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14화시작은 마주 앉기부터(1)
* * *
다음날. 우리는 방과 후가 되자 어김없이 스터디부로 향했다.
부실에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는 동안 지아 누나가 주현 누나와 함께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문제집과 눈싸움을 했다. 그러나 공부에 열중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들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붕 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보름 후에 중간고사인데 이대로 괜찮을까.
나는 주현 누나를 향해 슬쩍 눈길을 보냈다. 누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문제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정작 필기는 한 줄도 하지 않았다.
하긴, 마음이 심란할 만도 하지.
나는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부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모두가 피로에 찬 한숨을 흘리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오직 주현 누나만이 걸상에 가만히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어깨에 가방을 메고 주현 누나에게 다가갔다.
“누나. 이제 갈 준비해야죠.”
주현 누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그 눈빛에는 긴장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영재야…….”
“가방 챙기는 거 도와드릴까요?”
그러자 주현 누나가 고개를 젓고는 걸상에서 일어섰다.
“내, 내가 할, 거야…….”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가방을 멘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가도 된다고 손짓을 했다.
“아냐. 기다릴 수 있어.”
윤희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규원이를 머리를 세차게 움직였다. 지아 누나는 아예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주현아.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잘래?”
“…….”
주현 누나가 가방을 메려다 말고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생각, 해, 보구…….”
그렇게 답하고 나서 주현 누나도 가방을 멨다.
나는 멤버들을 먼저 내보내고 나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민주 주나와의 약속 시간까지 앞으로 30분 가량 남은 상황.
별관 건물을 빠져나가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앞장섰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주현 누나가 있었다.
“주현 언니, 무슨 일 있었어?”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윤희가 궁금증을 드러냈따.
“아, 그게…….”
이걸 말해도 될까.
이미 주현 누나와 아주머니 사이에 있었던 사건은 모두들 알고 있는 상태. 하지만 주현·민주 누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은 나밖에 모른다.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가 보네.”
“음. 지금으로선 좀, 그렇네.”
“알겠어.”
윤희가 순순히 물러났다.
그때 지아 누나가 서서히 걸음을 늦추더니 나와 나란히 섰다.
“영재야. 잠깐만 대화 좀 할까?”
그러자 윤희가 눈치껏 주현 누나의 곁으로 향했다. 지아 누나가 앞쪽의 기색을 살핀 뒤 말문을 열었다.
“어제 주현이한테 전화했었지?”
“아, 네.”
거리에 땅거미가 내리깔리더니 가로등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얘가 전화를 받고 난 뒤에 뭐랄까,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거든.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했고.”
주현 누나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한 번 멀어진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그 누구에게라도 쉽지 않으니까.
“혹시 어제 말한 대로 아주머니랑 화해하도록 설득한 거야?”
“비슷, 해요.”
“음…….”
지아 누나가 신음을 흘리며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누나의 반응을 보니 주현 누나가 밝히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힌트가 있었던 덕에 지아 누나는 오래지 않아 깨달음을 얻었다.
“설마, 민주 언니?”
나는 주현 누나의 동향을 슬쩍 살피고 나서 맞다는 의미로 고갯짓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봤을 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았어.”
지아 누나도 음량을 최대한 낮추고 말했다.
“주현이가 여러모로 참 힘들겠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는 동시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선의 종착지는 주현 선배의 뒷모습.
“지금은 말하기 어려운 일이겠구나.”
“아무래도 그렇죠.”
한숨을 내뱉었다.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몰라요. 제가 아니라 주현 누나가요.”
“알았어. 잘 되길 바랄게.”
“그건 저 말고 주현 누나에게 해주세요.”
“알지. 너도 잘하란 의미에서 한 말이야.”
그러면서 지아 누나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화답했다.
경사로를 다 내려왔다. 이제는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헤어져야 할 때.
하지만 주현 누나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우뚝 멈춰 섰다.
윤희와 규원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그때, 지아 누나가 주현 누나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힘내라고 응원해 주었다.
그러자 윤희와 규원이도 다가와서 응원의 메시지를 입에 담았다.
“주현 누나.”
누나가 나를 응시하더니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응.”
우리는 멤버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약속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
약속 장소인 이데야 커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7시 15분이었다.
다행히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네.
“누나. 우리 들어가서 기다리죠.”
말을 건넸지만 주현 누나의 발이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누나의 얼굴을 응시했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여전히 망설임을 떨치지 못한 기색이었다.
여기서 물러섰다간 언제 또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자리를 물색하기 위해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민주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누나는 당당하게 4인용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누나에게 가볍게 목례로 인사했다.
주현 누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민주 누나는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실 거 주문하고 와.”
말을 마친 뒤에 턱짓을 곁들이는 민주 누나.
“네. 주현 누나, 같이 가요.”
“응…….”
우리는 카운터로 향했고, 나는 가장 싼 음료를 주문했다. 주현 누나는 케모마일.
음료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주현 누나가 나를 앞질러 갔다.
왜 저러는 거지?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주현 누나가 민주 누나와 대각선상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으니까.
