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 92화­파고드는 타이밍(2) (92/131)

〈 92화 〉 92화­파고드는 타이밍(2)

* * *

눈 깜짝할 새, 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빠르게 찾아온 다음날.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온 난리를 쳤다.

원래라면 잘 때나 하는 샤워를 아침부터 하고, 옷장 앞에서 어떤 옷이 깔끔하고 괜찮을지 한참을 고르고…….

지아 누나와의 데이트니까 그만큼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바닥에 펼쳐놓은 옷가지들을 내려다 보고는 한숨부터 쉬었다. 종류가 이 정도로 없을 줄이야.

하지만 옷을 새로이 구비할 돈은 없으니 여기서 최대한 골라내야 한다.

나는 매의 눈으로 옷가지들을 살폈고, 최종적으로 회색 칼라 티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골랐다. 옷을 걸치고 나서 나는 책상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흠…….”

새까만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큰 멸치가 존재하다니.

나도 모르게 앞니 사이로 나쁜 말이 튀어나왔다.

“어이쿠, 이놈의 입!”

손으로 입술을 한 대 때렸다.

나는 스마트폰을 다시 내려놓고 옷 매무새를 한 번 더 점검했다. 그런 다음 안경을 꼼꼼하게 닦고 나서 썼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얼굴을 비춘 채 머리도 정리하고 나니 평소보다 좀 사람 같아 보였다. 얼굴은 여전히 못났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현찰이 약간 들어있는 지갑과 기타 짐들을 챙긴 뒤 방을 나왔다. 그러자 슬기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아침부터 왜 그리 야단이야?”

슬기는 선풍기를 독차지한 채 고개만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 있거든.”

“중요한 일?”

슬기가 내 차림새를 위에서 아래로 훑더니 탄사를 내질렀다.

“아! 스터디부 가는구나?”

대답하는 음성에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뭐, 아직 눈치가 없을 나이긴 하지.

나는 가만히 한숨을 흘려보냈다.

“슬기야. 잘 생각해 봐. 내가 무슨 요일에만 스터디부에 가지?”

“음, 월수금!”

자신 있는 태도로 답하는 슬기.

“그럼 오늘은 무슨 요일일까?”

“어…….”

슬기의 시선이 벽에 있는 달력으로 향했다.

“오늘이, 그러니까……. 화요일이다.”

답을 알려주려고 하기 직전에 슬기가 간신히 정답을 찾아냈다.

“잠깐만! 스터디부 가는 게 아니네? 그럼 중요한 일이란 게 대체 뭐야?”

“알고 싶어?”

끄덕끄덕.

슬기가 목이 빠질 기세로 고개를 움직였다.

나는 오른손을 펼쳐서 내밀었다.

“100원.”

“엥? 그런 게 어딨어!”

슬기가 불만에 가득 찬 눈초리를 한 채로 볼을 잔뜩 부풀렸다.

“내 맘이지.”

그런 슬기의 반응이 재밌어서 키들거렸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12시 10분.

“어이쿠, 이제 출발해야겠구만.”

“가르쳐 줘어.”

슬기가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중에 알려줄게. 아무튼 난 이만 간다. 집 잘 보고 있어!”

“꼭이야, 꼭!”

손나팔을 하고서 외치는 슬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이용한 덕에 12시 50분 경 스타박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아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쨍쨍한 햇볕 아래서 오래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스타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무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내부.

문 앞에 서서 약간 기다리자 유리문 너머로 지아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누나도 곧 나를 발견했는지 눈웃음을 그린 채 손을 들어 올렸다.

“먼저 와있었구나. 어휴, 오늘따라 엄청 덥네.”

지아 누나가 스타박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게요. 시원하게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어요.”

“아, 진짜 그러면 시원해지겠다.”

나는 지아 누나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누나는 어깨끈이 가느다란 회색 나시를 입고 있었다. 새하얀 어깨와 쇄골라인이 과감하게 드러나는 패션.

오른쪽 어깨에 흰색 숄더백을 걸치고 있었다.

연청색 핫팬츠 아래로 뻗어있는 늘씬한 다리.

오늘은 굽이 있는 새하얀 샌들을 신고 있었다.

