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87화청춘과 바람(2)
* * *
우리는 바다로 향하는 차에 타고 있었다.
“뒷자리는 안 더워?”
조수석에 앉아있던 윤희가 고개를 돌려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뒷좌석에는 순서대로 나, 규원이, 지아 누나가 앉아있었다.
“응! 완전 시원하고 좋아.”
규원이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네.”
윤희가 빙그레 웃고 나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차는 윤희네 부모님의 것이다. 윤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차는 원래 출퇴근용으로 쓰는 것인데, 오늘은 특별히 내어줬다고 한다.
운전기사가 행선지까지 운전해 주는 것은 덤.
지아 누나는 그럼 부모님은 어떻게 출근하냐고 물었고, 윤희가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이거보다 더 좋은 차가 있으니까요.”
그 대답에 우리 셋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이렇게나 고급스러운 차가 두 대씩이나 있다니…….
역시 부자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보통 고등학생들이 바다에 놀러 가려면 버스나 기차를 타고 움직일 텐데.
“그래도 이렇게 자가용 타고 가니까 훨씬 편하고 좋다.”
지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는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누나는 턱을 괸 채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진짜 다행이죠.”
“맞아, 맞아!”
나와 규원이가 맞장구를 치자 윤희가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부탁한 거야. 우리끼리 그 많은 짐을 다 들고 다니려면 힘들잖아.”
“덕분에 살았어.”
윤희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무거운 짐은 내가 대부분 챙기고 있었을 테지.
문득 윤희가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가 무얼 걱정했는지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던 것처럼.
사실 일주일 전 바다에 놀러 가자는 윤희의 제안을 들었을 때, 나는 좀 망설였다. 경비 부담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예전부터 단골이었던 펜션에 예약해놓으실 거랬어. 식대나 기타 비용도 따로 주신다고 하셨고. 그냥 갈아입을 옷이랑 세면도구만 챙기면 될 거야.]
“그렇게 신세 져도 되는 거야?”
[할아버지가 해주시겠다고 한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부원들끼리 좀 더 유대감을 다지라는 의미도 있는 것 같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윤희의 말처럼 된다면,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다.
“고마워.”
그나저나 놀러 가는 일에 유대감이라니……. 너무 거창한 의미 부여 아닌가.
이후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윤희가 나에게 전화로 말했던 내용을 깨톡방에 그대로 올렸고, 두 사람은 흔쾌히 찬성했다.
우리는 지아 누나가 귀국하는 시점을 고려하여 출발 날짜를 정하고, 무얼 할지에 대한 계획도 세웠다.
“흐으, 빨리 바다에 뛰어들고 싶다아. 윤희야. 얼마나 더 가야 해?”
규원이가 근질거리는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윤희가 운전기사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30분 정도면 도착해요.”
운전기사의 답변에 규원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허얼, 30분이나 더…….”
“30분이면 금방이잖아. 좀만 참아.”
내가 옆에서 말해도 규원이는 끄으응, 앓는 소릴 내었다.
“오랜만에 내 인생에서 가장 긴 30분이 될 거야…….”
“푸훗.”
계속 차창 밖을 응시하던 지아 누나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것을 신호로 나와 윤희도 가볍게 웃었다.
“나는 지금 심각하거든?”
규원이의 항변에 우리 셋은 한 번 더 웃었다.
바다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
운전기사의 말대로 정확히 30분 후, 우리는 펜션에 도착했다. 게다가 우리의 짐을 옮기는 일도 거들었다.
우리가 감사 인사를 하자 기사는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내일 오후 4시에 데리러 올게요.”
운전 기사가 펜션을 나섰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바닥이나 벽면이 깔끔했고 싱크대와 조리대, 큼직한 TV 등등의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거실도 상당히 넓었다.
“얘들아. 우선 냉장고부터 채우자.”
우리들 중 유일하게 연장자인 지아 누나가 진두지휘에 나섰다. 나는 식재료가 담긴 박스를 냉장고 앞으로 옮겼다.
“너는 얼굴로 힘쓰나 보네.”
나는 규원이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네가 들어볼래?”
“굳이?”
퉁명스레 쏘아붙였더니 오히려 놀림조로 받아쳤다.
“너희들. 그만하고 빨리 넣기나 해.”
윤희는 이미 냉동실에 바비큐용 고기를 채우는 중이었다.
나는 규원이와 함께 나머지 식재료들을 냉장실에 채워 넣었다. 그러면서 지아 누나의 동태를 슬쩍 곁눈질 해보았다.
누나는 미리 챙겨온 튜브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나는 냉장고 정리가 끝나자마자 지아 누나에게 다가갔다.
