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93화파고드는 타이밍(3)
* * *
지아 누나와 헤어지고 난 뒤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슬기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
이 녀석 웬일이지?
의문을 가득 담은 눈길로 슬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슬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슬기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탄사를 내질렀다.
“맞다! 오늘 아침에 약속했잖아.”
“무슨 약속?”
되물으면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거 있잖아, 그거! 오늘 아침에 중요한 일 있다고 한 거 말야. 얘기해주기로 했잖아.”
그제야 슬기가 하는 얘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궁금해?”
되묻자 슬기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더 부담스러웠다.
“…….”
“빨리 해줘어.”
내가 뜸을 들이자 슬기가 보채기 시작했다.
나는 벽시계로 눈길을 돌렸는데, 8시를 약간 넘긴 시각이었다.
“그나저나 너, 저녁은 먹었어?”
슬기는 곧장 도리질을 했다.
“일단 저녁부터 먹자. 먹으면서 들려줄게.”
“아싸!”
방방 뛰면서 주먹을 높이 지르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였기에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슬기 덕분에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니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내가 차릴게. 조금만 기다려.”
슬기가 부엌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내가 TV를 멍하니 응시하는 동안 슬기가 저녁상을 거실로 가져왔다.
“자 오빠. 먹자.”
오늘의 저녁 메뉴는 두부가 들어간 김치찌개에 흑미밥. 아침에 먹은 것과 똑같은 음식이었다.
우리는 수저를 들고 밥덩이를 삼켰다.
그러면서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허얼. 오빠가 데이트라고?”
얘기를 다 들은 슬기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쥐고 있던 숟가락마저도 공중에서 정지했다.
“그 반응은 대체 뭐냐.”
목소리를 내리깔자 슬기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 음……. 데이트 이런 거에 관심 없는 줄 알아서. 맨날 공부하고, 스터디부 가는 거 말고 만나는 여자도 없잖아.”
아, 갑자기 뼈마디가 시리네…….
하지만 슬기가 저런 식의 발언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동안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여겼을 테니까 말이지.
나는 입 밖으로 한숨을 흘려보냈다.
“밥이나 먹자.”
우리는 다시 수저를 움직였다.
밥상을 물리고 난 뒤 공부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온 탓일까, 저편으로 물러났던 심란한 감정이 재차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떻게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문제집을 펼쳤지만, 활자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래서야 시간 낭비밖에 안 되지.
몬아미 볼펜을 던져놓고 스마트폰을 켰는데 오늘따라 단톡방도 고요했다.
아무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어.
나는 스마트폰만 챙겨들고 무작정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계속 집에만 있기에는 심란했으니까.
덥고 습한 공기는 밤이 되어도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통행하는 골목길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목적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터덜터덜.
지아 누나의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고백.
배경음악이 귓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상황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그저, 순간적으로 못 들은 척했다.
자신이 없었으니까.
도연이에게서 고백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만 그때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지아 누나의 고백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다가왔다.
받기에는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안 받으면 앞으로의 관계에 분명히 영향을 주고 말겠지.
머뭇거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몸집을 불렸다. 대기 중에 퍼져있는 수증기를 빨아들이며 덩치를 키우는 먹구름처럼.
골목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문득 눈길을 던진 곳에 가로등 빛이 내리쬐는 곳에 낡은 벤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벤치에 걸터앉은 채 양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온갖 잡념들 속에서도 결론은 단 하나였다.
내 마음의 향방을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것.
내 진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누나. 진짜로 모르겠어요…….”
그때 주머니에서 깨톡 알림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지아 누나가 보낸 개인톡이었다.
지아 누나 : 오늘 정말즐거웟어!! 지금쯤이면 공부하고 있을려나??ㅋㅋ
호랑이도 제 생각하면 온다더니…….
놀란 가슴을 추스른 뒤 잠깐 산책하고 있다는 깨톡을 보냈다.
