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08화평행선을 맞닿게 하는 방법(1)
* * *
달력이 9월로 넘어오자 담임선생님은 중간고사 일정표가 나왔다며 우리에게 공지했다. 일정은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헐. 개천절에 놀지도 못하겠네…….”
다들 그런 불만을 토로하며 아쉬워했다.
동시에 주말 학생 교사 신청자를 받겠다는 공고도 게시판에 붙었다.
신청자는 총 네 명. 나와 윤희, 도연이, 그리고 마지막은,
“이번엔 나도 할 테야!”
규원이였다.
“어떤 걸로 수업하게?”
내가 질문을 던지자 규원이가 아래턱을 매만졌다.
“음……. 기타 과목으로?”
“그건 다들 혼자서도 공부하잖아.”
“그, 그렇긴 하지…….”
윤희의 지적에 규원이가 맥을 못 추었다.
“어차피 선생님이 듣고 판단하실 거니까 나중에 같이 가자.”
도연이가 우리를 둘러보며 권했고, 규원이는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좋아! 문상 3만원을 위해!”
그러나 아쉽게도 규원이는 학생 교사 선발에서 제외되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나와 윤희, 도연이만 선정되었다.
우리는 잔뜩 토라진 규원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9월 5일, 우리들은 모의고사를 치뤘다. 한나절 넘게 이어진 사투가 끝나자 모두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했다.
멀쩡한 건 나밖에 없는 모양이로군.
고개를 틀고 윤희를 바라보았는데, 지쳐 있는 표정이었다.
“수고했어.”
“응. 너도.”
그렇게 응답해준 윤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했다.
“집 가면 바로 자겠네?”
“글쎄.”
윤희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둘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얘들아아!”
목청을 높이며 내 자리로 달려온 규원이가 내 어깨를 짚은 채 힘들었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모의고사는 잘 봤어?”
“어, 음. 수학은 여전히 어렵더라. 영어도 좀…….”
옆에서 듣고 있던 윤희가 한 마디 곁들였다.
“그래도 풀려고 노력한 거네.”
그러자 규원이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응! 머리 터지는 줄 알았다구.”
“얘들아!”
우리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옮겼다. 교실 뒷문에 지아 누나가 서 있었다.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누나도 수고 많았어요.”
나를 필두로 윤희와 규원이도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아. 이번에 어렵더라.”
지아 누나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보였다.
“그래도 성적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그렇겠지?”
누나가 규원이와 시선을 맞추자 규원이가 과장스럽게 고갯짓을 했다. 규원이의 말마따나 성적표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다.
그동안 나에게는 그런 이변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지.
“오늘 스터디부 활동은 어떻게 할래?”
내 물음에 멤버들 모두가 피로감을 들먹이며 난색을 표했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슬슬 과외를 하러 가야 할 때였다.
“그래. 오늘은 푹 쉬는 걸로 하자. 나 먼저 갈게!”
멤버를 로 한 채 먼저 집으로 출발했다.
오늘도 늘 하던 대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뒤 주현 선배네 집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영단어장 앱을 실행했다. 그 직후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뭐지?
의문을 품은 채 나는 수화부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오늘은 좀 말씀드리고픈 게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어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네. 말씀해 주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새로운 과외 선생님을 구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어요.]
……응?
잠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네? 뭐라구요?”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모습 주욱 지켜봤는데, 우리 애한테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서요.]
“아주머니, 주현이가 기초가 탄탄해서 많이 가르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옆에서 봐주면서 모르는 부분을 알려주고…….”
하지만 아주머니는 내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저는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를 원하거든요. 미안하지만, 선생님 수업 스타일은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돈 주고 과외를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이미 결정한 거니까 그렇게 이해해 주세요.]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설득이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뭐야,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우두커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차츰 이성이 돌아오면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비상사태였다.
* * * *
어떡해야 하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물음표의 향연.
아주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은 헛수고로 끝날 게 뻔하다. 그렇다고 마냥 두 손 놓고 잘릴 수는 없는데.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불현듯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인물 한 명이 떠올랐다.
민주 누나.
나는 지체없이 민주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누나가 곧 전화를 받았다.
[어? 네가 웬일이야?]
“누나, 지금 긴히 할 얘기가 있어요. 저 조금 전에 과외 잘렸는데…….”
하지만 누나는 내 말허리를 끊었다.
[아, 저기. 내가 지금 친구 자취방이거든. 나중에 다시 연락 줄게.]
하필이면…….
“아, 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어쩌면 안일했던 걸지도 모른다. 무료 과외니까 무조건 먹힐 거야, 라는 마음가짐.
처음엔 확실히 그랬다. 사람이라면 같은 일을 할 때 당연히 돈이 적게 드는 쪽을 선호하니까.
나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이대로 잘 풀릴 줄로만 알았는데,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제 주현 선배를 영영 스터디부로 데려올 수 없는 것일까.
묵직한 한숨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고 나서 기계적인 동작으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켰다.
원래라면 지금쯤 집에서 옷을 다 갈아입고 주현 선배네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무작정 쳐들어갈까.
아냐. 문전박대당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스터디부 단톡방에 접속했다. 초유의 위기 상황인 만큼 공유해 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 : 지금 클낫어! 아주머니가 나말고 다른 과외교사를 구했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채팅이 이어졌다.
규원 : 뭐시라?? 실화임???
지아 : ??????
윤희 : 갑자기?
하나같이 못 믿겠다는 반응이었다.
윤희 : 새로 구한 사람도 무료 과외야?
