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91화파고드는 타이밍(1)
* * *
바다에 다녀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스터디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참 문제집과 눈싸움을 하던 중 문득 지아 누나가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네, 주현이 소식 궁금하지 않아?”
발랄한 음성에 우리 셋은 일제히 시선을 누나에게로 돌렸다.
“응! 듣고 싶어!”
규원이가 큰 목소리로 외쳤고, 나와 윤희도 거기에 동조했다.
의견이 만장일치를 보이자 지아 누나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나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은정이를 통해 들었다고 서두를 뗐다.
누나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우릴 쫓아왔던 경비아저씨가 학원장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고, 주현 선배의 탈주를 도왔던 은정 선배는 학원장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는 꼭두새벽부터 차를 몰고 학원까지 달려왔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학원장과 주현 선배를 대면하고 나서 가장 처음 이런 말을 꺼냈다고 했다.
“우리 애, 그동안 공부는 잘하고 있었죠?”
누나가 연기하듯이 그 대사를 읊었다.
참 대단한 교육열이로구만.
“헐! 진짜 그랬다고?”
규원이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투였다.
“은정이가 그렇게 얘기해 줬어.”
그러면서 보란 듯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규원이와 나, 그리고 윤희는 화면에 뜬 깨톡 메시지를 읽어보았는데, 정말로 누나의 말대로였다.
“그거 말고도 은정이한테 찾아와서 네가 뭔데 우리 애를 나쁜 길로 꾀었냐, 고 질타했대.”
“은정 선배가 참, 곤욕을 치렀네요.”
“우리가 신세를 많이 졌지.”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지아 누나.
“주현 선배가 돌아간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윤희가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날 주현 선배는 동이 트고 나서야 기숙학원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에 오르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는데.
“돌아오자마자 바로 학원장한테 불려갔다더라. 은정이랑 같이 엄청 혼났대. 그리고 또 아주머니한테도 따로 혼났다고 하더라.”
“으음. 혼날 만하긴, 했지.”
규원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두 사람에게 폐를 끼쳤던 것 같네요.”
윤희가 기운 빠진 목소릴 냈다.
정말로 괜한 짓을 했던 걸까?
아니다. 나는 속으로 얼른 부정했다.
택시 안에서 주현 선배가 지었던 옅은 미소.
그것은 주현 선배가 정말로 기쁠때에나 짓는 미소였다.
게다가 다 함께 성공을 기뻐하며 하이파이브를 치기도 했고.
“난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소리의 주인공은 지아 누나였다.
지아 누나가 우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마 주현이도 방학 내내 스터디부에 오지 못해서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 날 우리들과 함께 바다를 봤잖아? 비록 그 뒤로 혼났다고 해도 말야.”
지아 누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와 함께 추억을 만들었죠.”
“맞아. 그거야, 그거.”
내 말에 누나가 맞장구쳤다.
그날 우리는 다 함께 밤바다를 보았다.
밤바다를 향해 조그마한 불꽃을 쏘아 올렸다.
서로의 손을 잡고,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여름방학과 행운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
지아 누나가 입을 열었다.
“주현이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조심스러운 단정으로 말을 끝맺은 지아 누나. 눈썹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누나의 말에 동의했다. 주현 선배가 정말로 후환을 두려워했다면, 애초에 거절했을 테니까.
주현 선배는 용기를 냈고, 우리는 거기에 부응했다.
윤희와 규원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윤희야, 너도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지?”
“응.”
윤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아 누나가 손을 높이 들고 손뼉을 세 번 쳤다.
“자, 그러니까 지금은 주현이가 후회했을 거다, 우리가 폐를 끼친 거다, 같은 생각은 하지 말자구. 만약 주현이가 돌아와서 이런 얘기를 꺼내면 그때 사과하자. 알겠지?”
우리 셋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아마도 주현 선배는 절대로 그런 말을 꺼내지 않을 거라고,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빨리 방학 끝나고 주현이 언니 돌아왔으면 좋겠다.”
규원이가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린 채 말했다.
“방학 끝나고 2주만 있으면 모의고사가 있는데도?”