지아 누나 : 웬일? 이제 운동하려구?? ㅎㅎ
나 : 아뇨ㅎㅎ 그냥 방이 좀더워서..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사담이 오갔다. 둘 중 누구도 손을 잡았던 일과 고백한 일에 대한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지아 누나 : 그럼 낼봐~ 안뇽ㅎㅎㅎ
인사에 답장하고 나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마음을 정하자. 정하고 다음에는 제대로 대답하자.
기회가 또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을 새겼다.
* * * *
다음날 스터디부에 왔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그런지 복잡했던 심정이 다소 정리되었다. 덕분에 부실에서 지아 누나를 보아도 평소와 다름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에어컨 바람을 쐬며 우리는 공부를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여름방학도 닷새밖에 안 남았네.”
윤희가 창가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발언의 여파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으악!”
규원이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더니 책상에 엎어져 죽는 시늉을 했다.
“개, 학, 시익…….”
그제야 윤희가 규원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까지 오버할 일이야?”
“어이, 거기!”
용수철에 튕긴 마냥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규원이가 검지 손으로 윤희를 정조준했다.
“자네는 슬프지도 않은 게야?”
윤희는 물끄러미 규원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왜 그런 아저씨 말투를 쓰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새.
윤희가 반응해주지 않자 규원이가 머쓱했는지 천천히 손가락을 거두었다.
지아 누나는 둘의 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람하는 중이었다.
“뭐, 네가 가끔 요상한 말투를 쓰는 거야 알긴 하지만.”
윤희의 응수. 규원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 근데, 진짜로 안 슬퍼?”
원래 말투로 되돌아왔다.
윤희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턱을 괴었다.
“슬픈 것까진 아니어도 아쉽긴 해.”
덤덤한 어조로 말하는 걸 보니 이미 달관의 경지에 올랐군.
“너는?”
이번엔 규원이가 나를 지목했다.
“별 생각 없는데?”
그러자 규원이가 외계인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을 쏘았다.
“말도 안 돼……. 저런 게, 사람일 리가 없어!”
“내 생각엔 너 혼자 오버하는 것 같은데. 누나를 봐봐.”
규원이가 머리를 잽싸게 돌려 지아 누나를 쳐다봤다.
“언니! 언니는 안 슬퍼?”
“나도 당연히 슬프지.”
누나가 짤막한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규원이가 다시 나와 윤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거 봐. 너네가 이상한 거라구.”
지아 누나를 아군 삼아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하지만 곧 내부분열이 일어났다.
“음, 그래도 너만큼 오버할 정도는 아니지만.”
누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허럴?”
규원이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결국 네 편은 없었네.”
나는 규원이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다들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거지. 너도 이제 받아들이렴.”
지아 누나가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으으. 그래도 개학은 싫어…….”
고개를 떨군 채 탄식을 내뱉는 규원이.
윤희가 작게 웃음 소릴 내었다.
“개학이 꼭 싫은 것만은 아니잖아. 곧 주현 선배도 만날 수 있을 테고.”
내 한 마디에 규원이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오오. 그러고 보니…….”
개학은 다음주 월요일. 그 말인 즉 이번 주 토요일이면 주현 선배가 집으로 돌아온다.
“드디어 주현이 돌아오는구나.”
누나가 빈 책상을 향해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뒤이어 윤희와 규원이도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정말로 오래도록 비어있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2학기부터 스터디부는 다시 완전체가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자 감회가 남달랐다.
“흐음. 개학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군.”
규원이의 입장이 약간 변했다.
“그래서 말인데, 주현이 돌아오면 조촐하게 환영 파티라도 할까?”
발의자는 바로 지아 누나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가장 먼저 찬동한 이는 다름 아닌 윤희.
“오오! 언니 머리 짱 좋아!”
노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규원이야 안 봐도 비디오이고.
“하지만 부장님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지아 누나의 말마따나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은 나.
그러자 양옆에서 눈총을 쏘았다.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지는구만.
하지만 나는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면,
“당연히 해야죠. 주현 선배도 기뻐할 테니까요.”
