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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 96화­파고드는 타이밍(6) (96/131)

〈 96화 〉 96화­파고드는 타이밍(6)

* * *

누나를 배웅하고 돌아왔더니 그 사이에 엄마가 집에 와있었다.

“아들. 어디 갔다 왔니?”

“잠깐 친구 배웅하러.”

모호하게 둘러댔다.

지아 누나가 왔다고 얘기했다간 엄마가 지대한 관심을 보일 게 분명하니까.

우리 아들이 드디어 이성에게 관심이 생겼니, 라고 반응할 것이다.

나는 그런 관심을 받는 일이 좀 쑥스러웠다.

“엄마아. 여기.”

슬기가 밥상을 차린 뒤 엄마와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슬기가 밥상머리에 폭탄을 터뜨렸다.

“엄마! 오늘 우리 집에 진짜로 이쁜 언니가 왔었어.”

“이쁜 언니라니?”

엄마가 놀라며 반문하더니 곧장 나를 불러들였다.

“아들. 잠깐만 이리로 오렴.”

엄마의 손짓에 나는 마지못해 밥상 앞에 앉았다.

“아까 배웅한 친구가 슬기가 말하는 이쁜 언니니?”

“아! 그리고 지아 언니가 울 오빠랑 사귄대!”

슬기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두 번째 폭탄까지 터뜨렸다. 그러자 엄마의 눈썹이 반원을 그렸다.

미리 슬기의 입단속을 시켜놓았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었다.

“언제부터 사귀었니?”

엄마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되게 부담스러운 시선.

“어떤 애인지 궁금하네. 이름이 지아라고?”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야. 이름은 정지아고. 스터디부의 멤버 중 한 명인데, 절대로 그 이상의 관계는 아냐.”

딱 잘라 말했으나 슬기가 가만 있지 않았다.

“엥? 하지만 언니는 오빠랑 데이트도 했던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했잖아.”

“슬기는 그렇다고 하는데?”

엄마의 눈동자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나는 지난날을 잠시 되짚어보았다.

지아 누나와 우연히 둘이서 만난 일이 몇 번 있었다. 며칠 전에는 발레공연을 보자는 명목으로 하루종일 같이 놀았고.

……빼도박도 못하게 데이트잖아?

“그러니까 슬기가 말하는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지아 누나가 괜히 농담으로 한 얘기고 실제로는 그냥 친한 선후배, 친구 사이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명확히 정리했다.

하지만 엄마의 입꼬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슬기는 영 납득이 가지 않는지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치만 오빠, 언니랑 엄청 친해 보이던걸? 서로 장난도 치구.”

“친구끼리 장난치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어……. 응, 그렇기는 한데…….”

슬기가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엄마가 입술을 벌렸다.

“아, 그런 사이구나. 엄마는 알 것 같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뭐가?”

“그 아이, 너에게 마음이 있을지도?”

엄마가 내 또래 여자애들처럼 해맑게 웃었다.

“에이. 남녀 사이에 꼭 정분이 나야만 된다는 법도 없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니. 나중에 소개해줄래? 어떤 애인지 궁금하네.”

“엄마엄마, 지인짜 예뻐! 깜짝 놀랄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슬기가 호들갑을 떨며 두 엄지를 치켜세웠다.

뭐, 솔직히 우리 누나가 오버할 만큼 예쁘긴 하지.

“그래? 얘기 들을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 아들, 혹시 사진 있어?”

“그렇게 궁금해?”

“당연하지.”

엄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서 지아 누나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와! 진짜네.”

엄마가 놀라워하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도, 나도.”

슬기가 엄마 옆에 찰떡같이 달라붙어서 사진을 감상했다.

“됐지? 이제 줘.”

엄마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음에 놀러 오면 엄마 일하는 마트에 데리고 오렴. 미래의 며느리에게 미리 인사해둬야 하니까. 알겠지?”

장난기 가득한 윙크를 날려 보내는 엄마.

“아니, 엄만 또 왜 그래. 그냥 친구 사이라니깐.”

소리 높여 항변해도 엄마의 미소는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슬기는 좋아라 하고 있고…….

“아 몰라, 나 이제 샤워할 거야.”

“그러렴.”

엄마가 수저를 드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찬물 샤워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아이, 너에게 마음이 있을지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뜨끔했다.

단둘이 발레공연을 보러 갔던 그 날, 지아 누나가 좋아한다고 고백해 왔으니까.

