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88화청춘과 바람(3)
* * *
“진짜로?”
깜짝 놀라서 반문하자 윤희가 담담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는 믿으니까.”
윤희의 눈동자에는 확고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이따금 눈꺼풀을 깜빡이면서도 윤희를 계속 바라보았다.
바닷물이 허리춤 부근에서 계속 출렁거렸으나 우리 둘 다 여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아. 적어도 우리 스터디부 멤버들에게만큼은.”
“……괜찮겠어?”
“응. 괜찮아.”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스터디부 멤버에 대한 바위처럼 단단한 신뢰였다.
그때 윤희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왜 그래?”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윤희가 작게 목소리를 냈다.
“……손, 잠시만 잡아줄래?”
윤희답지 않은 부탁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역시 밝히려니까, 긴장되거든……. 잠깐이면 되니깐…….”
간절한 투로 부탁하는데 내가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고, 윤희가 내 손을 맞잡았다.
……이러고 있으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윤희야. 슬슬 놓을…….”
“아직. 조금만 더…….”
“어, 응…….”
손을 맞잡은 채로 얼굴을 마주하면 더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나는 슬쩍 눈길을 돌렸다.
차가운 바다 속에서도 맞잡은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굳은살 하나 박혀있지 않은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윤희의 손.
“영재야.”
다시 얼굴을 마주하자 윤희가 활짝 웃었는데, 왠지 후련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잡은 김에, 수영 강습 더 하자. 아직 더 해야 하니까.”
“그러자.”
나는 윤희의 미소에 대해서 별말 하지 않기로 했다.
윤희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변화해가고 있으니까.
나는 다시 윤희가 시키는 대로 발로 물을 차며 수영을 했다.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니 금세 힘이 빠졌다.
“헉헉. 잠깐만, 쉬자…….”
나는 다시 다리를 바닥으로 내리고는 숨을 골랐다. 윤희는 내 손을 놓은 다음 수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양이 눈 부셨는지 윤희는 한 손으로 손그늘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속내를 입 밖으로 꺼냈다.
“참 신기해. 꽁꽁 숨기고 다닐 때는 이런 다짐을 하면 긴장되서 떨리고 그랬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
윤희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친구가 있어서겠지?”
“물론.”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수영 강습은 언제까지 할 거야?”
그렇게 묻자 윤희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그건 신만이 알아.”
“뭐야 그게.”
윤희답지 않은 엉뚱한 대답에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윤희도 나를 따라 웃었고, 이내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로 키득거렸다.
* * * *
신만이 안다는 수영 강습은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얘들아! 와서 아이스크림 먹어!”
지아 누나의 호출 덕분이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탓에 우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해변으로 걸어 올라왔다.
“둘이 언제까지 손잡고 있을 거야!”
지아 누나가 손나팔을 하고서 외쳤다.
저기, 그렇게 동네방네 광고를 하면 어떡합니까.
근처에 있던 피서객 몇몇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우리는 황급히 서로의 손을 놓았다.
햇볕에 달궈진 모래가 꽤나 뜨거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슬리퍼를 벗어놓지 말걸.
발바닥에 고스란히 전달되는 열기를 참으며 파라솔까지 뛰어갔다. 윤희는 나보다 한발 늦게 파라솔 안으로 들어왔다.
“자, 여기.”
지아 누나가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을 우리에게 건넸다. 두 개 다 똑같은 메론맛바였다.
“잘 먹을게요.”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지아 누나 옆에 앉았다.
윤희는 그런 내 옆에 앉았다.
“오호라…….”
우리를 쳐다보는 지아 누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역시 둘이 엄청 친하네.”
아이스크림을 핥던 규원이가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파라솔 그늘 아래서 다리를 쭉 뻗은 채 여유를 즐겼다.
참고로 우리 넷 중 지아 누나의 다리가 가장 길었다.
키는 내가 제일 큰데 말이지…….
그런 얘기를 꺼내자 지아 누나가 빙긋 웃었다.
“키 큰 거랑 다리 길이는 의외로 별로 상관이 없더라구. 나는 애초에 발레로 다져진 몸이기도 하니까.”
“하긴, 듣고 보니 그렇네요.”
