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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 97화­파고드는 타이밍(7) (97/131)

〈 97화 〉 97화­파고드는 타이밍(7)

* * *

그로부터 5분 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41번 버스 오려면 10분 더 기다려야 하네.”

지아 누나가 정류장 옆에 세워진 전광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고, 정류장 근처의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왔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벤치에 걸터앉았다.

“근데 영재야. 아까 무슨 얘기하려고 했어?”

옆을 돌아보자 누나가 눈꺼풀을 두 차례 깜빡거렸다.

“어떤 거요?”

짐짓 모른 체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까 너희 어머니께서 나만 괜찮다면, 이러고 말 끊었잖아.”

“맞춰볼래요?”

나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구나, 우리 영재가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나.”

누나가 나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이래도?”

나는 신속하게 누나와 거리를 벌렸다.

“워워. 폭력이 모든 사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양손을 내저었더니 다행히 누나가 금세 주먹을 내렸다.

“폭력이라니. 날 뭘로 보구. 내가 얼마나 상냥한데.”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는 양 새하얀 웃음을 그리는 지아 누나.

“아니, 조금 전에 주먹 들어 올렸잖아요. 누가 봐도 때리기 직전이었구만!”

목소리 높여 항변해도 누나의 방어막은 튼튼했다.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 같은데. 왜 주먹을 들어 올리는 행위만으로 거기까지 상상을 하는 걸까? 혹시 영재 너, 마조?”

“절대 아녜요!”

내 정체성을 이상한 쪽으로 오해받을 수야 없지.

“그럼 말고.”

이번에도 누나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군.

누나랑 단둘이 있으면 항상 이렇게 되고 만다.

짤막한 한숨을 내뱉다가 이내 누나를 따라 키들키들 웃었다.

“그러니까 말해 줘. 아까 무슨 말하려고 했는지.”

“맞춰보세요.”

빼앗긴 주도권을 도로 가져왔다.

“보기 없어?”

“주관식입니다.”

낮은 음성으로 단언하자 지아 누나가 입가를 문지르며 침음을 흘렸다.

“힌트 좀.”

누나가 애교 섞인 눈빛을 보내왔다. 솔직히 이건 반칙이지.

나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원래 안 주려고 했는데 딱 하나만 줄게요.”

“생색내기는.”

불만을 드러내는 표현이었지만, 정작 누나의 표정은 기대감으로 들어차 있었다.

“마트. 더 이상은 없어요.”

“근데, 이거 맞추면 포상 같은 거 있어?”

“당연히 없죠.”

가슴을 펴고 당당히 선언하자 누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밝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이미 포상을 받았네.”

누나의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심장이 난리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솔직히 놀라기도 했는데, 안아줘서 좋았어.”

누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누나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답 말할게. 마트에 오라고 하신 거지?”

역시나 그 힌트는 강력했군.

“맞아요.”

나는 시원스레 고개를 움직였다.

“언제 오든 괜찮다고 했어요.”

“오! 진짜?”

누나가 자신의 양손을 맞댄 채 기쁨을 표출했다. 그러더니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영재야, 가자. 난 지금이라도 괜찮아.”

그대로 두면 진짜로 마트로 가버릴 것 같아서 누나의 손을 붙들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잖아요. 다음 기회에 가요.”

“진짜, 이런 건 빨리 얘기해 줬어야지.”

조금 전까지는 환했던 얼굴에 금세 먹구름이 드리웠다.

“슬기가 듣는 자리에서 말하기엔 좀 그래서…….”

때마침 굉음과 함께 41번 버스가 정류장 앞에서 정차했다.

지아 누나가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음에 오면 마트 먼저 들른다고 약속해.”

“꼭 그렇게 할게요.”

누나는 나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나서 버스에 올랐다.

* * * *

다음날. 금요일이자, 여름방학 중 마지막 스터디부 활동일이 밝았다.

나와 윤희, 규원이, 지아 누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개학 생각하니까 집중이 안 돼…….”

규원이가 기운 빠진 목소릴 내며 책상 위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얼마나 풀었는지 한 번 보자.”

내 한 마디에 엎어졌던 규원이가 다시 머리를 들고 문제집을 내밀었다.

