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90화청춘과 바람(5)
* * *
우리들은 주현 선배를 이곳에 데려오기로 결의했다.
주현 선배가 용기를 내어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주현 선배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스터디드림 멤버 다섯 명이 모여서 바다를 구경하면 얼마나 좋을까.
지아 누나는 우리들을 거실에 앉혀놓은 채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작전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아. 저쪽이 주현이를 학원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고, 우리는.”
“주현이 언니를 택시에 태워서 데려온다!”
규원이가 팔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그렇지.”
지아 누나가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은정이 말로는 9시에서 10시 사이에 밖으로 잠깐 나올 수 있대. 여기 펜션에서 기숙학원까지는 택시로 10분 정도 걸리고. 그러니까 우리가 출발할 때 미리 예상 도착 시간을 알려주면 걔네도 그 시간에 맞춰서 나올 거야.”
경청하고 있던 윤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언니.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뭐든 물어봐.”
자신 있다는 듯 지아 누나가 팔짱을 꼈다.
“만약 경비아저씨한테 걸리면, 어떡하실 거예요?”
“음, 확실히…….”
나는 윤희 옆에서 나직한 음성으로 거들었다.
윤희는 가능하다면 위험요인을 최대한 배제하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우리들 중 누군가가 경비아저씨한테 붙잡혔다간……말 그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다.
아니야. 작전 개시 전부터 불길한 생각만 해서 어쩌려는 거냐.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안 좋은 생각을 떨쳐냈다.
그런데 옆에 있던 규원이가 실없는 소릴 했다.
“왜 그래? 비듬이 많아서?”
“갑지가 뭔 소리하냐.”
눈을 부라렸더니 규원이가 어깨를 움찔했다.
“너희들, 내 얘기 안 듣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팔짱을 낀 채 나와 규원이를 내려다보는 지아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엄청 중요한 얘기하고 있는데.”
누나의 입술은 호를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아……. 미안해요.”
“미안…….”
규원이도 얼른 사과를 했다.
“좋아. 이번엔 넘어가 주겠어.”
다행히 누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휴, 다행이네.
“그럼! 윤희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야겠지.”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가끔 지아 누나의 페이스를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지.
“후후.”
무언가 확신하는 것이라도 있는지 누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답은 간단해. 버리고 튄다!”
“네?”
윤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반문.
황당한 답변에 얼이 빠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언니, 사탄보다 악랄해.”
나와 윤희가 규원이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움직였다. 누나는 우리들이 하는 행동이 재밌었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당연히 농담이지! 근데 뭐 경비아저씨한테 잡힐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우리에겐 택시가 있으니까. 택시만 타면 잡힐 일 있겠어?”
“그래도 주의하는 게 좋을 거예요. 경비아저씨가 정문에서 학생들 동향을 살필 것 같거든요.”
지아 누나는 윤희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윤희의 직감은 대체로 들어맞는다. 여기 있는 두 사람은 모를지라도 나는 알고 있다.
“누나. 윤희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새겨듣는 게 좋아요. 직감이 보통이 아니라서요.”
나는 윤희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말한다 해도, 뾰족한 수는 없는데.”
음, 하고 신음성을 흘리며 엄지로 입술을 매만지는 누나.
그러다가 짤막한 탄성을 질렀다.
“그래, 떠올랐어.”
“오! 뭔데요?”
나는 기대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뭐야, 뭐야?”
규원이의 목소리는 아예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
지아 누나가 명랑한 목소리로 답을 들려주었다.
“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도망치면 돼!”
누나가 상큼한 미소를 그리며 덧붙였다.
“택시까지.”
* * * *
작전 브리핑(?)이 끝나고 나서 윤희가 콜택시를 불렀다. 그로부터 대략 15분이 지나서 택시가 펜션 앞에 도착했다.
우리 네 사람은 택시에 탑승했는데, 조수석은 택시비를 담당할 윤희가 차지했다.
나와 지아 누나, 규원이는 당연히 뒷자리행.
윤희가 목적지를 얘기하자 택시 기사가 빠르게 속도를 높였다.