대답하면서 규원이 쪽을 보았다.
지아 누나와 다리 길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물론 나보다도 짧았고.
……정수리가 따가운데.
고개를 들자 규원이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딱 기다려. 내가 우유만 더 마시면 윤희만큼은 길어질 거거든?”
규원이가 검지로 가리키는 곳에 윤희의 다리가 있었다. 이쪽은 나랑 비슷비슷했다.
“규원아. 안타깝지만 우린 이미 성장기가 끝났어.”
윤희가 담담하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유, 윤희야……. 희망을 잃지 말자. 아직 기회는…….”
“그리고 우유는 기호식품일 뿐이니까.”
희망을 달라는 사람에게 절망의 쐐기를 꽂아버리는 윤희.
규원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끝났겠구나.”
“남자는 보통 18살까지 성장기니까 괜찮, 지 않을까?”
“170센치까지는 자랐으면 싶은데.”
윤희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훑어보았다.
“음…….”
“괜찮아.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됐어.”
윤희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냥 말 안 할게.”
그게 더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데 말이지.
지아 누나는 옆에서 쿡쿡 웃을 따름이었다.
우리는 얘기를 멈추고 아이스크림에 집중했다. 그러자 아이스크림이 순식간에 뱃속으로 들어갔다.
“한 개 더 먹어야지이.”
규원이가 아이스박스에서 딸기맛바를 꺼내들었다.
“너무 많이 먹지 마. 알지?”
지아 누나가 주의를 주자,
“응. 그럼, 그럼.”
고개를 움직이며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물었다.
지아 누나가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이제 뭐 하고 놀까?”
“물에서 놀면 되지!”
규원이가 단순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비치볼도 챙겨왔는데.”
옆에서 윤희가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튜브 타고 놀면 되지 않을까요?”
이건 내 의견. 규원이와 내용만 다르지 맥락은 같은 답안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넘치니까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숙소도 가까이에 있고.”
윤희의 얘기까지 들은 누나가 가벼운 신음성을 흘렸다.
“모래찜질도 할까?”
“모래찜질요?”
내가 놀라서 반문하자 지아 누나가 의아해했다.
“해본 적 없어?”
“네.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사실은 그동안 바다에 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는지라 적당히 둘러댔다.
지아 누나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럼 이참에 해보자.”
“오, 좋다!”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규원이가 나무 막대를 흔들며 웃었다.
뜨거운 볕으로 달궈진 모래로 온몸을 뒤덮는다고?
“화상 입는 거 아녜요? 저렇게 뜨거운데?”
그러자 누나와 규원이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윤희도 놀라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진짜로 한 번도 안 해 봤구나…….”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 하겠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보통 바다에 오면 한 번쯤 다 해볼 텐데 싶어서 그래.”
윤희가 순수하게 의문을 표했다.
“넌 화상 안 입었어?”
“응. 그런 적 없어.”
윤희는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일단 안전하다는 뜻인가.
지아 누나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자, 영재야 들었지? 여기서 모래찜질로 화상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걱정마. 이참에 한 번 경험도 해보고. 기껏 바다에 왔는데 안 하면 손해지.”
“영재야. 내가 잘 묻어줄 테니까 걱정말어.”
규원이가 그렇게 말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제일 믿음이 안 가는 녀석이다.
“언니! 바로 옆에다가 묻어주면 될 거 같은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규원이.
“그래야겠네. 파라솔로 그늘도 만들어줘야 하니까.”
당사자를 빼놓고 둘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구만.
지아 누나가 돗자리에서 일어나자 규원이도 따라서 일어섰다.
“윤희야. 모래삽 있지?”
“네, 가져왔어요.”
윤희가 가져온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플라스틱 모래 삽을 꺼냈다.
“언니! 여기요.”
“오케이. 혹시 하나 더 있어?”
“마침 딱 하나 더 있네요.”
이내 윤희가 두 번째 삽도 꺼냈다. 왜 이렇게 준비성이 좋은 거지?
지아 누나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 손님. 영업 개시했으니 어서 오세요.”
그러면서 누나가 내 한쪽 팔을 자신의 팔 사이에 끼웠다.
“호객 행위가 너무 자극적이지 않나요?”