규원이가 나를 향해 뻣뻣하게 목을 돌렸다.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의 움직임과 흡사했다.
“아, 저기. 부장님? 혹시……커트라인이 있는지요?”
“흠.”
나는 팔짱을 꼈다.
사실은 커트라인을 정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질문을 하면 만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수학 5. 나머진 4. 할 수 있지?”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규원이가 왼손으로 경례를 했다.
“경례는 오른손이야.”
보다 못한 윤희가 지적했지만 규원이는 당당했다.
“뭐 어때. 뜻만 통하면 된다구!”
“우리 애가 원래 이래. 이해해 줘.”
지아 누나가 규원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말아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왜 둘이서 갑자기 바보 취급하는 건데에.”
규원이가 꽁한 얼굴을 하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어어.”
“웃기니까.”
내 웃음 때문인지 지아 누나와 윤희도 깔깔 웃었다.
문득 주현 선배의 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전히 비어있었지만 이제는 조금도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 * *
점심은 규원이가 정하는 대로 먹기로 했고, 규원이의 선택은 상어떡볶이였다.
“여기도 맛있다구!”
뭘 고르든 떡볶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강단.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칭찬해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스터디부로 돌아왔다.
천장에 달린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볼펜을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던 중 바로 옆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규원이였다.
하긴, 점심도 먹은 직후니까 잠들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긴 하다.
그나저나 자는 자세가 참 특이했다. 슈퍼맨처럼 양쪽 팔을 쭉 뻗은 자세라니.
“슈퍼걸도 아니고.”
윤희가 규원이를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지아 누나도 규원이를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깨울까요?”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엽잖아.”
그 얼굴은 자식을 자애롭게 바라보는 부모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확실히 계속 보고 있으니 누나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저 소음은 어떻게 좀 해줬으면 싶은데.
지아 누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영재야. 너 내일 시간 있어?”
“당연하죠. 스터디브 활동 없는 날이잖아요.”
지아 누나가 시간을 내어달라는데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지!
누나의 만면에 웃음이 퍼졌다.
“그럼 나랑 발레 공연 보러 갈래? 마침 선생님께 티켓을 받았거든.”
누나가 말하는 선생님은 발레강습소의 원장님이겠군.
“발레요?”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희가 관심을 표명했다. 하지만 지아 누나는 윤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 직시하고 있었다.
“같이 가자. 둘이서.”
“둘, 이서요?”
“응.”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누나.
“…….”
그 순간 머뭇거리고 말았다.
규원이는 여전히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코골이.
등 뒤에서는 윤희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라? 영재라면 바로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지아 누나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정말로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게…….”
“우리 둘이서만 가자고.”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을 가르치는 양 지아 누나가 재차 강조했다.
나는 목을 돌렸다. 눈길이 향한 곳은 윤희가 앉은 자리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윤희가 눈을 치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평소에 보여주던 잔잔한 눈으로 되돌아왔다.
“왜?”
나지막하게 묻는 말에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자아내지 못했다.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
쑥스러움을 느낀 나는 뒷목을 손으로 문질렀다.
다시 지아 누나를 바라보았다.
“나랑은, 가기 싫은 거야?”
조금 불안한 빛을 띤 눈이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건 아녜요! 단지…….”
“단지?”
누나가 내 말꼬리를 똑같이 읊었다.
……이 자리에서 꺼낼 만한 말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의자를 뒤로 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나와 마주 보고 앉는 구도가 되었다.
“누나.”
눈에 힘을 주었다.
“몇 시에 만날까요?”
그제야 지아 누나의 표정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누나는 검지 손을 턱에 대고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음……. 공연은 5시부터 시작이니까 그 전에 만나서 점심도 먹고 같이 놀자. 어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누나가 기뻐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면 1시가 좋으려나?”
“좋은 것 같아요.”
내 대답이 흡족스러웠는지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1시까지 스타박스에서 만나자!”
“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고, 누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양 옆에서 이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규원이는 단잠을 만끽하고 있었다.
* * * *
오후 6시가 되자 우리는 각자의 가방을 챙기고 스터디부를 나섰다.
