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07화과외사기단(5)
* * *
토요일 아침, 나는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섰다. 그러고는 밥상 앞에 앉아서 열심히 머리를 싸매는 슬기를 향해 눈길을 한 번 던졌다.
“슬기야. 나 학교 갔다 올게.”
“응…….”
배웅하는 음성에 기운이 없었다. 그러게 진작에 숙제를 해놓지 그랬냐.
“열심히 하고.
응원 한 마디를 툭 던져 놓고 집을 나섰다.
내가 오늘 학교에 가는 이유는 멤버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멤버들의 요청도 있었지만, 나 역시도 멤버들과 함께 부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버스 대신 도보를 택했다. 요샌 날씨도 방학 때보다 선선해졌으니 다닐 만해졌다.
한참 동안 걸음을 옮긴 끝에 스터디드림 부실 앞에 도착했다. 어쩌다 보니 1등으로 도착하게 됐네.
벽에 기댄 채 스마트폰을 보는 사이 나머지 멤버들이 다 함께 몰려왔다.
“다들 안녕!”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규원이가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오옷! 성실맨! 하이!”
“여기서 보니까 너무 반갑다.”
지아 누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안녕. 일찍 왔네.”
윤희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보인 뒤 열쇠로 부실 문을 열어주었다.
부실에 들어와서 가운데 자리에 앉았더니 마치 집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마음의 안식처가 따로 없구만.
규원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영어 문제집부터 꺼냈다.
“나 오늘은 영재한테 배울 거야!”
“그래. 나도 오늘은 내 공부를 하고 싶으니까.”
선선히 내뱉은 윤희가 언어 영역 문제집을 꺼냈다.
“나는 또 혼자 공부해야겠구나.”
지아 누나는 턱을 괸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누난 원래 혼자 공부해 왔잖아요.”
“나도 영재한테 과외받고 싶은 걸.”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누나가 이렇게까지 원한다면, 나의 대답은 하나다.
“생각 조옴 해보고요.”
입꼬리를 슬쩍 올렸더니 누나가 뾰로통한 얼굴을 지었다.
“그렇구나. 나는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구나…….”
후후. 이제 그 정도로 홀라당 넘어가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누나의 공부를 봐줘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내일 하루는 누나의 전속 과외 선생님이 되도록 하죠. 특별히.”
“그럼 나도 내일은 하루 종일 영재의 수업을 들어줘야겠네. 특별히.”
역시 누나다운 대응이로구만.
“미리 각오해 두세요.”
“물론.”
그때 옆에서 규원이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영재야아. 오늘은 나라구. 나! 알지?”
“알고 있으니까 이거 좀 놔라.”
윤희는 이런 광경이 즐거운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규원이와 지아 누나도 이내 윤희를 따라 웃었다.
즐겁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앉아서 잡담을 나누는 시간도 오랜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지.
나는 손뼉을 두 번 쳤다.
“자, 즐거운 시간은 여기까지. 이제 모두 공부를 시작하자구.”
내 한 마디에 모두가 다시 열공 모드로 돌입했다. 나는 개인 공부 대신 규원이를 가르쳐줘야 하지만.
“오늘 하루 자알 부탁드립니다.”
규원이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씨익 웃었다. 그래도 늘 해왔던 일이라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좋아. 오늘 쉬는 시간 없는 줄 알아.”
“으악…….”
규원이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 * * *
“오후 6시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내 한 마디에 모두가 공부를 멈추었다. 지아 누나가 기지개를 켜고는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역시 나이가 많아서…….
“영재야. 너 무슨 생각했니?”
누나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에이, 저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시치미를뗐다. 스터디부 여성진은 다 독심 술사인가?
“영재 너 설마, 언니 가슴을…….”
물론 규원이는 제외다.
“그 입 다물라!”
나는 규원이의 널찍한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변태…….”
윤희가 경멸 어린 눈길을 보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얘가 또 멋대로 떠든 것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자 윤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피식 웃었다.
“알아. 규원이가 멋대로 떠든 거.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네가 하면 농담처럼 안 들려…….”
“그럼 진담이었던 걸로 할래?”
“아뇨.”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우리는 가방을 챙겨서 부실을 나섰다. 해가 서산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학교 정문을 빠져 나오니 완만한 경사로가 펼쳐졌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앞장섰고, 나와 윤희는 그 뒤를 따라갔다. 잡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주현 선배도 화제에 올랐다.
“영재야. 주현이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아직은 확신이 안 서요.”
누나의 질문에 확답할 수 없는 게 참 아쉬웠다.
“그렇구나.”
누나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초에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덕분이겠지.
경사로를 다 내려왔을 때 나는 내일도 같은 시간에 모이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고 나서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늘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노을을 구경하며 멍하니 발을 움직이던 중, 갑자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 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적힌 발신인은 김민주 누나.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영재야. 혹시 지금 시간 내줄 수 있어?]
다소 하이톤이면서 찌르고 들어오는 듯한 음성이었다.
“네? 지금요?”
집에 들어가자마자 씻고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얼마나요?”
[음, 길어봐야 한 시간 정도?]
한 시간 정도면 계획에 큰 차질은 없을 듯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시려구요?”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민주 누나는 그러면서 컴퍼스 커피에서 만나자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컴퍼스 커피에 도착했더니 민주 누나가 이쪽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누나는 출입구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누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웬 가방?”
민주 누나가 턱짓으로 가방을 지목했다.
“오늘 학교 갔어요. 스터디부 활동하려고.”
“아, 그랬구나. 그래서 음료 뭐 마실래? 내가 사줄 테니까.”
