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9화청춘과 바람(4)
* * *
“데려온다고요?”
놀라서 반문하자 지아 누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하긴, 데려올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죠.”
“그치?”
누나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영재는 일단 찬성이고. 너희들 생각엔 어때?”
지아 누나가 이번에는 윤희와 규원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현이 언니 오면 당연히 좋지!”
규원이는 예상한 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이제 남은 사람은 윤희뿐,
나는 윤희의 입술을 가만히 살펴보았고, 이윽고 윤희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저도 찬성이에요. 그런데 기숙학원에서 어떻게 데리고 나올 거예요?”
“음……. 듣고 보니 그렇네. 어떻게 데리고 나와야 할까?”
지아 누나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골몰하자 규원이가 한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언니, 아까 전화한 사람한테 한 번 물어봐봐.”
“오오. 우리 규원이 웬일?”
누나가 감탄하자 규원이는 제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를 땐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니까. 우리 멸치한테서 배운 거지. 에헴.”
“왜 뜬금없이 멸치가 튀어나오는 거냐?”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그 이름, 멸치. 이제는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다.
규원이는 회심의 일격이 제대로 먹혔다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 애초부터 이런 반응을 노렸던 거로군.
“뭐, 멸치든 어떻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발 빠르게 수습하는 지아 누나.
저한테는 매우 중대한 사안입니다만.
일부러 눈길을 보내자 지아 누나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린 채 윙크를 발사했다.
누나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구질구질하게 물고 늘어질 수야 없지.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나 일단 깨톡 좀 더 해봐야겠다. 너희들 먼저 샤워해.”
누나가 시선을 스마트폰 액정에 고정한 채 손을 휘휘 내저었다.
꼬르르륵.
어디선가 요란한 배꼽시계가 울렸다.
나와 윤희는 거의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시선 끝에 규원이가 닿았다.
“으으, 배고파 돌아가시겠다아……. 우리 밥부터 먹자, 밥! 고기!”
규원이의 발언이 신호탄이라도 된 모양인지 윤희의 배에서도 허기진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윤희이.”
“그 음흉한 미소 좀, 거두어줄래?”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쏘아 붙였지만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괜찮아. 부끄러워할 거 하나도 없어.”
‘하나도’에 악센트를 실은 규원이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어떻게든 놀려 보려고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너나 그렇겠지.”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나와도 눈이 마주치자 윤희는 아예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잖아. 방귀 뀌는 것처럼 말야.”
입을 놀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윤희의 뒷모습에 시선이 가닿았다.
참고로 우리 중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성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곧바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배꼽시계에 이어 방귀까지!”
규원이가 키들거리며 웃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손등을 입술에 붙이더니 방귀 소리를 흉내 냈다.
“뿌웅, 뿡, 뿡.”
“……네가 애냐?”
어이가 가출해서 한심한 눈길을 보냈다. 윤희의 반응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왜, 그런 말 있잖아. 방귀까지 오픈한 사이가 진짜 친구라고. 오늘 밤에 다 같이 오픈하자. 콜?”
“굳이? 난 싫어.”
윤희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은 채 양옆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손을 내저으며 윤희의 의견에 동조했다.
옆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아 누나가 피식거렸다.
“엥? 영재는 찬성할 줄 알았더니…….”
“대체 어떻게 내가 찬성할 거라고 예상한 거지.”
규원이의 엉뚱함만큼은 정말이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그때 또 어디선가 요란한 배꼽시계 소리가 들려왔는데, 소리의 진원지는 규원이었다.
“흐으. 진짜 안 되겠어. 윤희야아. 고기, 고기!”
“잠깐!”
지아 누나가 오른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눈은 여전히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먹기 전에 샤워부터. 알지?”
“그렇죠. 씻고 나서 요리해야죠.”
윤희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위바위보로 샤워 순번을 정했다.
“나는 바로 음식해야 되니까 먼저 씻을게.”
“그건 인정!”
“당연히 그래야지.”
원래 주방을 쥔 사람에게 편의를 많이 봐줘야 하니까.
윤희를 제외한 나와 규원이 중, 첫 번째는 나였다.
윤희가 샤워 도구와 옷가지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와 규원이는 지아 누나를 사이에 끼고 다시 드러누웠다.
꼬르르륵.