“도와드릴까요?”
“오, 마침 잘 왔네. 옆에 앉아.”
나는 누나가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자리에 앉았다. 누나가 여분의 펌프를 내밀었다.
“언니이! 나도 할래!”
규원이가 슬라이딩을 하여 누나 옆으로 다가왔다. 얘는 언제쯤 철이 들려나?
지아 누나는 매우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펌프 하나를 규원이에게 주었다.
윤희만이 우리와 끼지 않은 채 냉장고 정리에 전념하고 있었다.
우리 셋은 열심히 펌프질을 하며 튜브를 부풀렸다.
“그나저나 영재야. 너 수영 잘해?”
튜브 하나를 다 부풀렸을 쯤 누나가 물음표를 던졌다.
“아뇨. 맥주병이에요.”
“오! 그럼 나랑 동지구나?”
규원이가 펌프질을 하다 말고 반색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동지로구만.
나는 일부러 규원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규원이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괜찮아. 수영 못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지아 누나가 나와 규원이의 어깨에 팔을 건 채 명랑한 음성을 냈다.
“이참에 둘 다 수영 배울래? 나 접영까지 할 줄 알거든.”
“튜브 있어서 괜찮을 거 같은데.”
규원이라면 의욕에 넘쳐서 좋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음, 바다에 빠질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도 않을 거고.”
“배워두면 좋을 텐데…….”
호응이 없어서 그런지 지아 누나가 못내 아쉬워했다.
어느덧 튜브 세 개에 모두 바람을 채워 넣었다. 그 사이 윤희도 냉장고 정리를 모두 끝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해변으로 놀러 나가는 것!
참고로 이곳에서 해변까지는 걸어서 불과 3분 거리였다.
“미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가면 되겠네! 빨리 갈아 입어야지이.”
규원이가 무척 들뜬 얼굴로 가방에서 수영복을 꺼냈다. 그것을 신호로 윤희와 지아 누나도 각자의 가방에서 수영복을 꺼냈다.
“영재야.”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지아 누나가 나를 불렀다.
“눈 호강할 준비해.”
누나는 마무리로 윙크를 발사했다.
그 순간 내 심장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불타오른다!
그때 어디선가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윤희가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도 남자구나.”
“응?”
언제는 남자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윤희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수영복을 손에 쥔 채 내게 다가왔다.
“아까 언니한테 수영 잘 못한다고 했지?”
“응, 그랬지.”
“나한테 한 번 배워볼래? 그래도 평영까지는 할 줄 알거든.”
“내가 놀러온 건지, 수영교실 온 건지 모르겠네.”
누나뿐만이 아니라 윤희마저 수영 교습에 의욕을 내비치니 이걸 뭐라 해야 할지…….
묘한 상황이 된 것 같아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따로 할 얘기도 있어서 그래.”
이어진 윤희의 설명에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고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윤희가 표정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내 수영복도 기대해.”
그 말을 남기고 윤희가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윤희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지아 누나에 이어 윤희까지…….
내 인생에 이렇게나 빨리 황금기가 찾아오다니.
남자로 태어나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이윽고 세 여자가 거실로 나왔다.
규원이는 큼직한 꽃봉오리가 그려진 흰색 원피스 수영복을 착용했다. 치맛자락이 짧아서 약간 살집이 있는 다리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들자 유독 평평한 구간이 시야에 크게 잡혔고,
“잠깐 거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니! 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규원이가 드물게 싸늘한 시선을 쏘아 보내기에 나는 재빠르게 부정했다.
내 명줄을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음은 윤희.
윤희는 옆구리와 등을 훤히 드러내는 주황색 모노키니 차림이었다.
티 한 점 없는 우윳빛 피부. 늘씬하게 뻗은 다리.
연보랏빛 머리칼은 위로 올려서 묶은 모습이었다.
누구 씨와 다르게 들판이 아니라 곡률이 있어서 묘한 성숙미가 느껴졌다.
윤희가 부끄러운지 상체를 살짝 웅크렸다.
“……어, 어때?”
“좋아…….”
솔직담백한 평을 내놓았다.
“영재야! 나도 봐봐.”
마지막은 지아 누나였다.
일단 한 마디 평을 하자면 과감함, 그 자체였다.
어지간한 자신감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입지 않는 비키니 차림이었으니까!
지아 누나는 윤희와 달리 무척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왼손을 허리춤에 올리는 자세를 잡기까지 했다.
베이지색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모습.
검은색 비키니와 새하얀 피부가 무척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오랫동안 발레를 해온 덕분인지 앞의 두 사람보다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매끈하게 잘 뻗어있는 팔과 다리에, 적나라하게 보이는 가슴골까지…….