강렬하게 들어온 한 방.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부러 의식하지 않을 뿐.

아직은 이대로 지내는 게 마음 편하고 좋기도 하고.

게다가 미래의 결말을 어떻게 할지 정해두었으니까.

모든 걸 다 챙길 수는 없다. 그건 과욕일 뿐이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인생 목표를 고를 것이다.

중간에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다.

책상 앞에 자릴 잡고 문제집을 펼쳤다.

스마트폰은 공부에 방해가 되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내려놓기가 무섭게 깨톡 수신음이 울렸다.

윤희 : 지아 언니랑 어땠어?

겉으론 관심 없는 척하더니 꽤나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윤희만이 아니었다.

규원 : 영재야아~~울언니랑 잘되가????

둘다 개인 톡.

나는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무어라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 : 그냥 재밌게 놀았어.

뭐 이런 대답이 다 있나 싶지만 일단은 이렇게 하는 걸로.

나는 두 사람에게 똑같은 답신을 보냈다.

그때 지아 누나에게서 개인톡이 왔다.

지아 누나 : 내일도 슬기보러가도 될까??

누나의 공세는 여전히 거침없었다.

* * * *

다음날 오전.

나는 누나를 마중하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지아 누나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있었다. 다가가서 인사하자 누나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영재야아. 빨리 슬기 만나고 싶어.”

“원래 아침잠이 많은데 누나 온다고 하니까 바로 일어났어요.”

“그래?”

누나가 무척 기뻐했다.

“그런데 저는 별로 안 보고 싶었나 봐요. 깨톡에 슬기 얘기만 하고.”

약간 서운한 티를 내자 누나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덤이지, 덤.”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 뒤 누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는 누나 엄청 보고 싶었는데…….”

순간 지아 누나의 눈썹이 움찔했다.

“라고 하니까 역시 놀라네요.”

짖궂게 웃자 지아 누나가 샐쭉한 표정을 지은 채 내 어깨로 주먹을 날렸다.

힘을 뺀 펀치여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픈 시늉을 하며 누나와 거리를 벌렸다.

“너 자꾸 누나 놀리면 못 써.”

“누나도 저 놀리잖아요. 피차일반이라구요, 피차일반.”

“으음, 그러고 보니…….”

다행히 항변이 먹혀들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편의점이 보이자 누나가 잠깐 들르자는 얘기를 꺼냈다.

“나 어제도 용돈 받았거든.”

지아 누나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과자 사 들고 가면 슬기가 좋아할 거 아냐.”

“어제도 얻어먹었는데 오늘도 그러기는 좀…….”

손사래를 쳐가면서 거절했다.

이렇게까지 신세 지는 게 너무 미안하니까.

더구나 지아 누나가 나에게 무언가를 사준 적도 한두 번도 아니고.

누나는 내 손목을 잡더니 천천히 아래로 끌어당겼다.

“다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진지한 눈빛이 진실성을 더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하고 얌전히 누나를 따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영재야. 바구니 들어.”

“넵.”

쇼핑 바구니를 팔에 건 뒤 집사마냥 누나의 뒤를 따라다녔다.

어제와 비슷하게 음료수와 과자 위주의 쇼핑이었다,

“슬기는 단 거 좋아하지?”

과자 코너 앞에서 지아 누나가 질문을 던졌다.

“꼭 단 거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가재깡이나 자갈침 같은 거요.”

“오케이. 알겠어.”

과자를 하나둘 넣다 보니 쇼핑 바구니가 금세 가득 들어찼다.

“이만하면 되겠지?”

“엄청 많은 것 같은데요…….”

내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가는 것에 반해 누나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다 합해서 20,570원이 나왔다.

“여기요.”

지아 누나가 지갑에서 꺼낸 5만원권 지폐를 당당하게 내밀었다.

형준이 못지않은 박력!

거스름돈을 돌려받은 누나가 비닐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원래 물주는 짐 안 드는 거 알지?”

“물론이죠.”

흔쾌히 봉투를 받아들었다. 형준이 녀석도 곧잘 하는 소리니까 매우 잘 알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자 슬기가 얼른 현관 앞으로 달려왔다.

“우와아아, 언니! 어서 와!”

우리가 아니라 지아 누나만 반겨주는군.

“과자도 이렇게나 많이!”

슬기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나는 과자보다도 못한 취급이네.

“슬기야, 나는?”

