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1화 〉 111화­평행선을 맞닿게 하는 방법(4) (111/131)

〈 111화 〉 111화­평행선을 맞닿게 하는 방법(4)

* * *

주현 누나는 내게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주현 누나의 머리칼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면 멤버들이 모두 여기로 합류할 텐데.

그렇게 되면 주현 누나는 더더욱 입을 굳게 닫을 게 뻔하다. 그 전에 반드시 이유를 들어야 한다!

“주현 누나. 알려주세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나는 진중한 목소리와 함께 눈에 힘을 주었다. 주현 누나가 눈길을 아래로 떨구며 내 시선을 회피했다.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만큼 말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는 걸까.

오랜 기다림 끝에 주현 누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시, 실은……. 과, 과외 선, 생님이 바, 바뀐, 다고, 해서……. 그, 그래서…….”

드디어 속내를 털어놓는 누나. 하지만 아직 내가 원하는 대답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요?”

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물음표를 던졌다.

“학원…… 가기, 싫어졌어…….”

“왜, 그랬던 거예요?”

주현 누나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그, 그게……. 엄마가, 과, 과외 선생님, 이 바뀐, 다는 얘길, 안, 해줬으니까…….”

주현 누나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아 누나가 전화로 알려준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몰랐을 테지.

“그럼, 누나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이것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간 봐온 주현 누나는 자신의 감정을 얘기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기껏해야 민주 누나에 대한 싫은 감정을 내비친 정도?

어떤 사건을 겪었을 때는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없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을 뿐이니까.

“…….”

“누나. 이게 중요한 거예요.”

나는 주현 누나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결코 재촉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뻗은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별로, 안, 좋았어…….”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음성이었지만, 그래도 누나는 이번에 확실하게 표현해 주었다.

“내, 내 의견, 을 무, 묻지 않았, 으니까…….”

“맞아요. 제가 무어라 할 입장은 못 되지만, 그래도 그건 아주머니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 의견을 밝히자 주현 누나가 이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 그런 걸, 까?”

의문이 담긴 눈빛.

“누나 생각은 어때요?”

답을 내리지 않고 되물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절대로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으음……. 그, 그치만, 어, 엄마가……. 틀릴 리가, 없는데…….”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오히려 주현 누나다운 대답이라고 해야 할까.

저토록 두터운 신뢰는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누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어요?”

“응…….”

고개를 한 번 움직이는 주현 누나.

“그렇다면, 한 번 아주머니에게 얘기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그, 그건…….”

주현 누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이대로 참고 넘어갈 거예요?”

“…….”

아무래도 혼란스러워진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이끌어주는 대신 답변을 기다리기로 했다.

주현 누나가 스스로 결단할 수 있도록.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영재야!”

이제 막 놀이터로 들어온 민주 누나였다. 누나는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뛰어왔다.

얼마나 바쁘게 달려온 건지 옆 머리칼이 볼에 달라붙어 있었다.

“다행이다. 찾아서…….”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니 느낄 수 있었다. 민주 누나가 정말로 걱정했었다는 사실을.

민주 누나가 무릎을 짚은 자세로 주현 누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주현아. 어디 다치거나 하진 않았지? 괜찮은 거지?”

“…….”

주현 누나는 고개를 슬쩍 틀면서 은근한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민주 누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로.

민주 누나는 숨을 크게 토해낸 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너무 스산하다. 사람 별로 안 올 것 같은데. 근데 넌 어떻게 이런 델 알고 있는 거야?”

“그냥, 여기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거든요.”

“아하.”

고개를 주억거린 민주 누나가 내게 이리 와보라고 손짓을 했다.

“잠깐만 저쪽으로.”

한껏 낮춘 음성을 내던진 누나가 내 몸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누나가 멈춰선 지점은 벤치로부터 열 발짝쯤 떨어진 곳.

“뭐 때문이래? 가출인 거야, 아니면 학원만?”

물어보면서 턱짓을 하는 민주 누나.

“누나. 잠깐만 귀 좀.”

그러자 누나가 얼른 자신의 귀를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대고 알아낸 사실을 요약하여 들려주었다.

사정을 모두 전해 들은 누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랬단 말이지. 하여간 그 아줌마…….”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민주 누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저도요…….”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막막한 상황.

우리는 다시 주현 선배 곁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윤희와 지아 누나도 놀이터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 다 주현 선배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괘, 괜찮, 아…….”

민주 누나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에 나는 혹시나 하여 누나의 표정을 살폈다. 누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

규원이는 지아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좀 늦을 것 같다고 전했다.

“우리 슬슬 출발할 건데, 내려가는 길에 합류하자.”

지아 누나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놀이터를 빠져나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도중에 규원이와 마주쳤다.

“오오! 언니이! 괜찮아? 괜찮은 거지?”

“으, 응.”

살짝 뒷걸음질을 치는 주현 누나. 규원이의 오버스런 반응이 다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출처는 민주 누나의 스마트폰이었다.

액정을 바라보는 누나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 아주머니인가 보네.

“얘들아 잠깐만.”

우리에게 양해를 구한 민주 누나가 상대와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들아. 빨리 가야겠다. 이 아줌마가 지금 난리도 아니야.”

“네.”

대표로 대답한 것은 나였다.

민주 누나를 선두로 하여 우리는 주현 누나네 집으로 향했다. 거의 다 왔을 쯤 누나가 우리를 향해 돌아섰다.

“여기까지면 돼. 다들 도와줘서 고마워.”

“천만에요. 주현이는 저희들 친구니까.”

