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5화 〉 115화­시작은 마주 앉기부터(2) (115/131)

〈 115화 〉 115화­시작은 마주 앉기부터(2)

* * *

“…….”

민주 누나가 입을 열지 못했다. 말문이 막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현 누나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명료한 단어로 표현한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현 누나의 눈길이 민주 누나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마주하기 위한 용기를 낸 것일지도 모른다.

“배신…….”

침묵을 지키던 민주 누나가 간신히 한 단어를 읊조렸다. 주현 누나는 케모마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주현아.”

민주 누나의 나지막한 부름에 주현 누나가 조심스레 컵을 내려놓았다.

“나는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배신이라니…….”

“그, 그치만, 나, 나한텐, 그렇, 게…….”

주현 누나는 뒷마을 삼킨 채 눈길을 피했다. 그러자 민주 누나가 작게 한숨 지었다.

“난 단 한 번도 배신하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 진짜야.”

“그, 그래도……. 내, 생각은, 변하, 지 않아…….”

나는 주현 누나의 옆얼굴을 보았다. 애처로워 보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단절되어 있었구나.

나는 그제야 그 시간의 더께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야. 진짜로, 그런 생각은 안 했어.”

민주 누나가 간절한 표정을 지은 채 호소했다.

“서로, 판사 되고, 의사, 되자고, 그랬는, 데…….”

“그, 그래도 너, 그동안 나 없이도 열심히 공부해 왔잖아. 성적도 잘 받아왔고.”

민주 누나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 점이 궁금했다.

그간 스터디부에서 주현 누나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에 매진해왔다. 그 이유는 바로 의사가 되기 위한 것.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를 엄청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 의문이 들었다. 주현 누나는 정말로 간절히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걸까?

의문을 품은 이유는 누나의 공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집중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맞았다. 정해진 만큼의 분량까지 다 해내는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열정.

열정이 없는 공부는 기계적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 윤희는 이렇게 지적했었다. 강박증 같은 게 느껴진다고.

“…….”

주현 누나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꺼낼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중인 걸까.

민주 누나는 한시도 주현 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 나는, 부모님, 의 기대를, 내팽개칠 만큼, 무책임, 하지, 않으니까…….”

질타를 받은 민주 누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주현 누나의 말이 더 이어졌다.

“그, 그리고……. 나, 나는, 그런 언, 니랑은, 달라.”

“응. 다르지.”

힘없는 어조로 긍정하는 민주 누나.

“나, 나는……. 언니랑, 달라. 다르다는, 걸, 증명, 해야 해…….”

누구에게 증명하겠다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바로 부모님.

민주 누나는 부모에게서 받았던 기대를 모두 내려놓았으니까.

주현 누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것이리라.

“…….”

시선을 내리깐 민주 누나가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있었다.

“언니는, 져버렸, 지만, 나, 난 그럴 수, 없어……. 불효는, 나쁜, 거니깐.”

“저기.”

내가 목소리를 내며 손을 살짝 들어 올렸더니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얘기를 듣다 보니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어떤 거?”

민주 누나가 가볍게 턱짓을 했고, 주현 누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고 나서 물음표를 입에 담았다.

“누나. 부모님의 기대에 꼭 부응해야만 할까요?”

“그, 그게 무슨…….”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게, 정말로 불효일까요?”

“……불효야.”

누나는 확고한 어조로 답했다. 참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다니까.

하지만 아직 내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왜 그게, 불효라고 생각해요?”

민주 누나도 침묵을 지키며 우리들의 문답을 경청했다.

“그, 그건…….”

주현 누나는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건, 나쁜, 짓이잖아……. 부, 부모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 다고……. 배웠으니, 까. 배, 배운 대로, 안 하면, 큰 일, 난다구…….”

“누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박에 부정하자 누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나도 네 말에 동의해.”

민주 누나도 입을 열었다. 그러자 주현 누나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우리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부드럽게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연하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묘하기는 했다. 그러나 경험해 보았기에 잘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길 바라는 우리 엄마가 있으므로.

엄마는 내게 인생의 길을 정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으라고 말해주었을 뿐.

그러면서 항상 신뢰하고 있다고 해주었다. 나는 그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매일 같이 노력하고 있고.

“누나 스스로가 원하는 걸 해야 돼요.”

단호하게 일렀더니 민주 누나도 지원 사격에 나섰다.

“맞아. 네가 원하는 걸 찾아야 한다구. 원하는 바를 말하는 건 불효가 아니야.”

그러자 주현 누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 하지만!”

드물게 강한 어조를 내뱉은 주현 누나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부, 부모님의, 뜻을, 거슬렀다간……. 호, 혼날 뿐, 이라구…….”

주현 누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며칠 전 가출했을 때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주현 누나에게 폭력을 행사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겠지.

민주 누나가 확신에 찬 어조로 외쳤다.

“아냐! 그런 걸 두고 혼났다고 하는 표현은 잘못됐어.”

“그, 그럼…….”

“그건 순전히 엄마가 잘못한 거라구.”

“엄, 마가?”

“그래!”

힘주어 대답하는 민주 누나.

“하, 하지만……. 난, 의사가, 되어야 하는데……. 스터디, 부로, 돌아간다는 건, 잘못, 된 거야.”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민주 누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현 누나를 바라보는 민주 누나의 눈빛에는 안쓰럽게 여기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주현아. 너는 진짜로 의사가 되고 싶어?”

언젠가 나도 주현 누나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되고 싶다고 했었다.

“…….”

