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104화과외사기단(2)
* * *
윤희와 지아 누나, 규원이. 이렇게 세 사람의 노고로 나는 주현 선배의 과외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개인톡으로 윤희에게 물었다.
나 : 오늘 전화 받는 모습 보니까 상담원같더라 ㅋㅋ 연습한거야???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고, 대략 3분 뒤에 답신이 왔다.
윤희 : 그런 건 아냐. 그냥 예전에 심심해서 광고 전화를 끝까지 들어보곤 했거든. 그때 기억을 되살려봤을 뿐이야.
설마 그런 짠한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나 : ㅎㅎ... 그러쿠나...
다음날 스터디부에서 윤희가 내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옷과 신발이 있었다.
“한 번 꺼내 봐봐.”
지아 누나의 목소리에 나는 책상 위에 옷과 신발을 꺼냈다. 신발은 흰색 스니커즈. 옷은 상 하의로 각각 두 벌이었다.
“두 벌이나?”
깜짝 놀라서 부원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날도 더운데 한 벌만 있으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여벌 옷도 같이 고르자고 했어.”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지아 누나.
“신발은 내가 고른 거다! 에헴.”
규원이는 어깨를 한껏 폈다.
윤희는 그런 규원이의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러더니 상의 한 벌을 집어 들었다. 푸른색 계열 맨투맨 반팔이었다.
“어제 이것 때문에 언니랑 의견 조율하느라 힘들었어.”
윤희의 얘기를 들은 지아 누나가 곧장 수긍의 뜻으로 머리를 움직였다.
“처음엔 한 벌만 고를 생각이었거든. 근데 여름에 땀 많이 흘리는데 여벌 옷이 없으면 좀 그렇잖아. 내가 그 얘길 했더니 윤희도 찬성했지. 그래서.”
지아 누나는 나머지 상의 한 벌을 들어 올렸다. 회색 라운드 반팔티였다.
“이렇게 골랐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세 사람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골라 준 옷과 신발이 모두 다 마음에 쏙 든다고 얘기했다.
“주현 선배를 데려오기 위한 투자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윤희의 말투에는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다들 정말로 고마워.”
그러는 동안 윤희와 지아 누나가 옷가지와 신발을 정리하여 다시 쇼핑백 안에 넣었다.
벽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었다. 7시까지 가서 면담을 해야 하므로 출발해야 할 때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부실 열쇠를 꺼냈다.
“윤희야. 이거 받아.”
나는 윤희의 손바닥 위에 부실 열쇠를 내려놓았다.
“오늘 하루 마무리 잘 부탁할게.”
“그건 걱정하지 마. 오늘 잘하고 와.”
“응.”
옆에서 지아 누나와 규원이도 잘하고 오라며 격려해 주었다.
나는 쇼핑백을 챙긴 뒤 부실을 나섰다. 일단은 집에 돌아가서 준비를 갖춘 뒤에 주현 선배네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도보로 왔다갔다 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니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주현 선배에게 개인톡을 넣었다.
사전 설명도 없이 불쑥 찾아가면 놀랄 게 분명하니 미리 설명해 놓으려는 것이었다.
나 : 선배 오늘 무료과외선생님으로 제가 갈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말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해주세요!!
혹시나 다른 일을 하느라 못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 것도 잠시,
주현 : ...응.. 근데 나... 오늘은 학원 때문에... 집에 없을거야...
빠르게 답장이 왔다.
집에 없을 거라고 하니 다행이군. 나는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날려 보냈다.
이제 정말로 할 수 있는 사전 작업은 다 했다.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녁 6시 반을 넘겼어도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퇴근하는 차량들이 도로 위를 바삐 질주했고,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들도 많았다.
나는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받쳤다. 이렇게 저녁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나른한 감상에 젖어있는데 깨톡 알림음이 울렸다. 스터디드림 단톡방에서 온 메신저였다.
