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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화 〉 94화­파고드는 타이밍(4) (94/131)

〈 94화 〉 94화­파고드는 타이밍(4)

* * *

“…….”

잘못, 들었나?

하지만 그렇게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똑똑히 들렸다. 심지어 거리도 가까웠고, 주변의 소음도 크지 않았다.

못 들었다는 변명이 통할 리가 없는 상황.

내 표정 변화를 알아챈 듯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안 될까?”

평소 같았으면 이미 수긍하고 말았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입술을 쉽게 떼지 못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갔다.

“우리 그동안 윤희네 집에도 놀러 갔고, 우리 집에도 와봤잖아. 자연히 네 차례도 오지 않겠어?”

설득에 나서는 누나. 나는 곧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게 따지면 아직 규원이네 집도 못 가봤죠. 주현 선배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절대로.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밝히고 싶지 않았다.

“마치 안 된다는 것처럼 얘기하네.”

“안 돼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대꾸였다. 내 귀에도 단호하게 들린 음성.

지아 누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놀라움을 드러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여태껏 내가 이 정도로 강한 어조로 말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지아 누나의 눈길이 나를 탐색하려는 듯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다.

“그건…….”

마음의 준비가 안 됐기 때문에요, 라는 문장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여기서 마음의 준비란 우리 집 형편에 대해 공개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발설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사게 될 것 같았다. 거절 사유로 내세우기에도 부족하고.

사실 이런 권유를 받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타이밍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햇다.

“정말로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얘기해 줄래?”

계속 망설인 탓일까, 누나가 아까보다 한발 물러섰다.

“이유, 요?”

“응.”

지아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얼른 대답을 내놓지 않자 누나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말해줄 수 없는 거야?”

“아, 아뇨. 그 정도는 아녜요.”

다행히 우물쭈물거리는 동안에 머리를 굴린 덕분에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 놓았다. 이제 남은 일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알려주는 것뿐.

“집이 여기서 꽤 멀거든요. 나중에 돌아갈 때 위험할 수도 있어요. 요새 밤길이 흉흉하잖아요.”

“우리나라 세계에서 치안 1위잖아. 그리고 버스 타면 되니까 크게 문제 될 일도 아니네.”

“또 지금 동생이 너무 어려서요. 다른 사람을 집에 불러들이기가 좀 그래요.”

그러자 지아 누나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동생 있단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 몇 살이야?”

“지금 2살이에요.”

슬기야 미안하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되니까 이해해 주길 바라.

지아 누나가 환한 표정을 지은 채 감탄했다.

“우와아. 엄청 귀여울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슬기가 귀엽기는 하지만, 아기 같은 귀여움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지.

“아기들 좋아하나 보네요.”

“그럼! 얼마나 천사 같고 귀여워? 하으으.”

지아 누나가 양손을 맞잡은 채 좋아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뒤 내 손을 잡았다.

“네 동생이랑 만나보고 싶은데 안 돼?”

간절함 가득한 눈망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좀 예상치 못한 반응인데…….

“아직 슬기가 예민해서요.”

“이름이 슬기구나.”

무심코 본명을 말해버렸지만 상관없겠지?

어차피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럼 가서 조용히 있을게. 눈으로만 구경해도 충분하니까.”

물러나게 하려고 했던 사유가 오히려 누나를 더 끌어당기는 꼴이라니.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갔다.

의도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만.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짜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서 곧잘 울어요. 달래기도 어렵고…….”

“나 달래는 거 잘해. 사촌 동생들 놀러 오면 곧잘 돌보고 그랬거든.”

지아 누나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좀 있으면 엄마도 돌아와요. 엄마가 집에 손님 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에게도 미안할 짓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아……. 그래?”

누나의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그러면, 어쩔 수 없겠네.”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다행히 히든카드는 먹혀들었군.

“누나. 대신 오늘은 다른 데 가서 놀아요. 누나 원하는 곳으로요.”

