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 86화­청춘과 바람(1) (86/131)

〈 86화 〉 86화­청춘과 바람(1)

* * *

장마가 물러간 덕분에 날씨는 무척이나 맑고 쨍쨍했다.

그나저나 이 무더위는 인간적으로 너무 배려가 없는 것 아닐까.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오후 1시 10분.

대략 3시간 정도 공부했군.

나는 앉은 채로 기지개를 쭉 켠 뒤 스터디드림 깨톡방으로 들어갔다.

지아 : 나 이제곧 비행기 타~ 너희들 선물 꼭 사올게^^

지아 누나는 지난주에 예고한 대로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박 5일 일정으로 잡힌 가족 여행.

어제 낮에 출국했으니 지금쯤 한창 관광을 즐기고 있겠지.

참 부럽구만.

나는 해외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처지인데.

하지만 내가 못 갖는 것에 대한 불만은 딱히 없었다. 내가 이래 뵈도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는 하지 않는 주의거든.

나는 엄지로 스크롤을 밀어 올리면서 밑으로 이어진 깨톡 메시지를 하나씩 읽었다.

윤희 : 베트남은 교통편이 좀 불편할 거예요. 오토바이도 많이 다니니까 조심하세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라는 게 확 와닿았다.

규원 : 언니 완죤부럽다! 우리 가족은 올해 여행계획 하나도 없대ㅠㅠㅠㅠㅠㅠㅠㅠ

이쪽은 나보다도 훨씬 더 부러워 죽으려 하고 있고.

물론 나도 깨톡을 보내놓았다.

나 :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무난하고 알맞은 인사.

지아 누나는 바로 아래에 ‘OK' 이모티콘을 대화창에 띄웠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는,

지아 : 호치민탄손누트공항 도착!

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 여러 장이 우르르 업데이트 되었다.

대부분 셀카였는데, 누나의 표정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풍경만 담은 사진도 몇 장 있었다.

확실히 외국은 다르구나.

나 : 오오..

규원 : 언니 짱이쁨!

윤희 : 잘 도착하셨네요. 거기 많이 덥죠?

나와 규원이와 달리 윤희는 상당히 차분한 반응이었다.

지아 :응! 확실히 덥네.. 비 한번만 뿌려주면 좋겠다~

깨톡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누나가 호텔에 체크인하고 나서 올린 사진이라든가.

관광지를 돌며 찍은 사진들.

베트남 음식 사진들.

거리의 풍경.

기타 등등.

오늘 아침에도 다른 관광지로 떠난다며 출발할 때의 모습을 업데이트해두었다.

실황을 브리핑해주는 덕에 나도 여행을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부러움도 더 커졌지만.

뱃속에서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3시간 전쯤에 먹은 아침이 벌써 다 소화되었을 줄이야.

공복 상태에서는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뭐라도 먹어둬야 한다.

나는 선풍기 전원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슬기가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방학 숙제는 저만치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

숙제는 과연 얼마나 했으려나 궁금하여 문제집을 확인해 보았다.

“…….”

겨우 다섯 문제만 풀었군. 심지어 세 문제는 오답.

지정해 준 범위는 10페이지인데 말이지.

“슬기야.”

“응?”

대답하면서도 눈은 여전히 TV에 고정된 상태였다.

“뭘 그렇게 집중해서 봐?”

“오빠아, 저거 봐봐. 엄청 맛있어 보여어.”

슬기가 검지로 TV를 가리켰다.

나는 문제집을 내려놓고 슬기의 곁으로 다가가서 쪼그려 앉았다.

본 적 없는 예능 방송이었는데, 출연진들이 다 함께 모여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었다.

갓 만들어냈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동그란 형태를 한 계란프라이가 밥 위에 살포시 얹혀 있고…….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오빠.”

고개를 돌리자 슬기와 눈이 마주쳤다.

“김치볶음밥 할 줄 알아?”

“음, 재료만 있으면야…….”

어차피 스마트폰으로 레시피 알아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되니까.

“진짜루? 그럼 나 저거 해 줘. 참치 넣어서.”

슬기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참치? 집에 있나?”