검지로 나를 가리키자 슬기가 그제야 눈길을 돌렸다.

“그래. 오빠 왔네.”

착 가라앉은 목소리.

그래. 매일 보는 오빠인데 지아 누나만큼 반가울 리가 없지.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내가 아니다.

“슬기야. 지아 누나가 널 생각해서 사온 거야.”

“이 언니가 힘 좀 썼어.”

옆에서 지아 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네가 들어야겠지?”

“듣고 보니 그렇네.”

슬기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비닐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흔쾌히 그것을 슬기에게 넘겨주었다.

“헉!”

내 손에서 중량감이 빠져나가자마자 슬기가 숨을 삼켰다.

1.5리터 들이 페트병 두 개와 그 외 간식들의 무게가 더해졌으니 무거울 만하지.

“그거 부엌에 갔다 놔.”

“으, 응.”

슬기가 힘겹게 고개를 움직인 뒤 부엌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너 동생한테 너무한다.”

옆으로 돌아보니 지아 누나가 책망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오빠보다 과자를 더 반긴 벌이죠, 벌.”

“쫌생이.”

나는 누나와 함께 거실 한가운데에 앉았다. 잠시 후 짐을 갖다 놓은 슬기가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후우. 힘들었다.”

쟨 왜 땀도 한 흘렸으면서 이마를 문질러대는 거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아유. 우리 슬기. 고생 많았어.”

지아 누나는 그런 모습마저 귀여워했다. 누나가 양팔을 벌리자 슬기가 그대로 안겨들었다.

……솔직히 좀 부럽네.

내가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나가 돌연 나를 쳐다봤다.

“너도 올래? 나 오는 사람 거부 안 하는 주의거든.”

그러자 슬기가 웬일로 눈치껏 포옹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나, 난 안 볼게.”

부끄러운지 아예 반대 방향으로 몸을 홱 돌렸다. 어째 기류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판은 다 깔렸네. 자, 어서.”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 누나가 오라고 손짓했다.

아마 이번에도 장난치려는 거겠지.

분명 지아 누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쑥스러움을 못 이기고 물러날 것이라고.

그러면 누나는 농담으로 한 소리였다며 깔깔 웃을 테지.

“누나가 먼저 말 꺼냈어요.”

보험을 달아놓았다. 그러고 나서 누나에게 다가가 포옹을 했다.

“어…….”

당황했는지 몸을 움츠리는 누나. 하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고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 손에, 내 품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이 묘한 기분을 일깨웠다.

더 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누나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을 얼른 풀었다.

신호를 이해한 누나 역시 내 어깨에서 팔을 빼냈다.

살짝 벌어진 거리. 자연히 마주치는 시선.

누나가 그윽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자각을 했다. 입을 떡 벌린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나에게 누나가 다가왔다.

“보기보다 대담한걸?”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나를 상대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을 새삼 체감하면서.

* * * *

우리는 어제와 비슷하게 과자와 음료수를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고, 카드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리고 누나의 제안으로 모두다 마블이라는 게임도 했다. 결과는 당연히 누나의 연전연승.

“고인물…….”

흘겨보았지만 그럴수록 누나는 더더욱 승리자의 여유를 만끽할 뿐이었다.

어느덧 누나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언니이! 오늘도 재밌었어요!”

“나도 즐거웠어!”

현관에서 인사를 나눈 두 사람.

나는 지아 누나를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우리 듬직한 멸치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누나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거기서 멸치는 빼야 폼이 나죠.”

“그래도 멸치는 멸치인걸?”

반박할 거리가 없어진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땅거미가 자신의 영역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었다.

“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아주머니는 어떤 일을 하셔?”

“우리 엄마요?”

돌아보자 고개를 끄덕거리는 누나.

이제와서 숨길 게 뭐 있으리.

감추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외려 마음이 편해졌다.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일해요.”

“여기서 얼마나 걸려?”

“한 10분 정도 걸으면…….”

“그렇구나.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알고 싶었거든.”

“아하.”

나는 납득했다는 의미로 목을 움직였다.

친한 사이끼리 그 정도는 충분히 궁금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제 우리 엄마가 누나만 괜찮다면 한 번…….”

나란히 서서 걷던 누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움직여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알고 싶어.”

맥락을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내뱉더니 그대로 검지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향하고 있는 지점에 내가 서 있었다.

“너에 대해.”

말을 끝맺은 누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누나의 적극 공세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듯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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