민주 누나가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토해내고는 곧바로 주현 누나의 맞은편 자리로 옮겨 앉았다.
“이러면 되지?”
“네.”
나는 대답하고 나서 주현 누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후 침묵이 이어졌다.
민주 누나는 주현 누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반면, 주현 누나는 음료 잔을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인 걸까.
민주 누나는 먼저 포문을 열기로 작정한 듯 주현 누나의 이름을 불렀다.
“주현아.”
“…….”
주현 누나는 그러모은 양손을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양쪽 엄지가 서로를 애타게 매만졌다.
“내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해도 돼.”
부드럽게 타이르는 어조에도 주현 누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주현아. 난 모든 걸 다 터놓고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응?”
“…….”
잠시 후 주현 누나의 입술 사이에서 입바람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말을 하려는 걸까.
주현 누나는 케모마일을 몇 모금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고 나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민주 누나는 그런 주현 선배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가볍게게 혀를 찼다.
“사실 며칠 전에 영재한테 들은 게 있어서 그래.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면서?”
그 말을 꺼낸 민주 누나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반면 주현 누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더니 놀란 토끼 눈을 뜬 채 이쪽을 쳐다보았다.
“네. 누나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랬어요.”
“지, 진짜, 로?”
나는 고개를 움직이며 재차 긍정했다. 주현 누나가 원망 어린 눈길을 보냈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아냐 주현아. 나 그것 때문에 화나거나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니까 걱정 말아.”
“으, 응…….”
민주 누나의 말에 주현 누나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길 잘한 것 같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들려줄 수 있을까? 나로서는 짐작이 가질 않거든.”
“그, 그건…….”
이제부터는 정말로 속내를 털어놓아야 할 때.
나는 주현 누나의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꼭 들려줬으면 해.”
민주 누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주현 누나가 눈을 감고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주현 누나가 말을 자아냈다.
“……부, 부모님 말을 안, 들었, 으니까…….”
“응?”
잘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지 민주 누나가 반문했다.
사실 이해가 안 되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다.
물론 부모님 말을 안 들으면 불효 자식으로 불리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제 자매끼리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는 없으니까.
“저기,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민주 누나가 조심스레 양해를 구했다.
“언니.”
처음 들어보는, 주현 누나의 명료한 음성.
민주 누나가 주현 누나의 목소리를 더 잘 들으려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어, 언니……. 어릴 때 기, 기억나?”
이야기가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건가.
나 역시 주현 누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 같이 힘, 내서 공부하, 자고 했잖아……. 어, 언니는 파, 판사, 되고, 나, 나는 의, 사 되고…….”
“응. 예전엔 그랬지.”
“어어, 언니는, 그때, 공부, 도 잘했고…….”
“으, 응. 그때는.”
민주 누나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똑같은 과거를 얘기하는 데도 두 사람의 온도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민주 누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에 불과하지만, 주현 누나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나, 나는, 언니를……. 동경, 했다구……. 어, 언니처럼, 공부, 잘하고 싶었, 다구……. 저, 정말 열, 심히……. 열심히…….”
“아…….”
민주 누나가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그래. 같이 열심히 하자고 했었지.”
“시, 시험, 못 쳐서 호, 혼났을 때……. 항상, 위, 위로해, 주고…….”
“맞아. 그랬었지…….”
민주 누나의 목소리도 점점 추억에 잠겨 들었다.
“나, 나 처음, 1등 했을 때도 가, 가장, 먼저 축하도 해, 줬고…….”
“응. 초 5때였지.”
여전히 머뭇대고 더듬거리지만, 그럼에도 주현 누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 언니가 도, 도와줬, 으니깐……. 그, 그래서 힘, 냈었, 다구…….”
“…….”
이번에는 민주 누나의 말문이 막혔다. 결국 민주 누나는 부모님의 소망이기도 했던 판사의 꿈을 접었으니까.
“어, 언니, 가 있어서……. 힘, 냈었는, 데……. 공부는, 같이, 하는 거, 랬으면서…….”
주현 누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문득 몇 달 전 일을 떠올렸다.
아마 1학기 기말고사 때였을 것이다.
내가 스터디부에서 ‘주말 학생 교사제도’에 대해 한참 얘기하고 있는 와중에 주현 누나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 소용 없다고. 공부는 혼자 하는 거라고.
주현 누나가 드물게 감정을 담아서 했던 발언이라서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당시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이유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응. 맞아. 그랬지…….”
민주 누나가 씁쓸하게 읊조린 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언니, 만 믿었는데…….”
주현 누나의 어깨가 아래로 축쳐졌고, 민주 누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제는, 나, 나 혼자서……. 하니까…….”
“주현아.”
민주 누나가 서글픈 눈빛을 하고 있었고, 주현 누나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오가는 것은 서로의 시선뿐.
민주 누나가 음료 잔을 향해 서서히 눈길을 내렸다.
“언니…….”
기력이 빠진 음성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나,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응.”
민주 누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 언니는 왜……. 날, 배신, 한 거야?”
민주 누나가 멍한 얼굴로 주현 누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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