지아 누나가 미소를 머금었고, 윤희는 주현 선배를 찾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규원이는 다음에는 스터디부에서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민주 누나. 그럼 저도 이제 가볼게요.”

목례를 한 뒤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주현 누나가 내 소매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현 누나를 바라보았다. 놀라워하기는 민주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주현 누나?”

“가, 같이…… 와 줘…….”

개미만한 목소리. 그러나 분명한 의사가 담겨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민주 누나에게 시선을 보냈더니, 누나는 아래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누나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자. 주현이가 원하는 거니까.”

진짜로 괜찮을 걸까?

나는 걱정을 한가득 끌어안은 채 두 사람을 따라갔다.

* * * *

집 앞에 도착했더니 아주머니가 팔짱을 낀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드러난 표정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 눈빛의 종착지는 바로 주현 누나였다.

“너!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아주머니가 씩씩거리며 삿대질을 했다. 고함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주현 누나는 아예 고개도 들지 못했고.

“엄만 왜 다짜고짜 고함부터 쳐!”

받아치는 민주 누나의 목소리로 만만치 않았다.

아주머니가 우리를 향해 발을 쿵쿵 구르며 다가오더니 민주 누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조용히 해.”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움찔했다.

“어머, 선생님은 여기에 무슨 일이세요?”

다소 누그러진 음성.

“아, 저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그때 민주 누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영재가 왜 왔겠어. 주현이의 과외 선생님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갑자기 그 얘기를?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민주 누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미 새로운 과외 선생님 구했으니까 끝이야.“

아주머니의 시선이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안 끝났어. 영재가 과외 선생님을 하려는 게, 주현이를 스터디부에 돌아오게 하기 위한 거라고!”

민주 누나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악에 받친 목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우리들의 목적이 드러나게 될 줄이야.

머리가 멍해졌다. 도저히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민주 누나가 이쪽을 향해 눈을 홱 돌렸는데 비장한 눈빛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어. 차라리 밝히는 편이 나아.”

누나가 다시 아주머니와 눈싸움을 했다.

“아아, 그래서 무료 과외…….”

뇌까리던 아주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나를 속이기까지 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목적이 밝혀진 이상 당당하게 밀어 붙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주머니가 무척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우리 애를 그런 나쁜 부에 돌려보낼 수 없어. 허튼 짓 말고 썩 돌아가!”

아주머니가 꺼지라고 손짓을 했지만 나는 꿋꿋하게 버티고 섰다.

“엄마가 뭔데 멋대로 가라 마라야? 주현이 의견 들어보기는 했어?”

민주 누나도 지원 사격에 나섰다.

“주현이 의견?”

입으로 되뇌는 아주머니. 모래알을 굴리는 양 무척이나 어색하게 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엄마 말만 잘 들으면 돼. 그러면 성공한다고. 민주 너는 그러지 않았고.”

아주머니가 으르렁거렸다. 지금의 분노가 과거에 있었던 분노의 불길마저 되살린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무슨 상관이야! 주현이 의견을 들어보라니까!”

민주 누나의 손이 주현 누나를 가리켰고, 바통을 건네받은 주현 누나가 흠칫 놀랐다.

아주머니는 서슬 퍼런 눈길로 민주 누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눈을 감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한 번 들어보자. 주현아.”

한결 누그러든 음성.

“얼른 얘기해 봐. 새로운 과외 선생님이랑 착실하게 공부할지, 아니면 네 발목만 잡을 스터디부로 돌아갈지.”

“엄마!”

민주 누나의 외침은 아주머니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넌 조용히 해! 주현이한테 물어보는 거니까.”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의견을 묻는 태도가 아니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응?”

아주머니가 대답을 재촉했다. 주현 누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서. 엄마가 묻고 있잖아.”

“저, 저는…….”

긴장 탓에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 또한 긴장되었다.

머뭇거린 끝에 주현 누나가 입을 열었다.

“스, 스터디부, 돌아, 가고 싶…….”

그러나 주현 선배의 말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아주머니의 손이 누나의 따귀를 정확하게 때렸으므로.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주현 누나의 목이 완전히 꺾여버렸고, 빨간테 안경이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나는 경악한 나머지 아무런 동작도 취할 수가 없었다.

“다시 얘기해.”

아주머니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엄마 미쳤어?”

고함을 치며 달려든 민주 누나가 재빨리 아주머니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주 누나의 손을 뿌리친 아주머니가 대답을 종용했다.

주현 누나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빨리 대답 안 해?”

손찌검이 한 차례 더 이어졌다.

“그만하라고!”

민주 누나가 아예 아주머니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아주머니의 팔뚝을 잡았다.

“아주머니. 진정하세요!”

“넌 뭐야! 이거 안 놔!”

“왜 애를때리냐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으흑…….”

귓전에 들려오는 울먹거리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주현 누나가 손으로 뺨을 감싼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잔뜩 흥분해 있던 아주머니와 민주 누나의 거센 움직임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주, 주현아?”

민주 누나가 한 걸음 다가가자 주현 누나가 한 발짝 뒷걸음질했다. 그러더니 돌아서서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주현아!”

민주 누나의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누나. 제가 쫓아갈게요.”

“알겠어. 나는 엄마랑 아직 할 얘기가 있으니깐.”

누나가 엄지로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는데, 거기에는 아주머니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까 주현 누나를 때린 손을 내려다본 채.

자신도 모르게 행사한 폭력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아주머니가 주현 누나를 때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전화할게요.”

“부탁할게.”

민주 누나가 묵직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나는 주현 선배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