그 사이 지아 누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10분 뒤에 도착한다고 알렸다.
“오오.”
돌아보니 규원이가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갑자기 엄청 두근거려.”
“우연이네. 나도 그래.”
윤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순간 규원이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둘은 저녁 식사 때 대치한 이후로 여태껏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
규원이가 입술을 다물고 있자 윤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깐 미안해. 감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어.”
윤희가 손을 내밀었다.
“응. 나야말로 미안…….”
규원이가 그 손을 맞잡았다.
“다행이네.”
지아 누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창밖으로 계속 보이던 밤바다가 끊기고, 시내의 풍경이 펼쳐졌다.
“아, 여기서 세워주세요!”
지아 누나가 외치자 택시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려보니 내 키보다 한참 높은 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저씨. 혹시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데려올 사람이 있거든요.”
택시가 완전히 멈춰 섰을 때 윤희가 부탁하자 기사 아저씨는 알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바로 탈 수 있도록 문은 닫지 않았다.
“벽에 붙어.”
선두에 선 지아 누나의 손짓에 우리는 담에 바짝 붙어서 천천히 이동했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첩보영화를 찍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정문을 빠져나오는 몇몇 학원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아 누나가 걸음을 멈추자 우리도 제자리에 섰다.
그나저나 왠지 여기저기서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잠시 기다렸더니 주현 선배가 누군가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같이 있는 사람은 은정 선배인 모양이었다.
지아 누나가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고, 은정 선배가 이에 화답했다.
주현 선배는 아무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잔뜩 긴장하고 있는 거겠지.
주현 선배에게 있어 이번 건은 처음 경험해 보는 일탈일 테니까.
두 사람이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니 진짜 반갑다, 얘.”
지아 누나가 반색하자 은정 선배가 한숨 쉬었다.
“그렇게 반갑다는 애가 나는 쏙 빼놓고 주현이만 바다에 데려가는 거야? 좀 너무한 거 아냐?”
그러다가 우리들을 향해 고개를 내뺐다.
“맞다, 스터디부 모임이랬지.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네.”
“미안. 다음에 맛난 거 사줄 테니까. 응?”
지아 누나가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다? 엄청 비싼 걸로 사달라고 해야지.”
“나 알잖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여자 아닌 거.”
“뭐, 그렇긴 하지.”
은정 선배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주현 선배에게 눈길을 던졌다.
“주현아. 이제 가봐. 뒷일은 내가 최대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응.”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듯하던 주현 선배가 대답했다.
주현 선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거의 2주일 만에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재회의 기쁨을 누릴 새가 없었다.
“어이, 거기!”
우리는 굵직한 음성이 들린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옮겼다.
덩치 큰 남자가 가로등을 등지고 서 있었다.
은정 선배가 다급하게 외치며 손짓했다.
“경비다, 경비! 너네 빨리 가! 빨리!”
우리는 용수철에 튕겨 나간 것처럼 택시를 향해 달음박질했다. 물론 주현 선배를 챙기는 일은 잊지 않았다.
“선배, 빨리!”
나는 주현 선배의 손목을 붙들고 달렸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 윤희는 이미 나보다 앞서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거기 서!”
경비아저씨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택시까지만 뛰어가면 살 수 있다!
“영재야 빨리!”
지아 누나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주현 선배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우선은 살고 봐야 한다.
택시 앞에 다다르자 나는 얼른 주현 선배를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경비아저씨가 여전히 쫓아오고 있었다.
나도 뒷좌석에 황급히 몸을 구겨 넣었다.
“아저씨 빨리 가요, 빨리!”
조수석에서 윤희가 다급하게 말하자 택시 기사가 주차브레이크를 풀고 차를 출발시켰다.
윤희의 직감이 완벽하게 적중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 하나 잡히는 일 없이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 사실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펜션으로 돌아가 주세요.”
윤희의 음성이 아까보다 한결 차분했다.
택시 기사가 부드럽게 핸들을 조작하면서 코너를 돌았다.
“성공, 성공이다!”
규원이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가 택시 천장을 세게 치고 말았다.
“아, 아아. 아파…….”