냉정함을 유지하는 척 지적해 보았지만,
“글쎄요오?”
역시 연장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누나에게 묏자리(?)까지 이끌려 왔다.
규원이가 이미 땅을 다져놓은 상태였다. 근데 왜 자리를 두 개나 만든 이유는 뭐지.
“언니! 다른 한 자리에는 누가 누울 거야?”
쪼그려 앉아있던 규원이고 고개를 들었다.
“이걸로 정하자.”
지아 누나가 주먹을 내밀더니 위아래로 흔들었다.
“가위바위보네요.”
윤희가 누나 옆에 섰다. 규원이는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세 사람은 반원 형태로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지아 누나의 구령에 맞춰 세 사람이 동시에 손을 내렸다. 결과는, 규원이의 패배.
“으음, 원래 내가 눕는다는 계획은 없었는데.”
모래에 파묻히면서 규원이가 중얼거렸다.
“가위바위보에 계획이 어딨어.”
윤희가 삽을 움직이며 반론했다.
규원이의 입술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영재야 어때? 화상 입을 것 같아?”
지아 누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모래를 다졌다.
“아뇨. 의외로 괜찮은 것 같네요.”
진짜로 쓰잘머리 없는 걱정을 했었구나.
“거봐. 괜찮댔잖아.”
“그렇네요.”
어느덧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모래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윤희가 나와 규원이 사이에 파라솔을 설치해 주면서 작업이 끝났다.
“윤희야. 이제 얘네들은 버리고 우리끼리 우의를 다지고 올래?”
발랄하게 묻는 지아 누나.
“네, 언니.”
윤희도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은 진짜로 우릴 버리고 바다로 달려갔다.
“어엇! 이러는 게 어딨어! 나도 들어가고 싶어어.”
규원이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다.
“규원아.”
시선을 홱 돌린 규원이를 향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포기하면 편해.”
* * * *
이후 우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놀았다.
지아 누나와 윤희도 모래찜질을 하고, 비치볼로 서로를 맞추는 즐거운(?) 시간도 가졌다.
파도에 몸을 맡겼다가 소금물을 잔뜩 삼키기도 하고, 튜브를 타고 조금 먼 데까지 가보기도 했다.
펜션으로 돌아온 우리는 거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렇게 녹초가 될 만큼 열심히 놀아보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슬슬, 저녁 먹을 준비해야 하는데…….”
“좀 있다 하자, 윤희야.”
내가 간신히 팔만 들어서 제지하자 윤희가 응, 하고 대답했다.
“규원아. 거기 에어컨 리모컨 있어?”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지아 누나의 음성.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그 정도로 격렬하게 놀았으니 지칠 만도 했다.
“으음, 잠시마안…….”
규원이가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안 보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규원이가 다시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우리, 이래서 저녁 먹을 수 있을까.”
“글쎄요…….”
눈꺼풀도 슬슬 감기려는 상태고.
“아 맞다! 주현이한테도 사진 보내야지.”
지아 누나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 뒤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의 스마트폰에서 깨똑, 깨똑 소리가 수 차례 울렸다.
“주현이도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러게 말예요. 같이 추억도 만들고.”
이번에는 윤희가 응답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 내 거다. 여보세요.”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아! 은정아! 오랜만이네.”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친한 친구 같았다.
“거기 기숙학원은 어때? 아, 종일 공부만 해서 좀이 쑤시는구나.”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상대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지아 누나는 통화에 열중하며 이따금 고개를 움직이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나는 지금 바다에 왔어. 부럽지?”
상대편은 지금쯤 지아 누나를 얄미워할 것이다. 분명히.
“어느 바다냐고? 여기 OO해수욕장.”
대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아 누나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어? 진짜?”
대체 무슨 얘기가 오가는 거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윤희와 규원이도 궁금했는지 지아 누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지아 누나가 몇 마디를 더 내뱉고 나서 통화를 종료했다.
“얘들아. 얘랑 주현이가 있는 기숙학원이 여기서 차 타고 10분 거리래.”
“헐?”
규원이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나와 윤희 역시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지아 누나가 우리를 둘러보더니 입술을 떼었다.
“저녁에 주현이 여기로 잠깐만 데려올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