지아 : 지금 가고 있찌? 옷 입은거 인증샷 좀 보내줘어~
나 : 저 셀카 못찍는데요..
지아 : 다들 보고 싶어해 한번만!
셀카는 익숙하지 않은데…….
나는 스마트폰을 최대한 높이 들고 촬영했다. 워낙에 얼굴이 못나서 그런지 사진도 이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다시 촬영을 하기에는 귀찮아서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단톡방에 소리 없는 웃음보가 난무했다.
그럼 그렇지.
대략 15분을 더 이동하여 목적지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켜고 지도앱을 실행했다.
샘송아파트 5층 503호.
어젯밤 지아 누나가 알려준 주소였다. 걸어서 불과 5분 거리.
곧 있으면 실전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고 마음 먹은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
503호 문 앞에 서자 긴장되기 시작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나서 심호흡을 몇 차례했다. 긴장으로 쿵쿵 발차기를 하던 심장도 다소나마 진정이 되었다.
나는 굵은 침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 속으로 셋, 둘, 하나. 카운트 다운 끝에 인터폰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자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날선 느낌의 중년 여자 목소리. 이 사람이 바로 주현 선배의 엄마로군.
“안녕하세요. 무료과외하러 온 사람입니다.”
인터폰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인터폰이 끊긴 직후, 현관문이 열렸다.
“어서와요.”
아주머니가 눈웃음을 띤 채 반겨주었다. 웃고 있는데도 어쩐지 인상이 날카로워 보였다.
아주머니는 위아래로 나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야 들어오라고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안으로 들어섰다. 별다른 특색이 보이지 않는,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가정집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 뒤 거실에 올라왔다.
“여기로 오세요.”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 부엌 식탁에 왔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 호칭이 왠지 낯간지럽게 들렸지만 꾹 참았다.
“정말로 무료 과외 맞나요? 제가 그동안 무료 과외해주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거든요.”
의구심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띤 채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그럼요. 일종의 봉사활동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 친구들 중 몇 명은 이미 하고 있고요.”
“아아, 그렇구나. 그저께 전단지를 봤는데 정말 깜짝 놀랐거든요.”
그제야 아주머니가 그제야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오늘 날씨가 좀 덥지요? 마실 거라도 드릴게요.”
“아녜요. 괜찮습니다.”
처음은 사양.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미덕 아니던가.
“그러지 말고 목 좀 축이세요. 시원한 커피 어떠세요?”
“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믹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얼음 세 조각이 띄워진 아이스 커피였다.
아주머니와 나는 몇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이윽고 아주머니가 머그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제 딸아이 하나가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에요.”
주현 선배 얘기로군.
나도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뒤 깍지를 낀 채 귀를 활짝 열었다.
“그 애가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성적이 별로예요. 저번 학기 기말시험 때는 오히려 평균 점수가 떨어졌고. 여기저기 학원을 다니는데도 그렇네요. 학원에 가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기는 한 건지.”
아주머니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채, 주현 선배가 무슨 학원을 다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다니는 학원이 그렇게나 많다고?
“아……. 아주머님. 그러면 따님이 쉬는 날은 없는 건지요?”
“쉬는 날이라뇨. 의사가 되려면 온종일 공부해도 모자르다고요.”
“그렇군요.”
새삼 주현 선배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 정도로 살인적인 일정을 군말 없이 수행할 수 있는 대한민국 청소년이 과연 몇 명일까?
공부 벌레라고 불리는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수준인데.
단지 그게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엄마가 시켜서 한다는 게 문제지만.
그러다 문득 언젠가 주현 선배가 혼잣말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중얼거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선생님.”
잠깐 생각에 빠져있는 와중에 아주머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
“선생님 혹시…….”
아주머니가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설마, 날 기억해낸 건가?
나는 굵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동안이라는 말 자주 듣지 않나요? 대학생 치고 인상이 많이 어려 보이셔서요.”
아주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생글생글 웃었다.
