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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화 〉 95화­파고드는 타이밍(5) (95/131)

〈 95화 〉 95화­파고드는 타이밍(5)

* * *

생각지도 못한 지아 누나의 폭탄 발언에 슬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데, 데이트요?”

슬기가 볼륨이 한껏 올라간 목소릴 냈다.

“응.”

정작 원인 제공자는 태평스레 고개를 움직일 따름이었다. 슬기가 나에게 말똥말똥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 오빠가 드디어…….”

양손을 맞잡고 감격스러워하는 모습.

조금만 더 놔뒀다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아니, 누나. 그렇게 말하면 애가 오해하잖아요.”

“응? 그래애?”

지아 누나는 이 상황이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슬기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슬기야. 우리 그렇고 그런 사이란다?”

누나가 검지 손을 입술에 살며시 갖다 댄 채 윙크를 발사했다.

“거기서 쐐기를 박으면 어떡해요!”

당황해서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 영재가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걸까아.”

그 와중에 누나가 더욱더 대담한 공세를 펼쳤다. 바로 팔짱 끼기!

이참에 아예 밀어붙이려는 모양새.

팔에 부드러운 감촉을 지닌 무언가가 닿았다. 그걸 눈치챈 순간 나는 돌처럼 굳었다.

이것은, 남자에게만 통한다는 치명적인 흉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하면 안 된다!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눈을 떴다.

누나는 이쪽을 빤히 바라본 채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응 귀엽다.”

그러더니 스르륵 팔을 풀었다.

방금 건 진짜로 위험했다니까.

“우와아…….”

돌아보니 슬기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동자만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그렇고 그런 사이…….”

중얼거리던 슬기의 볼이 돌연 붉게 달아올랐다. 저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러고 보니 지금 슬기 나이가 딱 그럴 때구나.”

“그래봤자 아직은 애죠.”

“애라니! 나도 알 건 다 알거든.”

슬기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토했다.

지아 누나는 그 모습을 보더니 표정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아기들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자 고개를 홱 돌리는 누나.

“후후. 이 누나의 수비 범위는 네 생각보다 넓다구?”

저기, 야릇하게 웃으면서 그런 말씀하시면…….

누나의 관심이 다시 슬기에게로 돌아갔다.

“슬기야. 편하게 불러. 지아 언니라고.”

“아, 네……. 지아 언니…….”

개미 기어가는 듯한 음성이 가늘게 이어지다 끊겼다.

슬기가 이렇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부끄러움 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니 좋은 사람이야.”

누나가 허리를 숙여 슬기와 눈을 맞췄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지원사격에 나섰다.

“누나가 진짜 좋은 사람이야.”

운을 떼고 누나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고, 가끔 이유 없이 때리기도 하는데, 아무튼 좋은 사람이야.”

“진짜, 요?”

슬기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얼른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 누나. 그러더니 옆에 서 있던 내 팔뚝을 퍽퍽 때렸다. 원체 손이 맵다 보니 진짜로 아팠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슬기야 봤지, 봤지? 이런다니까.”

“너 일루 와.”

누나가 검지 손을 까딱거렸지만 그런다고 다가갈 내가 아니지.

그때 슬기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린애 같은 장난을 멈추고 슬기에게 다가갔다.

“아이, 재밌어.”

슬기가 여전히 웃는 상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누나의 표정이 환해졌고, 내 얼굴도 마찬가지로 밝아졌다.

“그러게요.”

“응.”

누나가 고개를 끄덕거린 뒤 내 팔뚝을 기습적으로 때렸다.

“악! 왜 때려요!”

“그냥.”

두 발짝 물러선 나를 보며 누나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군.

슬기가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나와 지아 누나를 번갈아 보았다.

“언니! 우리 오빠 스터디부에서 어때요? 공부밖에 안 하죠?”

“응. 공부밖에 몰라.”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누나가 긍정했다.

“집에서도 그러지?”

“네!”

둘이서 쿵짝이 아주 그냥 잘 맞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난 뒤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슬기야. 오늘 늦게 올 거라고 하지 않았어?”

“응. 원래라면 좀 더 놀려고 했는데…….”

슬기의 표정이 점점 시무룩하게 변했다.

“친구가 갑자기 가족들이랑 좋은 식당 간다구 해서 빨리 오게 됐어. 걔 너무 부러워……. 나도 외식하고 싶어.”

“아, 그래서.”

외식이라.