누나가 벽면에 부착된 메뉴판을 향해 턱을 움직였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될 것 같았다.
메뉴판 제일 상단에 에스프레소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다. 더 이상 사서 고생하지는 말자.
“카페라떼요.”
“오케이.”
잠시 후 누나가 주문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불렀어요?”
질문하자 민주 누나가 짧게 신음하며 깍지를 꼈다.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누나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진동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음료를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누나가 주문한 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오오. 인생을 좀 아는 사람만이 마신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뭔 개소리야.”
누나가 코웃음을 치고 빨대를 물었다. 나도 카페라떼를 몇 모금 들이켰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주현이에 대한 거야.”
“주현 선배요?”
“응.”
고개를 주억거리는 누나.
“주현이 걔, 학교에서는 어떻게 지내? 스터디부에서 같이 활동했으니까 그 정돈 알지?”
“네.”
긍정하고 나서 주현 선배의 학교 생활에 대해 알려주었는데, 거의 지아 누나에게서 들은 것을 토대로 한 내용이었다.
“그럼, 친구는 별로 없겠네?”
누나가 아까보다는 톤을 낮추었다.
“음. 그, 렇죠.”
“정확히 어느 정도로?”
민주 누나는 주현 선배와 친자매다. 그 누구보다도 연관이 깊은 사이.
이미 여기까지 온 거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스터디부 멤버들 빼고는 사실상 없었죠……. 스터디부도 그나마지, 막 살가웠던 건 아니었어요. 항상, 움츠리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랬어요.”
“음…….”
누나가 턱을 괸 채 손으로는 빨대를 휘휘 저었다. 얼음이 잔과 부딪치면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었다.
“하긴. 집에서도 그러는데, 학교라고 안 그러겠냐만은…….”
누나는 아까보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나는, 보기보다 주현 선배에게 관심이 많네요.”
“그야, 동생이니까. 지금은 찬바람 쌩쌩 부는 사이지만.”
누나가 빨대를 가볍게 물고 음료를 빨아들였다.
“사실은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어.”
나는 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태여 입은 열지 않았다. 맥락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까.
누나가 오므린 입술을 벌렸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판사가 되려고 했거든. 내가 원했던 건 아니고, 그냥 엄마 아빠가 판사를 하라고 해서 그랬어. 주현이 보고는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며칠 전 주현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주현 선배는 그때 아주머니의 의향에 따라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주현이만큼이나, 아니, 주현이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질 않는 거야. 심지어 떨어지기까지 했어. 그것 때문에 혼도 많이 났고. 사춘기 때는 내가 이렇게 매 맞아가면서까지 공부해야 되나 허탈감도 들었어.”
아마 주현 선배도 민주 누나가 경험한 일을 그대로 겪었을 것이다.
누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무런 의욕도 안 생기던 때에 딱 한 가지 빠져든 게 있어. 패션. 엄마가 문제집 사라고 준 돈이었는데, 반항심이 생겨서 패션잡지를 골랐거든. 엄마 몰래 그걸 보면서 점점 흥미가 생기더라. 패션의 세계에 대해서. 이것 때문에 정말 많이 싸웠다. 엄마 아빠는 여전히 내가 판사가 되길 원했고, 나는 그걸 거부했으니까. 결국 내가 이겨서 패션디자인학과에 들어갔는데, 이후로 집안 분위기가 이 모양 이 꼴이고.”
누나가 팔짱을 낀 자세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그렇다 쳐도 왜 주현이까지 나를 기피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주현이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한 적 있어?”
나는 눈꺼풀 운동을 몇 차례했다.
“어, 그게…….”
“괜찮아. 괜찮으니까.”
누나가 괜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나는 입을 열기로 했다.
“상처 받을지도 몰라요.”
“괜찮대두.”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나 보고, 나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그렇구나…….”
누나의 눈빛에 우수가 깃들었다.
“누나는, 주현 선배와 다시 사이가 좋아지고 싶은 거죠?”
확인 차 질문을 던졌더니 누나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지도 잘 모르겠고.”
누나가 턱을 괸 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제 3자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하소연을 하게 됐네. 미안해.”
“아녜요.”
덤덤하게 말하며 머리를 옆으로 움직였다.
“이만 가자.”
누나의 권유에 따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인도, 해결책도 모르는 꽉 막힌 상황.
민주 누나와 헤어진 뒤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정말로 난제였다.
* * * *
슬기와 저녁을 먹고 나서 방으로 들어왔다.
민주 누나와 나눈 대화 때문에 여러모로 심란했다.
어쩌면, 그저 주현 선배를 스터디부에 복귀시키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공부해야지!
책상에 막 앉은 그 순간,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나서 통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어제 제가 주현이가 공부하는 모습을 못 봐서 전화를 드렸어요.]
그게 이렇게 전화까지 할 정도의 일인가? 교육열이 보통이 아니구만.
[그래서 선생님. 우리 주현이 어제 공부 어떠셨나요?]
“공부 말인가요? 주현 학생은 항상 잘하고 있어요.”
[그런가요?]
“네. 제가 구태여 가르칠 필요가 없을 만큼 알아서 잘해요. 기초가 잘 다져져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나는 가능한 주현 선배를 추켜 세웠다.
[흐음.]
속을 알 수 없는 미묘한 반응이 돌아왔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저는 혹시나 걱정이 되어서 여쭤본 것뿐이랍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궁금한 사항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셔요.”
통화가 끝났다.
앞으로 한동안 시달릴지도 모르겠구만.
나는 다시금 각오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내 각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주머니가 새로운 과외 선생님을 구했다며, 나를 일방적으로 잘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