나는 일어서서 부엌으로 향했다. 수납장을 열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다행히 김치와 계란, 밥은 충분했다.

“슬기야. 꼭 참치 넣어야 해?”

“여기서도 참치 넣었단 말야. 꼭 있어야 해!”

슬기가 TV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지간히도 당기는 모양이구만.

“잠시만 있어 봐.”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동전 지갑을 확인해 보았다. 총액 12,870원이 있었다.

이번 주에 점심값으로 나갈 돈을 제외한다면 4천원까지는 쓸 수 있는 셈.

슬기를 위해서인데 그 정도가 아까우랴.

나는 동전 지갑과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방을 나섰다.

“슬기야. 나 마트 좀 다녀올게.”

“혹시 엄마가 일하는 곳?”

“응.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아아 잠깐만! 같이 가. 심심해.”

생각해 보니 슬기도 집에만 박혀있는 것보다 바람 쐬러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머리는?”

슬기의 머리칼은 자다가 막 일어난 사람처럼 부스스한 상태였다. 내 지적을 받자마자 슬기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다 됐어!”

“그냥 모자 써.”

“귀찮은데…….”

불평을 입에 담으면서도 슬기는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슬기가 머리에 쓴 것은 예전에 산 하얀색 캡모자였다.

이것으로 외출 준비 끝.

우리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득 김치볶음밥의 마성에 휘둘려서 방학 숙제에 대한 지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싱글벙글한 슬기의 모습을 보니 지금 당장 화제로 삼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돌아와서 얘기하도록 해야겠구만.

“가자.”

“응!”

고개를 끄덕인 슬기가 활짝 웃었다.

* * * *

엄마가 일하는 마트에 도착했다.

한낮이어도 손님이 좀 있는 편이었다.

에어컨을 켜놓은 덕에 주변 공기가 시원했다.

“후우, 들어오니까 살 것 같네.”

팔뚝으로 이마를 슥슥 문지르자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늘 사러 온 것은 참치캔. 그것도 가장 작은 것으로 하나.

속으로 되뇌고 나서 눈으로 마트 안을 둘러보았다.

채소 코너에서 마트 유니폼을 걸친 채 일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어? 엄마다. 엄마아!”

미처 제지할 새도 없이 부리나케 달려가는 슬기.

그 외침에 엄마가 일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고, 정확히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참치 사러 왔엉!”

엄마 앞에 멈춰 선 슬기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야. 엄마 일하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

뒤따라온 나는 늦게나마 슬기의 어깨를 붙들었다.

엄마가 우리를 보며 웃음소릴 내었다.

“괜찮아. 지금 한가하니까. 그나저나 참치로 뭐 하려고 그러니?”

“오빠가 김치볶음밥 해준댔어.”

나를 대신하여 슬기가 대답을 가로챘다. 기대감에 가득 찬 음성이었다.

“우리 아들 볶음밥도 할 줄 알아?”

“그건 아닌데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잖아. 그거 보고 하려고.”

“엄마가 맛있게 하는 방법 아는데 알려줄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냐, 엄마 일하고 있는데 무슨. 그리고 지금 들어도 집 가면 까먹을 걸.”

“엄마. 나 과자도 하나 사도 돼?”

슬기가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볶음밥이면 충분하지 뭘 더 먹으려고 그래. 엄마, 우린 이만 가볼게.”

나는 슬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슬기는 끌려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너 이러면 볶음밥이고 뭐고 안 해준다?”

“윽…….”

슬기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아들. 이리 와 봐.”

“왜?”

엄마가 계속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슬기의 옷깃을 놓고 엄마에게 다가갔다.

“참치는 뭘로 사려고?”

“용돈 충분히 남아있으니까 그걸로 사게. 제일 작은 사이즈로 해서.”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엄마가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지갑에서 오천원권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걸로 사. 용돈은 점심값으로 써야지.”

“아이, 괜찮다니까.”

나는 손사래를 쳤다.

“너도 먹고 싶은 과자 하나 사.”

“나 군것질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한사코 거부해도 엄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엄마 일해야 해. 빨리.”

그렇게 얘기하니 안 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오천원을 받아들었다.