솔직히 부럽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제일 현명한 처사라는 점을 알기에 별로 내색하지 않는다.

“슬기야!”

누나가 갑자기 슬기의 양손을 낚아채듯이 맞잡았다. 그 바람에 슬기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네, 네.”

“우리도 외식 가자.”

아무래도 슬기의 발언이 누나의 스위치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외식요?”

그 단어를 발음하던 슬기의 표정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저대로 두면 무작정 고개를 끄덕거릴 것만 같아서 제지에 나섰다.

“누나. 안 그래도 돼요. 편의점에서 먹을 거 좀만 사도 충분해요.”

하지만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슬기가 외식하고 싶다잖아.”

“그렇기는 한데…….”

말꼬리를 늘어뜨리면서 슬기 쪽을 곁눈질했다. 세상 무엇보다 간절한 얼굴.

누나가 내 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차피 내가 사려고 했잖아. 기왕에 슬기 소원이나 들어주려고.”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미안해서요.”

나도 따라서 소리를 내리깔았다.

“에이.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

누나가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네. 그렇게 해요.”

“슬기야. 네 오빠도 좋대.”

누나의 발랄한 음성에 슬기가 두 팔을 벌리고 방방 뛰었다.

그렇게나 가고 싶었던 걸까.

나는 슬기를 보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 * * *

우리가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중화반점이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중 하나였다.

저녁 시간대였지만 가게 안은 한산했다. 우리는 선풍기와 가까운 자리에 착석했다.

“뭘로 할까?”

세 사람 중 가장 지갑이 두둑한 분이 의견 수렴에 나섰다.

나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었다. 자장면이 4천원.

예전에는 3천원이었는데…… 많이도 올랐군.

“음.”

행복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긴 슬기.

“슬기야.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시켜. 언니가 어제 용돈 많이 받았거든.”

“진짜요오?”

슬기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나는 진정하란 의미로 슬기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슬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욕망대로 내지르고 말았다.

“그럼, 저 탕수육요!”

맙소사!

“야! 그렇게 비싼 걸 시키면 어떡해. 누나 그건 취소예요.”

슬기의 볼때기를 잡아당긴 채 수습하려고 했다.

누나는 턱을 괸 자세로 눈썹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슬기가 초음파를 발사하며 버둥거렸다.

“이제 놔 줘. 아파하잖아.”

조금 오래 쥐고 있긴 했네.

놓아주자 슬기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리고 나도 탕수육 먹고 싶었는데 잘됐네. 하나 하자.”

누나의 경쾌한 어조에 슬기가 볼을 문지르다 말고 쾌재를 불렀다.

“와! 언니 멋져요! 우리 오빠보다 훨씬 나아.”

“그치? 이참에 언니 동생할래?”

“네에. 네!”

저기요 누나. 호적을 멋대로 파내려고 하시면 안 되죠.

내 시선을 알아챈 지아 누나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면서 슬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재 넌 뭘로 할 거야?”

여전히 슬기의 머리를 매만지며 누나가 질문했다.

“무난하게 자장면 하나 하죠, 뭐.”

“곱빼기?”

“그러면 남겨서 안 돼요.”

“아! 언니.”

슬기의 부름에 지아 누나가 고개를 부드럽게 돌렸다.

“하나만 더 해도 돼요?”

눈빛에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어떤 거?”

슬기야 제발……. 나는 옆에서 슬기를 예의주시했다.

“군만두요.”

애석하게도 슬기는 내 시선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 먹을 수 있어?”

“저 엄청 배고파요!”

해맑음의 극치로구만.

“좋아. 그것도 하자.”

지아 누나가 이번에도 흔쾌히 수락했다. 오늘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하느님 모드인가.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 주문할 메뉴가 정해졌다.

누나는 짬뽕. 나와 슬기는 자장면. 추가로 탕수육과 군만두까지 더 했다.

주문을 접수한 아주머니가 메뉴판을 챙겨서 돌아갔다.

나는 누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많지 않을까요?”

“남은 건 포장해가면 되지.”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오? 그러면 내일 아침에도 탕수육이랑 만두 먹을 수 있는 거야?”

슬기가 입을 벌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응. 언니가 오늘 다 해줄게.”

“만세! 언니 짱! 진짜 이뻐요!”

엄지 두 개를 치켜세우는 슬기를 바라보면서 누나가 기쁜 듯이 웃었다.

누나가 우리 집에 오기 전에는 여러모로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막상 슬기와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헛걱정이었던 모양이다.