“어? 누나 헤어 스타일 바뀌었네요.”

검지로 가리키며 얘기하자 누나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오오. 한영재. 눈썰미 좋은데?”

누나가 배시시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원래 누나의 헤어 스타일은 날갯죽지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생머리. 하지만 오늘은 웨이브 펌이 들어간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목에 걸고 있는 낯익은 은색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는 저번 수학여행 때 산 거고요. 맞죠?”

확신에 찬 음성으로 내던지자 누나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목걸이를 검지로 살살 문질렀다.

“영재야. 솔직하게 말해 봐.”

“뭐를요?”

지아 누나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여친 사귀어본 적 있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

“에이. 이 얼굴에 여친이 있었겠어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 치고는 바뀐 부분을 알아채고 얘기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거든.”

“그야, 늘 보는 사이니까. 바뀌면 대번에 알아챌 수밖에요.”

그러자 누나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내 대답이 이상했나?

하지만 누나는 곧 눈웃음을 머금었다.

“온 김에 뭐라도 마시자. 공연까지는 아직 시간 많으니까.”

우리들 뒤편에 있는 카운터를 엄지로 가리키는 누나.

“좋죠.”

우리는 들뜬 발걸음으로 카운터에 갔다.

* * * *

스타박스의 값비싸고 시원한 음료로 갈증을 해소하고, 근처의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우리는 문화회관으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때마침 승객도 별로 없어서 우리는 2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하아. 너무 기대돼.”

지아 누나가 두 손을 맞잡고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숄더백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봐봐. 선생님 아니었으면 이번 공연 공짜로 못 봤어. 너무 좋다아.”

이제는 아예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잠깐 봐도 돼요?”

“물론이지.”

내가 손을 내밀자 누나가 표 한 장을 기꺼이 넘겨주었다.

표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니 전면에는 주연 배우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공연 타이틀은 .

뒷면에는 공연을 하는 모습 한 컷과 바코드가 있었다.

“너도 기대되지?”

“당연하죠.”

응답하면서 누나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대략 한 뼘쯤.

지아 누나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누, 누나?”

“흐음.”

짤막한 신음을 흘리면서 누나가 다시금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검지로 자신의 턱과 입술을 가볍게 문질러댔다.

“피부는 좋네.”

“네?”

웬 뚱딴지같은 말을…….

“자신감을 가지라는 거야. 자신감.”

“자신감…….”

나는 누나가 강조를 거듭한 그 단어를 조용히 곱씹어 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이 얼굴에 자신감을 가지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단 말이지.

“근데 누나. 왜 갑자기 피부 얘기로 넘어가는 거예요?”

“왜애? 안 돼?”

지아 누나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약간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애교 어린 눈빛.

누나는 그동안 나에게 자주 이런 모습을 보여왔다. 이번 것도 장난에 가까운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어제 지아 누나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어느 쪽인지는 지아 누나만이 알고 있다.

나는 그 생각을 뒤로 미룬 채 적당히 무난하고 괜찮은 답변을 골랐다.

“그건 아니죠. 그냥 좀 뜬금없이 느껴진 것뿐이라서…….”

“응. 아무튼 피부 하난 확실히 좋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누나가 활짝 미소 지었다.

이렇게까지 말해주면 내 외양에 대해 조금은 자신감을 가져도 되, 겠지?

그래. 손톱 하나 정도만큼은 가져보자.

누나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을 내밀었다.

“표.”

“아.”

그러고 보니 계속 쥐고 있었지.

나는 지아 누나의 손에 표를 올려놓았다. 누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숄더백 안에 집어넣었다.

“후후. 나중에 잘 봐둬. 이 누나가 멋있게 표를 내미는 모습 말야.”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과장스레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뒤에 보게 될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당당하게 표를 내미는 누나의 모습과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는 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누나가 하는 것이니 분명 멋있게 느껴질 것 같았다.

“오늘 데이트하자고 말 꺼낸 건 나잖아. 내가 리드해야지.”

“데이, 트요?”

나는 순간 말을 더듬고 말았다.

가능하면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단어가 순식간에 두뇌를 에워쌌다.

지아 누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슬쩍 비꼈다.