“아,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다행히 기억 못하는 모양이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짜 이 정도면 동안인데. 동기들이 사람 볼 줄 모르나 보네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이런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했다.
아주머니가 상체를 내 쪽으로 약간 기울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느 대학교 다니시나요?”
“한성대학교 다닙니다. 아직 1학년이지만요.”
미래의 목표를 이미 이룬 것처럼 말하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가방에서 한성대학교 입학증을 꺼냈다. 참고로 이건 윤희가 위조(?)해준 것이다.
아주머니가 한동안 그것을 살펴본 뒤 말문을 열었다.
“영문학과 다니는구나. 대단하시네요.”
“그냥 공부 좀 열심히 한 것뿐이에요.”
나는 아주머니와 스케줄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리하여 과외는 내일부터 중간고사가 끝나는 기간까지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주 5일에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내일부터 우리 딸 좀 잘 부탁드릴게요.”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누나가 나왔다.
주현 선배와 닮은 구석이 있었지만 확실히 인상이 달랐다. 안경을 쓰지 않은 것도 그렇고.
약간 고양이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그 누나를 향해 쏘아붙였다.
“너는 이때까지 잤니?”
“아, 뭐. 방학인데.”
대놓고 귀찮아 하는 태도였다.
“다른 애들은 벌써부터 대기업이니 공무원이니 하면서 준비하고 있는데 넌 왜 항상 그 모양 그 꼴이야, 어?”
“아, 알아서 한다니까!”
누나가 짜증을 부리자 집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주머니가 못마땅해 하며 한숨을 토했다.
“휴.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선생님.”
“아녜요.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이만 가보겠다고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집을 나섰다. 그런데 돌연 그 누나가 내게로 다가왔다.
“어디 가.”
“편의점 갈 거다, 왜.”
누나가 아주머니를 향해 툭 던지고는 샌들을 신었다. 그렇게 나는 그 누나와 엉겁결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 * * *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누나는 아무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1층에 내려왔을 때 누나가 내게 말을 건넸다.
“저기, 잠깐만 시간 좀 내줄래요?”
갑작스러운 제의에 나는 눈썹을 움찔했다.
여기선 역시 거절하고 가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앞으로 얼굴 보기가 껄끄러워질 수도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좋다고 승낙했다.
“따라와요.”
누나가 시원스러운 어조로 말했고, 나는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이윽고 우리는 스타박스에 도착했다.
“음료는 내가 살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누나가 턱짓을 하며 물었고, 나는 좋다고 말했다.
음료를 받은 뒤 우리는 테이블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누나는 내가 빨대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소개도 안 했네. 김민주라고 해요. 내년이면 대학교 3학년이고. 그쪽은?”
이번에도 턱짓을 하는 누나.
“저는 한영재예요. 올해 대학교 1학년생이구요.”
“1학년. 한참 재밌을 때지.”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정확히 어떻게 무얼 해서 재밌는지를 모르니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말 놓아도 상관없죠? 어차피 내가 더 나이도 많고.”
“물론이죠.”
머리를 끄덕거렸다.
“오케이. 네가 내일 가르칠 애가 내 동생이야. 이름은 김주현이고. 엄청 갑갑한 애니까 복장 터질 각오해 두는 게 좋아.”
곧바로 말을 놓아버렸다. 주현 선배의 성격과는 완전히 딴판.
“그렇군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돌연 민주 누나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흠. 사실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야.”
“어떤 거요?”
“너 실제로 몇 살이야?”
이번에도 턱짓을 하며 질문했다.
“20살이에요.”
속으로 무척 당황했지만 티나지 않게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눈치를 챈 거지.
민주 누나가 불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학생 아닌 건 딱 보면 각 나와. 진짜로 몇 살인데?”
집에서 보자마자 눈치채버린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확신에 찬 목소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17살, 이에요…….”
사실대로 실토하고 말았다.
……잠깐만, 이거 위기 상황 아닌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