그런데 이번에는 뜸을 들이기만 할 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는 포기했던 걸 너는 지금껏 해온 거니까. 너처럼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주현 누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말야.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목매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해. 보고 있기 안쓰럽거든. 그리고 너만 힘들어질 거니까.”

“그, 그래도……. 그 동안, 노력, 해왔는, 걸…….”

민주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주현 누나가 고개를 들고 민주 누나를 바라보았다.

민주 누나가 주현 누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주현 누나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정말로 고생 많았어.”

부드러운 어조로 읊조린 민주 누나가 주현 누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내 몫까지 열심히 힘냈구나.”

“응.”

머리를 수차례 끄덕이는 주현 누나.

“주현아.”

“…….”

“혹시 기억나?”

“어, 떤?”

“나 중학생 때 성적 떨어져서 혼났던 일들 말야.”

주현 누나가 머리를 끄덕였다. 민주 누나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도 한때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었거든. 그래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내가 공부를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아. 단 한 번도 즐겁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거든.”

“언니…….”

“성적이 떨어질 때마다 혼나니까 점점 반항심이 생기더라. 내가 그렇게 못난 걸까. 공부를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일까. 그렇게 방황하던 중에 패션 쪽으로 흥미를 가지게 되었어.”

“응. 기억해…….”

저번에 나도 들었던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하고 많이 싸웠잖아. 지금도 사이가 안 좋고.”

“응…….”

“하지만 말야. 난 그게 불효를 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밝힌 거니까. 그리고 패션 쪽으로만큼은 공부하던 것 이상으로 노력하고 있어.”

민주 누나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주현아. 한 번만 더 물어볼게. 정말로 의사가 되고 싶어?”

주현 누나는 오랜 침묵 끝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만, 그, 그러면……. 나, 난 무얼 위해, 공부해야, 될지…….”

주현 누나가 드러내는 불안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 년 간 달려온 그 노력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민주 누나가 주현 누나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은 채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가 도와줄게. 이제는 혼자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정말?”

민주 누나가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크게 움직였다.

“응! 더 이상, 배신 당했다는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게 언니가 노력할게.”

내 자리에서 주현 누나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아내는 분위기에서 더 이상 팽팽한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

“아, 아냐……. 나, 나도 오해, 한 거니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한 광경이었다.

“주현아. 혹시 또 서운한 일 있었으면 얘기해 줘.”

“음…….”

뭔가 더 있었군.

민주 누나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 작년 3월에, 모의고사 성적, 많이, 떨어졌을 때……. 혼, 났잖아. 어, 언니가, 위로해, 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랐는데…….”

“아아. 그, 그때 말이지…….”

민주 누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목을 문질렀다.

“괜히 어설프게 다가가서 위로하면 더 어색할 것 같아서 그냥 아무 말도 안 했었거든…….”

“아, 알아. 우, 우리 사이, 안 좋았, 으니까…….”

“또 다른 건 없어?”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번에는 주현 누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민주 누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내, 내가 가출, 했을 때, 찾으러 와줬, 잖아……. 사, 사실은 엄청, 고마웠어……. 어, 언니는, 나 같은 애, 신경 안, 쓸 거라 생각, 했으니깐.”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언니…….”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민주 누나가 먼저 포옹을 했기 때문에. 주현 누나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은, 두 자매는 그렇게 서로 맞닿았다.

* * * *

우리는 적당히 식은 음료를 다 마신 뒤 카페를 나왔다.

“주현아 잠깐만. 영재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민주 누나의 발언에 주현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출입문 옆에 섰다.

나와 민주 누나는 몇 발짝 떨어진 자리로 이동했다.

“영재야, 고마워. 다 네 덕이야.”

“아녜요.”

그러나 민주 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야. 네가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화해 못 했을지도 몰라.”

“서로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저 두 자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을 뿐.

만약 둘 중 한 명이 화해할 마음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 자리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래도 고마워.”

민주 누나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직 한 가지 난관이 더 남아있었다.

“그런데 누나. 이제 아주머니랑은 어떻게 화해할 거예요?”

누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어떡하긴. 대화로 풀어야지. 오늘 내가 주현이랑 풀었던 것처럼.”

“난리 날 것 같은데요…….”

“그럼 한바탕하지 뭐. 나는 무조건 주현이 편만 들 거니깐. 그리고,”

말허리를 자른 누나가 슬쩍 주현 누나에게 눈길을 보냈다.

“패션에 대한 내 열정도 다시 한 번 피력할 거야. 이제 더 이상 전처럼 피하지는 않을 거거든.”

“응원할게요.”

“응. 걱정 붙들어 매셔.”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주현 누나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민주 누나 옆에 나란히 섰다.

“영재야. 고마워…….”

“누나. 스터디드림으로 돌아올 거죠?”

의향을 묻자 주현 누나가 고개를 힘차게 움직였다. 정말로 보기 드문,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나, 나도, 같이 하면, 즐거, 우니까.”

말을 마치고 환한 웃음을 그리는 누나. 나 역시 활짝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주현아. 오늘 엄마랑 얘기하자.”

“응. 스터디부, 돌아가는, 것도, 말할 거야.”

“좋아. 다 얘기하자.”

두 자매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흐믓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걸었고, 이윽고 갈림길을 마주했다.

두 자매는 왼쪽, 나는 오른쪽이었다.

“이만 갈게. 너도 조심히 들어가.”

민주 누나가 인사말을 건넸다. 이어 주현 누나도 잘 가라며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네. 누나들도 조심해서 들어가요.”

우리는 각자의 길로 나아갔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몰랐다.

내게는 아직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