“흐아암. 목이 뻐근해.”
규원이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그런 뒤 어깨와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반나절 가까이 불편한 자세로 잤으니 근육이 뭉쳤을 만 했다.
나는 문을 잠근 뒤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언니가 어깨랑 목 좀 풀어줄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지아 누나의 발랄한 말소리.
그러자 규원이가 숨을 삼키며 질겁했다. 윤희가 이 상황이 즐거운지 가볍게 웃었다.
우리는 별관을 나섰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여전히 더웠다.
정문을 지나서 경사로를 내려가기 시작하는 우리들.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앞장서고, 나와 윤희가 한 발 뒤에 서는 구도가 되었다.
둘은 재잘거리다가 깔깔 웃기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반면 나와 윤희는 차분하게 걸을 따름이었다.
“왜 그때.”
윤희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응?”
윤희의 옆얼굴을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윤희도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왜 그때, 나를 봤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윤희의 눈을 보니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아,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무의식 중에 나온 행동이었는데.
그대로 말하면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되지 않을 테고.
윤희의 맑고 투명한 눈망울이 내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입을 조금 벌렸다가, 다시 다물고 말았다.
윤희가 눈꺼풀을 두 번 깜빡이더니 콧숨을 내쉬었다.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네가 무얼 하든, 그건 네 자유니까.”
담담한 어조.
누구에게나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는 관념과 원론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윤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를 바라보며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응.”
묵묵한 응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주문을 들었다 한들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편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비틀어져 있었지.
나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잡히는 지아 누나의 뒷모습. 규원이처럼 활달한 목소리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어느덧 경사로를 다 내려왔다.
“그럼 다들 잘 가. 영재는 내일 1시 스타박스 잊지 말고.”
지아 누나가 가장 먼저 작별 인사를 했다.
“으잉? 언니 영재랑 약속 있어?”
오후 내내 꿀잠을 잤던 규원이가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둘이서 만나기로 약속했지.”
누나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오오! 만나서 뭐하려구?”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규원이. 하지만 규원이가 호기심을 채울 일은 없었다.
지아 누나에게 아까 꺼내려다 말았던 얘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누나.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나요?”
“우왓! 영재 박력 쩔어.”
규원이가 흥미진진한 표정을 했다.
“규원아. 잠깐 나 좀 따라 와.”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윤희가 규원이의 귀를 붙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 아! 잠깐잠깐! 귀 떨어지겠어!”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영재 너도 잘 가.”
아픔을 호소하며 호들갑을 떠는 규원이와 달리 윤희는 차분한 태도였다.
지아 누나가 둘을 바라보다가 짤막한 웃음소릴 냈다.
“저러는 모습 보기 좋다.”
“저도 그래요.”
맞장구를 치고 누나를 따라 웃음 지었다.
“누나.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거예요.”
“뭘까? 갑자기 긴장되는 걸.”
“그러니까.”
“내 바스트 사이즈가 궁금해? 뭣하면 특별히 알려줄 수도…….”
“아아니! 그게 아니라요.”
당황해서 손을 내젓자 지아 누나가 혀를 살짝 내보였다.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온, 무척 궁금하면서도 절대로 꺼낼 수 없는 발언.
“미안. 제대로 들을게.”
지아 누나가 애교 섞인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나는 누나와 눈을 마주했다.
“왜 저에게만 그런 권유를 한 거예요? 그동안은 모두와 함께 하는 것 위주로만 제안했는데, 갑자기 그래서요. 오, 오해는 하지 마요. 정말로 궁금해서 이러는 거니까.”
언제나 명랑하고 활달한 누나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시선 교환은 오래 가지 않았다.
누나가 허리를 곧게 펴고 양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못할 게 뭐 있어. 나는 그저, 부딪쳐 보려는 거야.”
무엇에 부딪치려고 하는 거예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럼 내일 봐. 정말로 기대하고 있으니까.”
누나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나서 몸을 돌렸다.
“잘 가요.”
누나의 등을 향해 인사했다.
그 뒤로 멀어져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나는 한동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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