누나와 같이 노는 것 자체는 나에게 있어 매우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권유했다.

“진짜 아쉬운데…….”

지아 누나가 우리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럼 다음에 놀러 가도 돼?”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하지만 여기서 다음에도 안 된다고 대답하면 곤란해지는 쪽은 나였다.

이제 댈 수 있는 핑계 거리라 해봐야 같은 레퍼토리의 변용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선은, 지금 이 위기를 넘어가는 것에 집중하자.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미소 지은 얼굴로 응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대답이잖아?

핑계를 댈 수 있는 여지를 또 만들었으니까.

“진짜 갈 수 있음 좋겠어. 슬기 보고 싶다구.”

다음을 기약한 덕분에 지아 누나가 아까보다는 기운을 차렸다.

“그럼 미리 얘기해 주세요. 엄마한테 허락 맡아둘 테니까.”

그 허락이 절대로 떨어질 일은 없을 거지만요.

안전 장치는 전부 마련해 뒀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물론 들키지 않게 속으로만.

“지아 누나.”

부르자 누나가 나와 눈을 맞췄다.

“응?”

“먼저 더위라도 피하는 게 어떨까요? 카페라든가.”

손으로 커피를 들이켜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지아 누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타박스? 아니면 다른 곳?”

“익숙한 데로 가요. 스타박스.”

“콜!”

경쾌한 목소리로 외치는 누나.

우리는 스타박스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본 적 없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광고 전화나 보이스피싱 번호는 아니고.

“누군데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누나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아아. 모르는 번호라서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중에서 스마트폰은 계속 울부짖었다.

“일단 받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겠네요.”

받기 버튼을 터치하려는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잘못 걸린 건가 보네요.”

나는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나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시 벨이 울렸다.

화면에는 방금 전 보았던 번호가 떠 있었다. 두 번이나 같은 번호에 전화를 잘못 걸 리는 없을 텐데…….

“누나. 잠깐만요.”

이번에는 제대로 전화 받기를 터치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오빠?]

누군데 다짜고짜 오빠라고 하는 거지?

“누구신데요?”

목소리를 약간 깔았다.

[헐. 못 알아보네. 나 모르겠어?]

뭐지?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왠지 목소리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후후후.]

“누군지 말 안 하면 전화 끊을 거야.”

일부러 강경한 태도를 내비치자 저쪽에서 다급하게 목소릴 냈다.

[나라구, 한슬기!]

“어! 슬기라고?”

“슬기?”

옆에 서 있던 지아 누나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제야 엄청난 실책을 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망할…….

[오빠? 듣고 있어? 오빠아.]

그리고 이 심각한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슬기는 태평하게 오빠 타령을 했다.

“어, 어어. 그래. 근데 나한테 전화는 어떻게 한 거야? 집 전화번호가 아니던데.”

[지금 친구한테 빌렸거든.]

“아하. 그래서…….”

관자놀이를 찌르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야말로 좌불안석.

“근데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아아. 오늘 친구랑 늦게까지 놀 것 같아서. 저녁 먼저 먹어두 된다는 말 전하려구 했지.]

“그렇구나. 그래, 알겠어.”

[응. 그럼 이만!]

통화가 끝났다.

나는 새까만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했다.

“한영재.”

주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이 서늘한 목소리.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친해진 이후로 지아 누나가 내 이름을 성씨까지 붙여서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목구멍으로 침이 계속 넘어갔다.

“날 봐. 거기 보지 말고.”

차가운 명령에 나는 녹슨 기계처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금 슬기랬지?”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고작 2살밖에 안 된 애가 스마트폰을 쓰고 친구들하고 놀러 간다고?”

통화 소리가 누나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

유구무언. 입이 몇 개가 있든 짜낼 수 있는 말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실제론 몇 살인데?”

“……12살요.”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전화가 걸려와서는…….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털어냈다.

남 탓을 할 사안이 아니다. 전부 내가 자초한 일의 말로니까.

