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102화쉽게 보낼 수 없어!(2)
* * *
데려올 것이라는 나의 선언에 다들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지아 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아 누나. 주현 선배 아주머니가 왜 그만두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응.”
누나가 긍정의 고갯짓을 하고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방학 때 우리 바다에 놀러 갔었잖아. 그때 주현이를 기숙학원에서 몰래 데려 나왔고. 그 일 때문에 엄마가 스터디부 같은 곳에 있지 말라고 하셨대.”
“그럼, 우리 잘못인 거야?”
규원이의 어조가 조심스러웠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말자. 주현 선배도 우리를 만나고 싶어 했잖아.”
“아, 응. 그랬었지.”
내 말에 규원이가 곧바로 납득했다.
줄곧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윤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언니가 그런 얘길 했었네요.”
“그러게 말야. 정말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는데 정답이었을 줄은…….”
지아 누나가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참 난감해졌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수업 종이 울렸다.
“일단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우리 셋은 지아 누나를 향해 알겠다고 답했다.
곧 있으면 선생님들이 들어올 테니 빨리 교실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 셋은 누나에게 손으로 인사하고 나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덕분에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에 간신히 자리에 착석할 수 있었다.
* * * *
모두가 기다려 마지않았을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온 한숨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유는 당연히 주현 선배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우리끼리 대판 싸움이 나서 탈퇴한 경우라면 차라리 해결하기 쉽다. 서로 대면한 채 화해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주현 선배를 설득하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니까.
나는 턱을 괸 채 새하얀 천장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윤희를 향해 슬쩍 곁눈질해 보았다.
윤희는 시집을 보는 대신 다른 생각에 몰두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이 상황에서 시집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
사고가 여기저기로 가지를 뻗었지만, 얼마 못 가 끊어지기 일쑤였다.
이번 시련은 그간 겪어온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럴 때 아주 조그마한 해결의 실마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실마리조차도 우리가 직접 찾아내야 한다.
다만 어떻게 그걸 찾아야 할지조차 모르겠다는 점이 문제였다. 스터디드림 부장 자리가 이렇게나 힘든 자리였나?
나는 책상 위에 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박았다.
소음 탓이었을까, 윤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고 윤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윤희의 얼굴에 실망과 낙담, 침통한 감정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무력감에 젖은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윤희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떠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마 포기라는 단어를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건 마지막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려워……. 차라리 중간고사나 치르고 싶어.”
“그건 좀…….”
윤희가 난색을 표했다. 그때 규원이가 목청껏 소리치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얘들아아!”
규원이는 그대로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책상을 두드렸다.
“왜들 그리 침울해 있어.”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 상황이.”
또 속 편한 소릴 하는 규원이를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규원이는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내 등에 스매시를 날렸다. 강한 충격 때문에 나는 몸을 크게 들썩이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프잖아!”
고개를 홱 틀고 규원이를 노려보았다.
“너무 축 처져 있잖아. 그러면 보기 안 좋다구.”
규원이답지 않게 정상적인 발언을 하는군.
이번 사태가 가져온 유일한 이점일지도 모르겠다.
규원이가 양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그런데 너희들 아직 밥 안 먹었지?”
“응. 그렇기는 한데.”
벽시계를 확인해 보니 1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갈 때가 되긴 했네.”
내가 밍기적거리며 일어서자 윤희도 따라 일어났다.
규원이가 갑자기 차렷을 하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게! 오늘은 이 몸이 한 턱 낼 터이니.”
부러 중저음톤을 내며 무게를 잡는 규원이.
“떡볶이 사주는 거야?”
윤희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어, 음…….”
규원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 주먹을 입에 대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지갑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 모습을 보고 나와 윤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규원이도 우리를 따라 짤막한 웃음소릴 냈다.
“그래 가자. 셋이서 급식 먹는 거 오랜만이니까.”
말하면서 엄지로 교실 뒷문을 가리켰다.