자신의 주먹을 문지르는 규원이를 두고 우리 모두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바보 하나를 내버려 둔 채 나와 윤희, 지아 누나는 서로 하이 파이브를 주고받았다.
“선배도 해요.”
나는 주현 선배에게도 권했는데, 갑작스러웠는지 선배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앗.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아, 아냐. 나도……할, 거야…….”
주현 선배가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들어 올렸고, 우리는 모두 한 번씩 하이 파이브를 했다.
주현 선배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우리들을 번갈아 보았다.
“오랜만, 이야……. 반가워.”
택시가 가로등 아래를 지나갔다.
그때 보인 주현 선배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 * *
“주현아. 바다 보러 갈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지아 누나가 밤바다를 가리켰고, 주현 선배가 머리를 끄덕였다.
“언니. 폭죽놀이도 해요.”
윤희는 펜션 1층에 있는 매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폭죽이라……. 확실히 밤바다를 보며 터뜨리면 무척 낭만적일 것 같다.
지아 누나가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폭죽 터뜨리려면 라이터 있어야 하지 않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중에서 라이터를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네요.”
“음. 그럼 안 되겠네.”
나와 지아 누나의 결론에 윤희가 실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규원이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짜잔! 이럴까 봐 아빠 걸 슬쩍 했지.”
손으로 만든 V사인을 흔들며 의기양양해 했다.
덕분에 우리는 폭죽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해변에 도착한 우리는 백사장에 폭죽이 넘어지지 않게끔 설치하고 나서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주황색 불꽃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우리는 불꽃이 쏘아진 자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잠시 후, 형형색색의 불꽃이 폭음을 내며 터졌다.
“작네…….”
윤희의 나직한 중얼거림.
“싸구려 폭죽 세트잖아.”
“그래도 조금 더 컸으면 했는데.”
윤희는 못내 아쉬워했다.
뭐, 사실 나도 비슷한 감상이다. TV에서 본 것처럼 큼직하거나 아름다운 모양을 바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하지만 그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밤하늘을 아주 잠깐 수놓았다가 찰나의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조그마한 불꽃이라고 해도, 그것만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마지막 불꽃이 밤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옆에서 윤희가 한숨을 내쉬더니 몇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윤희야 왜 그래?”
지아 누나의 질문에 대답 대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윤희.
“할 얘기가 있어요.”
윤희의 목소리에 비장함이 배어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윤희에게 집중했다.
“사실 우리 학교의 이사장님은, 제 외할아버지예요.”
그동안 숨겨왔던 진실을 윤희는 담담한 목소리로 고했다.
“…….”
쏴아아아.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왔다.
“아, 그래서 우리가 부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바다에 올 수 있었구나.”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지아 누나였다.
“아하! 그래서 집이 그렇게 잘 살았던 거네.”
규원이가 손뼉을 쳤다. 학교의 이사장이란 이유만으로 부자인 것 같지는 않지만.
“아…….”
주현 선배는 아주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그간 숨겨왔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고백하는 윤희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왜 윤희가 폭죽을 고집했는지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스터디드림의 멤버들을 믿으니까.”
밤바다를 등지고 있는데도 윤희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규원이가 윤희에게 한발 다가갔다.
“당연히 믿어야지! 친구잖아.”
해맑은 목소리에 윤희가 싱긋 웃었다.
지아 누나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나이 차이가 나도 우린 친구야. 그치?”
“네.”
윤희가 고개를 힘차게 움직였다.
주현 선배도 윤희에게 다가갔다.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윤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여겼다.
윤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점차 나아가는 윤희를 보며 느끼는 뿌듯함?
기쁨?
아니면, 시원섭섭함?
확실한 건 단 하나의 단어로는 정리할 수 없다는 사실뿐.
나를 제외한 네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어두컴컴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영재야.”
윤희가 내게 손짓했다.
저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고민하다가 윤희에게 다가갔다.
윤희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보드라운 손가락이 내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줄 알았던 밤바다에서 나는 희미한 수평선을 발견했다.
이사장님이 스터디부를, 윤희를 입부 시키려고 한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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