내 배에서도 드디어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 * * *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윤희는 도마 위에 올려놓은 고기를 썰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와주는 게 좋겠지.
나는 윤희에게 다가갔다.
“혹시 도와줄 일 있어?”
윤희가 칼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음, 그럼 식탁에 반찬 세팅 좀 해줄래? 전기불판이랑.”
“명령 받들겠습니다. 셰프님.”
만화에서 나오는 집사들이 하는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윤희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네. 잘 부탁드려요.”
나는 윤희의 발랄한 음성을 뒤로 한 채 식탁으로 다가갔다.
전기불판을 한가운데에 놓고 그 주위로 가져온 음식들을 진열했다.
윤희가 손질한 고기를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서 가져왔다. 탐스러운 선홍빛깔이 식욕을 자극했다.
“이거 완전히 식당에 온 것 같은데?”
“오랜만에 힘 좀 써봤어.”
윤희가 싱긋 미소 지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욕실에서 나왔다. 지아 누나가 시간을 아끼겠다고 규원이가 씻는 중에 난입한 탓이었다.
“우리도 도와줄게.”
누나가 목에 수건을 걸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아니면 먼저 고기 굽고 있을래요?”
고기라는 단어에 규원이가 수건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채 후다닥 달려왔다. 그러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아! 식당 온 것 같아!”
“그러게. 고급 한우집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세팅인데?”
어느새 규원이 곁으로 다가온 지아 누나도 놀라워했다.
“그럼 언니, 굽기 좀 부탁할게요. 영재야, 우린 상추 씻으러 가자.”
“맛있게 구워놓을게.”
지아 누나가 집게를 흔들면서 말했다.
“윤희야. 밥은?”
“저기 있는 핵반 데워서 먹으면 돼.”
윤희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하는 규원이. 그리고 센스 있게 네 사람 몫을 전자레인지에 데울 준비를 했다.
우리는 싱크대로 되돌아왔다.
윤희가 까만 비닐에서 꺼낸 상추를 바가지에 부었다. 그리고 바가지에 뜨거운 물을 틀었다.
“이러면 익는 거 아냐?”
“2분만 이렇게 담가두면 깨끗하게 씻겨.”
자신 있어 하는 걸 보아하니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했다.
어차피 셰프는 윤희니까 고분고분 따르기로 했다.
얼추 2분이 지나자 윤희가 장담한 대로 상추가 정말로 깔끔해졌다.
우리는 상추 잎을 하나씩 찬물로 헹구고 나서 소쿠리에 가지런히 담았다. 그런 뒤 전기불판 앞으로 가져갔다.
고기가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중이었다.
“밥 다 데웠다!”
규원이가 쟁반에 핵반 4개를 받쳐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달래줄 푸짐한 상이 완성되었다.
고기와 반찬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 와중에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지아 누나가 반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은정이다. 잠깐만.”
누나가 윤희에게 집게를 넘겨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누나가 통화를 시작하자 우리 셋은 일제히 수저를 멈춘 상태로 귀를 활짝 열었다. 주현 선배가 여기에 올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도 알고 싶었으니까.
“음. 그래? 일단 알겠어.”
금세 통화를 종료한 누나가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뭐래?”
규원이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주현이가 지금 망설이고 있대. 은정이가 최대한 설득은 해보겠다고 하더라구.”
“망설일 게 뭐 있어? 오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오면 되는데.”
규원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내뱉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누나. 기숙학원을 빠져나올 수는 있대요?”
“경비아저씨한테 허락만 받으면 잠깐 나오는 건 가능하대. 근처에 있는 편의점 왔다 갔다 하는 정도지만.”
그 정도면 채 5분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주현이 언니도 눈치 보지 말고 그냥 온다고 하면 좋을 텐데.”
“주현 선배 성격이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윤희가 진지한 어조로 지적했다.
“확실히 그렇지…….”
지아 누나도 그 점에 대해 동의했다.
“앗! 고기 타겠다.”
윤희가 서둘러 다 익은 고기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그런데 기숙학원을 멋대로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까?”
물음표를 던지고 나서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
“이래저래 추궁 당하겠지. 어디서 외박을 했는지, 왜 멋대로 나갔는지 등등.”
누나가 담담하게 얘기하자 윤희가 첨언했다.