피식, 웃음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다시 지아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나의 눈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라? 진짜 데이트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녀가 단둘이 같이 다니니까, 데이트로 보일 만, 하겠죠? 남들 눈에는.”

내 입으로 직접 데이트라는 단어를 발음하니 왠지 쑥스러웠다.

지아 누나가 ‘남들 눈에는’, 이라는 말을 두세 번 되뇌었다.

“다소 고지식한 생각인 걸? 남녀라고 꼭 사귀는 것만은 아니잖아? 친구 사이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 거고.”

누나가 내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우리도 친구지. 친구.”

마치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이 말하는 누나.

“……듣고 보니 그렇네요. 친구죠. 같은 부 멤버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상태에서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득 옅은 홍조를 띤 지아 누나의 뺨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심과 장난인지 알 수 없는 줄다리기.

버스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목적지를 향해 내달렸다.

* * * *

발레 공연이 펼쳐질 무대에 들어섰다.

정해진 좌석에 앉자 기대감이 점차 부풀었다. 내 인생에서 발레 공연을 볼 기회가 앞으로도 별로 없을 듯하니까.

“이제 곧 시작할 거야.”

누나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이윽고 홀 전체가 암전되더니 잠시 후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들어왔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공간을 서서히 메우고, 무대막이 양옆으로 천천히 벌어졌다.

무대를 채우고 있는 발레리나들이 동시에 똑같은 동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등장하는 또 다른 발레리나. 뒤에 있는 발레리나들과 달리 홀로 독특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티켓의 전면에 있었던 주역 배우였다.

“우리나라에서 엄청 유명하신 분이야.”

지아 누나가 주석을 곁들였다.

“아하.”

발레리나의 동작은 때로는 느려졌고, 무대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니며 건너가기도 했다.

고조되는 배경음악과 함께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일 때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나오는 것은 감탄사뿐.

그때 팔걸이에 올려둔 손등에 어떤 감촉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부드럽고도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시선을 내렸다. 지아 누나의 고운 손이 보였다.

낯간지러운 듯 그러나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누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과감함.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누나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이대로 있자.”

부드러운 웃음이 눈과 입술에 걸렸다.

그리고 누나는 입술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말했다.

“…….”

나는 눈꺼풀만 깜빡거렸다.

내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던 누나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무대를 바라보았다. 심장의 두방망이질을 무시한 채.

공연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 * * *

2시간에 걸친 공연이 끝났다.

문화회관 밖으로 나왔더니 이미 밤이었다. 우리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자리가 없어서 손잡이를 잡은 채 서서 갔다.

“오늘 공연 어땠어?”

“진짜 최고였어요. 몰입감도 엄청났고요.”

무엇보다 몸짓만으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엄지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야.”

지아 누나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버스가 코너를 돌자 서 있던 사람들의 몸이 그 방향으로 밀려났다가 되돌아왔다.

나는 새삼 누나와의 거리를 의식하게 되었다.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

우리의 거리감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영재야.”

내 이름을 입에 담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음성.

“네.”

“아까 내가 했던 말 들렸어?”

“어떤 말이었어요?”

되묻자 지아 누나가 공연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말하기 어려운지 검지로 볼을 살살 긁었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

이내 누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사실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아, 뭐야. 또 저 놀리려고 그랬던 거네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자 누나가 혀를 쏙 내밀었다.

“누나. 나이 먹고 메롱 하면 안 돼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볍게 타박했더니 누나의 강력한 등짝 스매싱이 되돌아왔다. 어찌나 매운지 나도 모르게 허리를 꺾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버스 승객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쏠리고 말았다.

우리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낮에 탔던 정류장에 도착했다.

“오늘 즐거웠어.”

“저도요.”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만 갈게.”

지아 누나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얘는. 그런 걱정 붙들어 매라구. 그럼 진짜로 간다. 내일 스터디부에서 봐!”

“안녕히 가세요!”

나도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지아 누나가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본 다음 턱을 쳐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별들. 나는 더운 입김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아 누나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들었다.

“좋아해…….”

나직한 소리로 그 세 마디를 읊었다.

나는 여기에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았을까.

내 마음은 지금 어디를 표류하고 있는 걸까.

희미한 별을 바라본들 답안은 나오지 않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