지아 누나의 제안을 들은 순간부터 찬성이었으니까.
“선뜻 좋다고 할 줄이야…….”
“와아! 우리 부장님 웬일이래?”
윤희와 규원이가 각각 놀라움을 표출했다.
“영재 다시 봤어.”
지아 누나가 싱긋 웃었다.
“아니 뭐, 내가 언제 그런 거 하지 말자고 한 적 있었나?”
다들 너무 의외라는 듯이 반응하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여태 뒤풀이하자는 의견 다 수용하고 그랬는데 억울하네.
“음……. 되짚어보니 그랬던 적은 없었네.”
윤희가 턱을 매만지며 내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그렇네.”
지아 누나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어……. 진짜 그렇네.”
다행히 규원이의 뇌리에도 남아있었군.
“아무래도 고지식한 이미지가 박혀서 그랬던 걸지도?”
윤희의 어조는 나직한데 어째서 묵직한 펀치를 맞은 것 같지?
하지만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던 문제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개학날 무조건 파티하는 거야. 알겠지?”
나는 윤희와 규원이, 지아 누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
오후 6시. 오늘도 무사히 부활동이 끝났다.
“오늘도 끄읏!”
규원이가 두 팔을 높이 들고 쾌재를 불렀다.
“이제 금요일 하루만 남았네.”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옆구리를 푹 찔렀다.
“으억!”
순간적인 기습이어서 몸을 과장스럽게 꺽었다. 돌아보니 규원이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
규원이가 허리춤에 손은 얹은 채 내질렀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양손을 들고 항복 선언을 했다.
예민한 반응을 보일 만한 것은 건드리는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아까 흐느적 잘하더라. 한 번만 더 보여줘.”
지아 누나가 키득키득거렸다. 옆에서 윤희도 따라 웃고 있고.
……그래, 여자들뿐인 곳에서 남자들은 다 이런 취급이지.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우리는 교사 밖으로 나왔다.
저녁때가 가까운 덕분인지 더위가 조금은 주춤한 상태였다.
우리는 항상 다니는 경사로를 따라 내려갔다.
이제는 다들 완전히 친해져서 갖가지 잡담들이 많이 오갔다. 물론 화장품이나 옷이 화제로 오르면 내 입은 자연스레 닫히지만.
즐겁게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경사로 끝까지 다 내려왔다.
이제 언제나처럼 각자의 집으로 갈라서는 때.
나는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다들 잘 가. 누나도요.”
윤희와 규원이도 잘 가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지아 누나는 예상치 못한 대사를 내뱉었다.
“아냐. 난 오늘 영재랑 같이 놀 거야.”
그러면서 내 옆으로 다가오는 누나.
규원이가 눈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웠다. 반면 윤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놀라워하지도 않고.
그제 누나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때는 분명 놀라는 반응이었는데.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아 누나가 내 손을 맞잡았기 때문에.
“오오. 뭐지, 뭐지?”
규원이가 자못 흥미로워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규원이가 자신의 흥미를 충족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럼 우리끼리 먼저 갈게. 언니도 잘 가요.”
윤희가 규원이의 팔을 붙들고 걸음을 재촉했으니까.
“우리도 갈까?”
누나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데이트 신청인가요?”
짓궂게 묻자 누나의 표정이 무척 환해졌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군.
“이제 척하면 척이네. 하지만 조금은 다를지도 몰라.”
의미심장한 발언.
“그래요?”
“응. 오늘은 정말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거든.”
“그게 데이트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지아 누나는 답변 대신 얼굴에 묘한 미소를 그렸다.
말을 걸지 않으면 답을 안 들려줄 기세였다.
“어디에 가고 싶으세요? 너무 먼 곳만 아니면 저는 어디든 좋으니까.”
“어디든 좋은 거지?”
재차 확인했다.
“네.”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 누나가 입술을 벌렸다.
“그럼, 너네 집에 놀러가도 돼?”
누나의 공세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