가끔은, 누나를 우리 집에 초대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재야. 오늘부터 슬기 내 여동생으로 삼아도 돼?”

“그건 안 됩니다.”

……약간은 경계해야겠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향해 바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 * * *

예상대로 탕수육과 만두가 남았다. 우리는 남은 음식을 포장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건 냉장고에 넣어둘게요.”

신발을 벗자마자 지아 누나가 성큼성큼 부엌으로 향했다.

“언니. 그거 진짜로 우리가 먹어도 돼요?”

슬기가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럼.”

“아아!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행복을 넘어 감격에 겨워하는 슬기.

“언니가 다음에 또 사줄게.”

지아 누나가 눈썹을 휜 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네에!”

슬기가 우렁차게 답하며 자신의 새끼손을 걸었다.

나는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손님을 TV 앞에 멍하니 앉아있게 하는 짓거리는 사양하고 싶으니까.

뭔가 놀 만한 게 없을까. 고민을 하는 동안 누나가 슬기와 함께 거실에 왔다.

그때 불현듯 트럼프 카드에 생각이 미쳤다.

“누나 잠깐만요. 뭣 좀 찾아봐야겠어요.”

“응?”

지아 누나의 시선이 의문부호를 띄웠다.

“같이 놀 만한 거요. 트럼프 카드. 그거 찾을 동안만 슬기 상대 좀 해주세요.”

나는 그 길로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아 누나가 내 뒤를 따라왔다.

“네 방이지? 구경해봐도 될까?”

누나가 자못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좋다며 같이 따라올 줄 알았던 슬기는 얌전히 앉아서 TV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배려라 이거지?

이미 우리 집에까지 온 마당에 방을 공개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네. 별 건 없지만요.”

흔쾌히 수락하고 방문을 열었다. 뒤이어 입장한 누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앉은뱅이 책상 앞으로 향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아 누나가 한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끔 뜻 모를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별 거 없죠?”

누나의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음. 그렇다고 해도 나, 또래 남자애 방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거든. 좀, 두근거리네.”

솔직한 감상을 내비치는 누나. 미소를 띤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정확히는 슬기랑 같이 쓰는 방이지만요.”

왠지 쑥스러워서 다시 책상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저긴 누가 봐도 네 책상이고.”

어느새 누나가 내 옆에 섰다.

“앉아봐도 돼?”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성큼성큼 책상 앞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턱을 괴어보고, 괜스레 책상 위를 쓰다듬었다. 어제 공부하다 만 교재를 펼쳐보기도 했다.

“여기서 수석이 탄생한 거구나…….”

누나는 신비로운 유물을 감상하는 양 조심스럽게, 그리고 느긋하게 내 책상을 만끽했다.

나는 그 옆에서 수납장을 열어보았다. 낡은 트럼프 카드가 그 안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진짜 대단하다.”

“어떤 게요?”

트럼프 카드를 챙기다 말고 지아 누나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그냥. 여러 가지로.”

“누나. 찾았어요.”

누나의 눈앞에 대고 트럼프 카드 통을 흔들자 즐거운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 좀 한다?”

“누나한테 절대로 안 질 거에요.”

우리는 거실로 돌아왔다. 슬기가 곧장 TV 전원을 끄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셋이 둥글게 모여서 카드 게임을 했다.

원카드, 도둑잡기, 훌라 등등. 정말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았다.

문득 벽시계를 바라본 누나가 숨을 삼켰다.

“헐. 생각보다 늦었네. 슬슬 돌아가야겠어.”

“언니이. 벌써 가?”

슬기가 아쉬움이 한가득 담긴 눈망울을 했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시니까. 다음에도 놀러 올게.”

누나가 슬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슬기는 못내 아쉬워했다.

누나가 현관에 서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봐.”

“누나! 바래다줄게요.”

바깥으로 나가려는 누나를 불러세운 뒤 황급히 신발을 구겨 신었다.

늦은 시간에 저토록 어여쁜 사람을 홀로 보냈다간 천벌 받을 테니까.

우리는 오후에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마워.”

“에이, 초대라뇨. 누나가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거지.”

농담을 건네자 누나의 손가락이 옆구리를 푹 쑤셨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누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우리는 곧 웃음보를 터뜨렸다.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목적지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버스가 금세 정차했다.

“누나 잘 가요.”

“바래다줘서 고마워. 돌아갈 때 조심하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서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계기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누나를 믿어도 될 것 같다고.

발을 놀리며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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