“그리고 부모님께도 연락이 갈 테고…….”
거기까지 말한 윤희의 안색이 굳었다.
“주현 선배가 이 사실을 모를 리는 없을 테니……. 사실상 못 나오는 거 아닐까?”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윤희.
“음, 내 생각에도 그럴 거 같아.”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는 주현 선배가 리스크를 감당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뭐야, 이 부정적인 여론은?”
규원이가 드물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와 윤희의 반응이 여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거 아냐?”
규원이가 우리를 향해 책망하는 듯한 말투를 썼다.
“나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두고 얘기한 거야.”
윤희가 차분하게 반박했다.
“혹시 모르잖아. 그러니까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안 좋은 기류가 흐르는데.
말리려고 했지만 지아 누나가 한 발 더 빨랐다.
“자자, 거기까지. 우리가 여기서 떠들어봤자 결정은 주현이가 하는 거야. 다들 그 점은 알고 있지?”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우리들을 둘러보고 나서 지아 누나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은정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보자구.”
그제야 윤희와 규원이가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지아 누나가 손뼉을 한 번 가볍게 쳤다.
“고기 식겠다. 어서 먹자!”
우리는 서로를 한 번씩 보고 나서 젓가락을 움직였다.
* * * *
저녁상을 치우는 동안 윤희와 규원이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비록 잠깐이었다고 해도 감정이 충돌한 거니까 추스르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
나는 가능한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움직였다.
“좀 있으면 8시인데…….”
접시를 들고 있는 지아 누나의 시선이 벽시계로 향했다.
누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모두가 일제히 하던 동작을 멈추고 누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몰리자 누나가 살짝 당황했다.
“얘, 얘들아? 기대하는 건 알겠는데 일단 정리부터 하자. 응?”
우리는 다시 하던 일을 재개했다.
솔직한 바람으로 주현 선배가 꼭 왔으면 했다.
스터디드림은 5명이니까. 5명이서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으니까.
정리를 마무리하고 나서 우리는 다시 식탁에 모여 앉았다.
지아 누나가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을 식탁 중앙에 내려놓았다.
모두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시선은 당연히 지아 누나의 스마트폰에 쏠려 있었고.
“……실패했나?”
평소보다 가라앉은 누나의 음성.
규원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에 비해 윤희는 비교적 덤덤했다.
“결과가 어떻든 나한테 알려주기로 했는데…….”
누나가 귀밑머리를 배배 꼬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슬슬 고통스러워질 쯤 전화벨이 정적을 깨뜨렸다.
지아 누나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은정이야.”
우리들에게 알려준 뒤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그러면서 지아 누나가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갖다대었다.
나와 윤희, 규원이는 숨죽인 채 지아 누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단 말이지…….”
중요한 얘기가 나왔는지 지아 누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규원이는 식탁 위에 올려둔 손을 말아 쥐었다.
몇 마디가 더 오가고 나서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대로 나에게 내밀었다.
“저요?”
작게 묻자,
“주현이가 바꿔 달래.”
누나가 얼른 받으라며 손을 움직였다. 나는 재빠르게 수화부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아, 혹시……영재, 지?]
이렇게 특징 있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단 한 명밖에 모른다.
“네, 맞아요!”
반가워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진, 계속……보고 있었어.]
“아하. 저는 아예 신경 안 쓰시는 줄 알았어요.”
[…….]
침묵.
……아무래도 말을 잘못한 것 같다.
나는 얼른 정정에 나섰다.
“아, 그러니까 방금 한 말은, 공부하느라 바쁘실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예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응…….]
“저기, 선배. 혹시 바다 구경 오실래요?”
나는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상대편에서 한동안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귓전에 울리는 건 숨소리뿐.
[……바다, 보고 싶어. 나도…….]
주현 선배가 용기를 냈다.
“네. 그럼 좀 있다 만나요!”
나는 통화를 종료하고, 스마트폰을 지아 누나에게 넘겨주었다.
“온대, 온대?”
“온대.”
내가 힘주어 말하자 모두의 눈빛에 기쁨이 감돌았다.
“주현이와 함께 바다의 청춘을 보내자!”
지아 누나가 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우리 셋도 누나를 따라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들, 스터디드림의 추억 만들기는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