가장 먼저 냉정함을 찾은 윤희가 상황 파악에 나섰다.
나 : 아냐 이번에는 돈주고 한대....
규원 : 무료가 더좋은거아냐??? 뭐지....
스마트폰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규원이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지아 : 음..주현이는 이 사실을 알고있는 걸까?
나 :글쎄요..
지아 : 잠깐만! 나 주현이랑 전화좀 해봐야게써
나 : 네 부탁드려요
이어 윤희와 규원이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식의 채팅을 남겼다.
윤희 : 그런데 무슨 이유로 새로운 과외 교사를 구한 거야?
나 : 내 과외 수업 방식이 주현 선배에게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면서..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윤희 :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일방적이잖아. 뭐 그런 경우가 다 있어.
윤희가 분노를 표현한 이모티콘을 올렸다.
규원 : 헐..ㄹㅇ 어이없다 듣는 내가다 화나네 우리 쳐들어가자! 윤희야 오함마챙겨!!!
윤희 : 갑자기 오함마?
나 :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욘없고..
지아 : 방금 전화하고 왓어!
때마침 지아 누나가 단톡방으로 복귀했고, 우리는 어땠냐고 일제히 질문을 올렸다.
지아 : 처음듣는 거처럼 반응하더라.. 아주머니가 아무말도 안해준 모양이야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나는 제 3자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적어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알려줘야 했던 것 아닐까.
멤버들 또한 나와 비슷한 심정을 느낀다고 적었다.
윤희 :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활발하던 톡방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아무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 : 일단 내가 주현선배의 누나에게 상담해볼게
규원 : 헐? 언니가있었음??
지아 : 그건 몰랏는데....
윤희 : 그랬구나.
다들 신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하긴, 주현 선배가 그간 자기 얘기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나 : 일단 할 수 있는 방법은 다해볼테니까 좀만 기다려줘!
그렇게 채팅을 보내놓고 깨깨오톡 앱을 종료했다.
다시 민주 누나에게 전화해 볼까?
하지만 전화를 끊은 지 고작 20분밖에 안 지났는데.
일단은 평정을 되찾자.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양팔을 벌리며 심호흡을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흘금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자 들끓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우선은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전열을 가다듬자.
때마침 정류장으로 버스가 들어섰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였다.
* * * *
집으로 돌아왔더니 슬기가 현관에서 나를 맞이했다.
“어라? 오늘은 빨리 왔네?”
“모의고사였거든.”
나는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옷도 갈아입었다. 민주 누나의 연락이 오면 바로 뛰쳐나갈 수 있도록.
거실로 나온 나는 TV를 시청하고 있는 슬기 옆에 앉았다.
“오빠아. 나 게임해도 돼?”
“안 돼.”
“지금 아무것도 안 하잖아.”
“혹시 몰라서 그래.”
“치.”
혀를 찬 슬기가 뾰로통한 얼굴을 한 채 TV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계속해서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분이 10분 같고, 10분이 한 시간 같은, 하염없는 기다림이었다.
“근데 오빠, 오늘은 공부 안 해?”
“응?”
슬기의 관자놀이를 바라보았다.
“아. 오늘은 좀 쉬려고.”
“막, 응가 마려운 사람처럼 그러고 있길래.”
“…….”
슬기의 눈에도 초조하게 구는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화장실 안 가도 돼?”
“아냐, 안 급해.”
고개를 젓자 슬기가 다시 TV에 눈을 고정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될까.
좀이 쑤셔서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이 이토록 반갑기는 또 처음이었다.
화면에 표시된 발신자는 민주 누나였다.
“여보세요!”
입을 열면서 벌떡 일어섰다.
[아, 영재야. 나 집 갔다가 잠시 나왔거든. 아까 과외 선생 잘렸다고 했지?]
“네 맞아요.”
열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하면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하늘은 아직 우리의 바람을 져버리지 않았다!
[혹시 7시 반까지 스타박스로 올 수 있어?]
“당연하죠!”
목청 높여 대답했다.
옆에서 슬기가 오빠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하며 핀잔을 주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그때 봐.]
통화를 마치고 나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7시 5분이니 충분히 갈 수 있었다.
“슬기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현관에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럼 저녁은?”
“오늘은 혼자서 먹어.”
나는 문을 열고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 * * *
한참을 달린 끝에 스타박스에 도착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가다듬을 새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둘러보니 민주 누나가 이미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옆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있었다.
나는 누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뛰어왔어?”
민주 누나가 턱짓을 했다.
“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뒤 호흡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옆에 있는 분은?”
누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누나가 남자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분위기상 애인 사이 같지는 않구만.
“내가 소개해도 되지?”
“그렇게 해줘.”
선선히 대답하는 남자.
“그런고로 소개할게. 얘 이름은 강용진.”
나는 남자를 쳐다봤다.
단정하게 깎은 스포츠 머리. 인상은 좋아 보이는데 피부가 다소 거칠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대학생다운 느낌이 났다.
누나의 소개가 이어졌다.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고,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 학과는 달라서 만날 일은 거의 없긴 하지만.”
“안녕하세요.”
먼저 목례를 했더니 남자도 목례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민주 누나가 검지를 치켜세우더니 남자를 지목했다.
“얘가 바로, 이번에 새로 뽑힌 과외선생님이라는 점이지.”
민주 누나가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뜻하지 않은 대면에 놀라는 것도 잠시, 지금 이 상황이 황금 같은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기회를 최대한 살려보자고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