그렇게 나를 선두로 하여 윤희와 규원이가 복도로 나왔다.
* * * *
피크타임을 넘긴 덕에 급식실이 한산했다.
배식을 받은 우리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나와 윤희는 나란히, 규원이는 나와 마주 보는 자리였다.
오늘의 급식 메뉴는 현미밥, 미역국, 김치, 오징어채, 제육볶음.
나는 숟가락을 쥐고 밥 한 덩어리를 삼켰다. 윤희와 규원이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시점에 규원이가 운을 뗐다.
“내가 어제부터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는데 말야.”
“뭔데?”
나는 숟가락을 식판에 내려놓았다. 윤희도 궁금증이 발동했는지 숟가락질을 멈췄다.
“어떻게 하면 주현이 언니를 다시 스터디부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해 봤다구. 노트에 브레인스타 뭐시기도 해보고.”
“브레인스토밍.”
윤희가 곧장 정정해 주었다.
“아아. 그래. 브레인스토밍. 아무튼 그것도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낙서도 하면서 머리를 쥐어 짜냈단 말이지.”
장황한 서론이로군.
중간에 끼어들까 하다가 일단은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해봤다는 거야?”
반대로 윤희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재촉했다. 규원이의 눈과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후후. 이쯤 하면 눈치를 채야지. 바로 주현이 언니를 데려오는 방법!”
말하면서 검지를 까딱거리는 규원이.
무언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굴더니만, 빈 수레가 요란한 꼴이었다.
나와 윤희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규원이는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정도 맥락은 누구라도 알아차리거든?”
“내가 말해줘서 안 거잖아.”
규원이가 나를 향해 되바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네가 말해준 덕분에 알게 됐어.”
윤희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규원이를 달랬다.
“윤희도 인정하네.”
한껏 가슴을 펴는 규원이. 그런데도 봐줄 만한 게 없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유 그래. 알았어, 알았어.”
나는 고개를 수차례 끄덕거렸다.
규원이가 제육볶음 한 점을 집어삼켰다. 그러고 나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진짜 답 없는 줄 알았는데,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더라구. 내가 가끔 이렇게 천재성을 발휘한다니까.”
그 방법이란 게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자화자찬을 하는 거지.
규원이의 행태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치가 올라갔다.
워낙에 엉뚱한 애라서 정말로 우리가 상상도 못한 방법을 떠올렸을지도 모르니까.
규원이가 우리를 향해 검지를 치켜세웠다.
“언니네 아주머니를 설득하자는 거지!”
말을 마치자마자 규원이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마치 자기가 한 일을 두고 어른들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애 같았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지금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윤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우리는 주현 선배가 아닌 선배의 아주머니를 설득해야만 한다. 그 외의 방법은 전부 허사다.
“그런데 네가 제시한 방법은 원론적인 얘기야. 중요한 건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는 거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를 어떤 방식으로 설득해야 좋을지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점이 문제야. 무턱대고 찾아가서 설득한다고 통할 리는 없을 테니까.”
윤희는 담담한 음성으로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했다.
하지만 규원이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자신감에 넘쳐 하는 모습이었다.
“윤희야. 내가 고작 설득해야겠어! 까지만 생각했을 것 같아?”
“……아니었어?”
윤희를 대신하여 내가 되물었다.
“날 뭘로 보고 그래.”
엉뚱한 애요.
그러나 구태여 입에 담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한 방법의 장점은 지금 당장이라도 실행할 수 있다는 거. 어때? 궁금하지 않아?”
“어. 그렇긴 한데, 왜 그리 음흉한 얼굴을 하고 있냐.”
지적해도 규원이는 음흉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했다. 어째 좀 불안한데…….
이윽고 규원이가 구체적인 계획을 털어놓았다.