애초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이 오지도 않았을 테니.

지아 누나의 시선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그럴수록 점점 쪼그라들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하는 것.

“그건…….”

하지만 알면서도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 말할 수 없다 이거지?”

누나가 눈을 지긋이 감고 콧김을 내쉬었다.

나는 목소리를 낼 수도,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아 누나가 팔짱을 풀고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아주머니 진짜로 지금 돌아오셔? 거짓말 말고.”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저었다.

“진짜지?”

재차 묻는 말에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지아 누나가 입김을 굵게 짧게 훅 불었다.

“카페는 됐고. 너네 집으로 가자. 지금 당장.”

“지금, 요?”

그러자 곧장 서슬 퍼런 시선이 날아왔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 누나, 화나니까 정말로 무섭네.

“몇 번 버스 타야 돼?”

“41번요…….”

이제 와서 결사반대할 수도 없었다.

“미안해요…….”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사과뿐.

지아 누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난 네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해서 이러는 거니까.”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는 2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대화는 단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 * * *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집 근처라고 해도 앞으로 걸어서 10분을 더 가야 하지만.

지아 누나가 나에게 턱짓을 했다. 앞장서라는 의미.

나는 고분고분 그 말을 따랐다.

터덜터덜.

“그나저나 여기 골목은 복잡하네.”

“그렇죠.”

답하는 음성에 기운이 빠져 있었다.

서서히 붉은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마다 환한 불이 들어왔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해?”

나는 주변의 풍경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앞으로 5분요.”

“꽤 걸어야 하네.”

필요한 대화를 제외한 교류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를 감도는 어색한 기류.

집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나의 치부가 드러날 순간이 머지 않았으니까.

문득 뒤를 돌아보니 지아 누나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얼마 후 집에 도착했다.

“다 왔어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지아 누나가 두리번거리다가,

“여기?”

우리 앞에 있는 주택의 지상층을 가리켰다.

“맞기는 한데, 이쪽으로 오세요.

주택 옆쪽으로 돌아서 약간 들어가자 반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지아 누나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여기구나…….”

그것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신기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단순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등 뒤에서 낮은 소리로 감탄하는 누나.

형광등 불을 켰다. 지아 누나가 천천히 우리 집안 풍경을 둘러보았다.

“왜 숨기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한 뒤 누나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럴 때는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까.

“화는, 좀 풀렸어요?”

“미안해. 날 신뢰하지 못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누나가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아녜요. 그건 제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일단 신발 벗고 들어오세요.”

누나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앗! 뭐라고 대접해야 하는데. 잠시만요. 저기 바닥에 편하게 앉아 있으세요.”

“그럴게.”

싱긋 눈웃음을 짓는 지아 누나를 뒤로한 채 부엌으로 향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간식거리도, 마실 거리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물과 밥, 반찬 두어 가지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그래?”

누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누나. 대접할 게 없어서요…….”

“아, 그렇구나…….”

누나가 턱을 검지 손으로 받친 채 신음성을 흘렸다.

“잠깐 나가서 뭐라도 사올까? 나 어제 용돈 받았거든.”

누나가 지갑을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집주인이 대접해야 맞는 거죠.”

“아냐. 마음 쓰지 마.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

무엇을 살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서로 마음을 터놓은 덕분인지 더 이상 나와 누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지 않았다.

편의점 근처에 다 왔을 쯤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어! 오빠아!”

슬기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쟤가 슬기?”

“네. 맞아요.”

그러자 누나가 반색을 표했다.

슬기가 우뚝 멈춰서서 지아 누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오빠, 이 언니는 누구야?”

“아, 정지아 누나야. 나랑 같은…….”

옆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자기소개는 스스로 해야지.”

그런 뒤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안녕? 난 정지아라고 해. 영재랑은 같은 스터디부 멤버이고.”

잠깐 말을 끊고 슬기를 응시하는 누나. 이윽고 목소릴 내었다.

“같이 데이트도 했던 사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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