“한 페이지라…….”

여름방학 내내 정해준 분량만큼 잘 풀어오더니 이번 주 들어 통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잘 따라왔잖아. 힘들어?”

규원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개학이 다가오니까?”

“으으.”

질색하며 몸서리치는 규원이.

“말고도 모의고사랑 중간, 기말도 있잖아.”

“뭐, 그건 전국의 고등학교가 동일하지.”

윤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말야……. 싫은 건 싫은 거라구. 윤희 넌 안 그래?”

규원이가 날린 질문에 윤희가 손으로 턱을 감싼 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개학이? 아니면 시험?”

“둘 다!”

“음, 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서. 개학하는 건 마음이 조금 아프지만 피할 수 있는 현실은 아니잖아.”

“어, 저기……. 너무 현실적이지 않니?”

반응을 보아하니 저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군.

반면 팩트로 어퍼컷을 날린 윤희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릴 따름이었다.

“길고도 짧은 방학이었어.”

그 목소리에서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규원이도 그것을 알아챘는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왜 나이를 먹을수록 방학이 짧아지는 거야! 놀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은데…….”

“그건 모두가 그렇지.”

입을 연 사람은 지아 누나였다. 규원이가 목을 돌려 지아 누나와 눈을 마주했다.

“언니도 아쉽지? 응?”

이쯤 하면 동의를 구걸하는 수준인데.

“그건 당연하지. 천하의 영재라도 아쉬울 걸?”

말과는 달리 누나의 표정에서 그러한 기색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내게로 넘어온 배턴. 그 말인 즉 나 또한 규원이의 사정권에 들어왔다는 것.

“영재야, 영재야. 넌 개학하니까 좋지?”

“왜 나한테는 질문 내용이 다르냐?”

“그야, 너니까.”

규원이는 당연한 걸 왜 구태여 묻냐는 어투였다.

“나도 놀 때는 노는 사람인데.”

“그렇긴 한데, 역시 이미지가 있으니까. 공부 벌레 이미지.”

참 이상하게도 공부 벌레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노는 것보단 공부가 더 좋잖아. 그치?”

“음.”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몬아미 볼펜의 노크로 턱을 쿡쿡 찔렀다.

“설마, 아니야?”

침묵이 길어지자 규원이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공부 그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내 나름 인생 목표가 있거든.”

“오오! 왠지 멋져 보이는데.”

규원이가 흥분하여 목청을 올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윤희는 낮은 감탄사를 흘렸다.

“궁금한데?”

누나가 고개를 약간 내뺐다.

“누구한테 들려줄 만큼 멋진 건 아녜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하자 누나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목표가 있는 것 자체로도 이미 멋진 거야.”

누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언니 말이 맞아! 나는 아직 그런 거 머리 아파서 생각 안 하고 있거든!”

그건 당당하게 말할 거리가 아닌데 말이지.

하지만 지극히 규원이다워서 지적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직은 미래에 무얼 할지 잘 모르겠어. 실감이 안 나거든.”

“그치, 그치?”

윤희의 동조에 규원이가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규원아. 그게 자랑거리는 아니잖아.”

“음. 그렇긴 하지.”

지아 누나의 지적에 규원이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앞으로 30분 후에 점심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할 거야?”

무심하게 툭 내던진 질문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었다.

“영재 넌 생각한 거 있어?”

누나의 물음에 나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누나는요?”

“비빔냉면.”

즉답이었다.

윤희는 사부웨이의 샌드위치를 선택했다.

“규원아. 넌 어차피 떡볶이지?”

그러자 규원이가 검지 손을 까딱거리며 노노를 읊조렸다.

얘가 웬일이지?

“후후후.”

요상하게 웃으면서 규원이가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최근에 책을 하나 봤거든.”

“네가 웬일이야?”

책이라는 키워드에 반응한 윤희를 내버려둔 채 규원이가 자신의 말을 이었다.

“거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고. 사람은 살면서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고. 그러니까 난 오늘 떡볶이가 아냐.”

확고한 의지가 담긴 듯한 선언. 양옆에서 탄사가 흘러나왔다.

우리 규원이에게서 이런 일면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러면?”

윤희가 사뭇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규원이가 다시 후후, 하고 거만한 웃음 소릴 냈다.

