현 누나 자리로.”

세 사람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 뒤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하여 왼쪽부터 윤희, 규원, 나, 주현 누나, 지아 누나 순이 되었다.

다들 새로운 자리에 착석한 직후 지아 누나가 말문을 열었다.

“저기, 영재야.”

“네.”

“오늘은 좀 일찍 마치면 안 될까? 다 같이 카페에 가서 놀고 싶은데.”

그러자 규원이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특별히 내가 쏠게. 어때?”

“그럼 당연히 가야죠.”

허락하자 모두가 환호했다. 주현 누나의 표정도 무척 밝았다.

역시 우리 스터디드림은 이런 분위기가 제일이지.

* * * *

그로부터 며칠간 별다른 사건 없는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쉬는 시간.

필기 노트를 읽고 있는데 도연이가 나를 불렀다.

“담임선생님이 방과 후에 교무실로 오라셨어.”

“아, 그렇구나. 알겠어.”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 확인한 도연이가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어?”

시집을 보다 말고 질문을 던지는 윤희를 향해 잘 모르겠단 뜻으로 어깨를 움직였다.

그날 방과 후, 규원이가 오랜만에 부 활동을 뺐다. 사유는 오랜만에 다른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것.

나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윤희야. 먼저 가 있어.”

나는 윤희에게 부실 열쇠를 건넸다.

“기다리고 있을게.”

윤희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나는 복도 끝에 위치한 교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담임선생님이 때마침 퇴근 준비를 하는 참이었다.

“선생님.”

“아. 영재야, 너는 바로 이사장실로 가면 된다.”

이사장님이 웬일이지?

나는 물음표를 품은 채 3층에 위치한 이사장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사장님은 접대용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이사장님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늘은 밀린 업무가 없는 모양이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사장님이 커피를 권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어째 이사장실에 올 때마다 별미로 먹는 듯한 느낌인데.

종이컵 두 개를 손에 들고 이사장님이 자리로 돌아왔다.

“할 얘기가 생겨서 불렀다.”

“어떤 건가요?”

“여길 보거라.”

이사장님이 진지한 눈빛을 한 채 노트북을 내가 볼 수 있도록 돌렸다. 그런 뒤 검지로 노트북 화면의 어느 지점을 지목했다.

들여다보자 한성고와 동진고, 우리 학교의 이름이 적혀있는 통계표였다.

“이번에 학업 성취도가 저번 학기보다 많이 향상되었구나. 동진고등학교와 거의 근접할 정도로 말야.”

이사장님의 설명대로였다.

그래프 상으로 나타나는, 이전과 비교해 확연히 줄어든 차이.

“잘됐네요.”

“내가 기대한 대로 약속을 지켜주었구나.”

이사장님이 커피를 홀짝이고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가 되었지.”

“아…….”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사장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업무용 책상으로 걸어ㄴ다. A4용지를 손에 쥔 채 돌아온 이사장님은 그것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한성고 편입 TO가 떴어.”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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