“어때? 눈 호강 돼?”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양 엄지를 치켜 세웠다.
“언닌 좋겠다, 패드 안 해도 되고…….”
누구 씨의 선망 어린 시선이 누나에게 들러붙었고, 누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윤희 너도…….”
그러자 윤희는 얼른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그나저나 영재는 엄청 평범하네. 수영복 바지에 셔츠, 그리고…….”
지아 누나의 시선이 내 이마에서 딱 멈추었다.
“수경은 왜?”
“아, 혹시나 해서요.”
“그거 하지 마. 이상해.”
“동감!”
지아 누나의 의견에 찬동하는 규원이.
“하고 있으면 불편할 거야.”
윤희마저 반대 의사를 표했기에, 나는 압도적인 여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튜브와 그 외 물놀이 용품을 챙겨서 바다로 향했다. 잘 정비된 인도를 따라 조금 걷자 금세 해변이 나타났다.
해안선을 따라 밀려 올라오다가 스르륵 내려가는 파도와 소금빛깔 포말이 금빛 모래를 쓸어 담아가는 광경.
TV에서나 보던 바다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허얼! 사람 별로 없다!”
옆에서 규원이가 기뻐하며 외쳤다.
둘러보니 정말로 피서객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 등장하는 해수욕장은 대부분 사람들끼리 치이고 부딪치고 난리도 아니던데.
“여기는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그래.”
윤희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얘들아! 빨리 들어가자.”
그러더니 지아 누나가 푸른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도 질세라 얼른 뒤따라 달렸다.
때마침 파도가 올라오고 있었고, 누나가 파도를 맞으며 거침없이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규원이는 힘차게 달려들다가 파도를 맞고 벌러덩 넘어졌다.
“흐억, 짜!”
규원이가 주저앉은 채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댔다.
머리칼이 미역 덩이처럼 엉겨 붙어있는 모습에 나와 윤희는 배를 잡고 웃었다.
지아 누나가 발과 종아리에 모래를 덕지덕지 묻힌 채 뭍으로 올라왔다.
“아 시원해라.”
우리들의 정수리 위에 떠 있는 환한 태양처럼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때 지아 누나가 나에게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부드러운 촉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때 누나가 목청껏 외쳤다.
“얘들아! 잡아!”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희와 규원이가 내 팔과 다리를 붙들었다. 그러더니 나를 완전히 들어 올렸다.
“엇, 잠깐만!”
나는 버둥거렸으나 세 여자의 괴력(?)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지아 누나가 던지라고 지시를 내렸고,
“으아악!”
나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눈도 못 뜬 채 허우적거리면서 간신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수난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물세례를 퍼붓고 있었으니까.
3대1.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으아아! 그만, 그마안!”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외쳤더니 구세주와 같은 윤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이쯤 하자.”
그제야 물세례가 멎었고, 간신히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어때? 재밌었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지아 누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죽을 뻔했는데요.”
일부러 정색했지만 지아 누나는 하하 웃어넘겼다. 규원이는 아예 배를 부여잡은 채 폭소하고 있었고.
우리는 다시 모래사장으로 올라와서 파라솔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돗자리를 깔았다. 그런 뒤 아이스박스를 놓았다.
작업을 끝냈더니 윤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지금 수영 배우러 갈래?”
고개를 끄덕인 나는 윤희와 함께 움직였다. 그때 옆에서 지아 누나가 우리를 불렀다.
“너희들 어디 가?”
“윤희가 수영 가르쳐 준다고 해서요.”
“엥? 내가 가르쳐 준다고 할 땐 거절해 놓고.”
“그런 게 있어요.”
나 대신 응답한 윤희가 슬쩍 내 손을 잡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지아 누나가 눈썹을 움찔했다.
사실 놀라기는 나도 매한가지였지만.
“……그렇구나. 알았어.”
우리는 파라솔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바다로 들어가자 윤희가 양손을 내밀었다.
“자, 먼저 내 손 잡고 다리를 뒤로 들어 봐.”
발을 떼자 부력 덕분인지 몸이 물에 떠올랐다.
“그 상태로 발을 차 봐.”
나는 윤희가 시키는 대로 했다.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익숙치 않은 탓인지 금세 체력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잠깐 쉬자고 했다. 윤희가 알겠다고 하면서 손을 놓아주었다.
“근데 무슨 얘길 하려는 거야?”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더니 윤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우리 스터디부 멤버들한테만 얘기하려고 해.”
“어떤 걸?”
윤희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사장이라는 사실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