“내 선택은, 김밥극락의 라볶이!”

“…….”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자 규원이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왜? 떡볶이에서는 벗어났잖아.”

“그게 그거잖아.”

나의 지적에도 규원이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라면 사리가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데!”

그럼 그렇지.

우리 셋은 한마음 한뜻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활동을 마쳤다.

여름방학 스터디부 활동 마지막 일이니 빨리 파하자는 규원이의 요청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교정을 나섰을 때 이제 막 4시가 된 참이었다. 원래 마치는 시간보다 무려 2시간이나 이른 시각.

우리는 경사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두 발짝 앞선 채 열심히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주제는 화장품 관련이었다.

“넌 저런 거 관심 없어?”

넌지시 물어보자 윤희가 엄지로 턱을 살며시 누르며 신음했다.

“없는 건 아닌데, 낄 만큼 많이 아는 것도 아니라서.”

하긴 사람마다 관심사는 다 다르니까.

어느덧 경사로를 다 내려왔다.

“잘해 봐.”

윤희가 나를 바라보았다. 주어가 없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영재야. 오늘도 같이 갈까?”

지아 누나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윤희는 눈치껏 규원이를 데리고 집 방향으로 향했다.

“오늘도 슬기 보고 싶어서요?”

누나가 머리를 좌우로 움직인 뒤 슬며시 웃었다.

“너네 아주머니께 인사 드릴려구.”

그 얘기 꺼낸 지 24시간도 안 지났는데요?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누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언제든 괜찮다고 하셨다면서?”

그러면서 눈을 두어 차례 깜빡거렸다.

“네. 그랬죠.”

여하간 이 누나의 행동력 하난 알아줘야 한다.

우리는 41번 버스에 탑승했다. 집 근처 정류장에서 하차하고 나서 10분 정도 걷자 엄마가 일하는 마트에 도착했다.

“아, 갑자기 떨려.”

누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잠시만요.”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머지않아 엄마가 과자 진열대에 과자를 채워 넣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누나. 저 따라오세요.”

그러면서 누나를 향해 손을 내밀려다가 금세 되돌렸다.

아직은 거리낌 없이 손을 잡기가 쑥스러웠다.

어제 포옹까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기를 부린 결과였으니까.

그 기색을 알아차린 누나는 입가를 슬쩍 휘며 웃었는데, 쓴웃음처럼 보였다.

우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

가까이서 부르자 엄마가 어깨를 흠칫했다.

“깜짝아.”

“앗.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엄마가 장갑 낀 손을 탁탁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지아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네가 정지아구나?”

“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지아 누나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영재 여자친구라며?”

“아 엄마! 아니랬잖아.”

내가 옆에서 열심히 부정해도 엄마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아…….”

누나가 입을 벌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엄마의 발언에 꽤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너처럼 어여쁜 여자친구라면 언제라도 환영한단다.”

엄마의 사근사근한 음성.

“아, 네……. 노력할게요.”

누나, 뭘 노력하겠다는 거예요.

마트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 넘치던 사람이 부끄럼을 타고 있으니 나름대로 신선했다.

“미안해서 어쩌니. 원래라면 집에서 잘 대접해줘야 하는데.”

“아, 아니에요. 제가 한 번 뵙고 싶다고 영재한테 말해서……. 일하시는데 죄송해요.”

“다음에 내가 쉴 때 놀러 오렴.”

엄마의 눈썹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네. 꼭 그럴게요!”

누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엄마는 원래 하던 일로 되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우리는 마트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슬기 보러 올 거예요?”

누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용돈을 못 받았거든. 요 며칠 씀씀이가 너무 헤퍼졌다면서 한동안 안 주겠대.”

“몸만 와도 괜찮아요.”

“슬기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진짜 괜찮은데…….”

하지만 지아 누나는 끝끝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대략 3분 정도 기다리자 버스가 도착했다.

“누나, 조심히 들어가요.”

“응, 너도.”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아 누나가 버스 좌석에 앉자 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버스의 뒤꽁무늬를 보며 생각했다.

지아 누나가 그런 식으로 여기는 게 좀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이런 얘길 한들 누나는 분명 듣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선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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