“방법은 간단해. 일단 주현이 언니와 접촉을 해. 그렇게 잡아놓은 다음에 언니 휴대폰을 뺏어서 아주머니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지금 당신의 딸을 납치했다. 돌려받고 싶다면 얌전히 스터디부로…….”
“오케이! 거기까지. 더 이상 나불거리지 마.”
나는 손을 들고 규원이의 발언을 끊었다.
“설득한다면서?”
윤희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러자 규원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것도 설득이잖아.”
“대체 어디가.”
“영재야 잘 생각해 봐. 일종의 등가교환이라구. 주현이 언니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스터디부에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 완벽하게 성립하지 않아?”
“야. 그건 설득이 아니고 협박이지.”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이런 황당무계한 발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규원아. 그건 아냐.”
고개를 가로젓는 윤희는 나보다는 비교적 침착한 태도였다.
“이만하면 완벽하지 않아?”
““아니.””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부정했다.
“쳇.”
규원이가 혀를 찼다.
“그렇게 했다간 오히려 일만 더 커질 거야.”
윤희의 일리 있는 지적에 규원이는 억지를 부리는 대신 복어처럼 볼을 잔뜩 부풀렸다.
“만약에 이거 말고 방법이 없으면 어떡할 건데?”
불퉁스레 질문하는 규원이.
“그때는…….”
잠깐 고민을 하고 나서 답했다.
“그렇게 할 거야.”
주현 선배를 스터디부로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 * * *
점심시간에 셋이서 나눴던 대화로는 아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건졌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를 설득해야 된다는 것.
종례가 끝나자 우리는 가방을 매고 스터디부로 향했다. 뒤이어 지아 누나도 스터디부에 도착했다.
“영재야.”
“네.”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은 지아 누나가 다가왔다. 손에 종이 한 장을 쥐고 있었다.
“이게 뭐에요?”
“주현이가 대신 부탁하더라구.”
종이를 내미는 지아 누나의 얼굴빛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받아보니 탈퇴 신청서였다.
여기에 부장과 담당 교사의 사인만 받으면 주현 선배는 공식적으로 스터디부에서 탈퇴하게 된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건 일단 따로 보관해 둘게요.”
누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을 서랍장의 빈공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우리 대책 회의하자.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 아니잖아.”
누나의 요청에 우리는 만장일치로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단 중요한 건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를 설득하는 것 외에는 해결 방안이 없다는 점이에요.”
나는 이번 사태의 뿌리를 강조했다.
“이거 내가 점심시간 때 말한 거다?”
규원이가 자랑스레 웃으며 지아 누나에게 자랑했다.
이후로 우리는 각자 생각하는 방안들을 테이블에 올렸다.
규원이는 주현 선배 납치(?)건을 제창했다. 당연히 만장일치로 기각.
지아 누나는 같은 반 친구라는 입지를 이용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접점이 약하다고 판단하여 보류.
윤희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난 조금 더 생각해 볼게.”
그렇게 내 차례가 되었다.
“단체로 방문해 볼까요?”
“그건 너무 민폐일 것 같은데. 우리를 환영해주지도 않을 것 같고.”
“제 생각에도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아요. 기숙학원을 몰래 나오도록 만든 게 우리들 때문이니까요.”
지아 누나의 염려에 동조하는 윤희. 결국 이것도 기각되었다.
“으음. 어렵다, 어려워.”
규원이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정말로 손 쓸 도리가 없는 걸까?
“근데 지아 언니. 주현이 언니는 스터디부 안 오면 뭘 한데?”
“엄마가 과외 시킬 거라고 했어.”
“아하. 그렇구나.”
규원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나 말대로라면 주현 선배는 학원을 다니는 것도 모자라 과외까지 하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그때 갑자기 윤희가 짤막한 감탄사를 내던졌다.
“아!”
그러자 모두가 윤희를 향해 이목을 집중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
그러더니 윤희가 검지를 세우고 내 미간을 가리켰다.
“네가 과외를 하러 다니는 건 어때?”
“어?”
예상을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