“와아, 엄마 최고!”

슬기는 옆에서 엄지를 세우기 바빴다.

엄마가 그런 슬기에게 인자한 눈길을 보냈다.

“알뜰하게 쓸게.”

그때 옆 코너에서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에!”

엄마가 고개를 틀고 목청껏 답했다.

“여기 와서 일 좀 거들어 주세요.”

“금방 갈게요.”

엄마의 눈이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엄마 이제 가봐야겠다. 너희들은 조심히 들어가렴.”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곧장 몸을 돌려서 옆 코너로 달려갔다.

“엄마 바쁘니까 빨리 사서 나가자.”

“응.”

슬기는 내가 이끄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왔다.

여기에는 몇 번 와본 경험이 있어서 헤매지 않고 금세 참치캔을 찾아냈다.

“우리 큰 걸로 하자.”

“아냐. 작은 걸로 해도 충분히 먹어.”

나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캔을 집어 들었다.

“칫. 짠돌이.”

“이런 걸 두고 합리적인 소비라고 하는 거야. 온 김에 잘 봐둬.”

“…….”

슬기의 입술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과자도 하나 살 거니까 입술 집어넣어.”

그러자 슬기가 입술을 완전히 오므렸다.

우리는 참치캔 말고도 라면 다섯 봉지와 과자 하나를 골랐다.

총 금액 5,500원.

아까 받은 돈과 원래 갖고 있던 돈을 합쳐 계산했다.

슬기는 과자를 품에 안았고, 나는 라면과 참치캔을 챙겼다.

엄마는 어디쯤에 있으려나.

두리번거리다가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다.

인사라도 하고 갈 요량이었는데 물품을 옮기랴, 진열하랴 정신이 없어 보였다.

다가가면 괜히 방해가 될 것 같군.

“가자.”

“엄마한테 얘기 안 하고?”

“지금 일하고 있잖아.”

나는 엄마가 있는 방향으로 턱짓을 했다. 슬기가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자.”

“응.”

슬기가 내 옆에 섰다.

우리는 마트 바깥으로 나왔다.

가는 동안 김치볶음밥 레시피라도 찾아볼까.

하지만 양손에 짐을 들고 있으니 스마트폰을 꺼낼 수가 없었다.

“슬기야. 라면 좀 들어봐.”

“난 더 이상 못 들어.”

슬기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위해서라구. 너 내가 맛없게 만들면 좋아?”

도리도리.

“근데 오빠, 집에 가서 알아봐도 되지 않아?”

슬기가 매우 드물게 날카로운 지적을 날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이미 예상 범주.

“자, 슬기야. 잘 생각해 봐. 지금 가면서 미리 레시피를 알아두면 집에 가자마자 바로 요리를 시작하겠지?”

“응.”

“근데 집에 들어가서 레시피를 찾아보고 있으면 그만큼 늦어지지 않을까?”

“……듣고 보니 그렇네.”

“기다릴 자신 있으면 집 가서 찾아볼게.”

“아, 아냐! 라면 내가 들게.”

나는 슬기의 빈손에 라면을 넘기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나 : 여기서 김치볶음밥 맛있게 할줄 아는 사람 구함!

깨톡을 올리자 순식간에 답장이 왔다.

규원 : 내가 김치볶음밥은 좀하지 엣헴

젠체하는 어투가 맘에 들지 않아서 패스.

규원이가 요리하는 모습 자체가 상상이 되지 않기도 하고.

윤희 : 나는 그거 할 때 백중원 선생님 레시피대로 해.

나 : 백중원선생님?

규원 :허럴??? 영재 설마 모름????

규원이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나 :아아 그분~

규원 :오올~ 기억해냈네 ㅎㅎ

윤희 : 잠깐만.

잠시 후 윤희가 어느 사이트의 링크를 톡방에 올렸다.

윤희 : 여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참고하면 될 거야.

나 : ㅇㅋ 쌩큐~

나는 곧장 사이트의 주소를 클릭했다.

* * * *

백중원 선생님의 김치볶음밥 레시피는 간단하면서도 훌륭했다.

그릇을 말끔하게 비우고 난 뒤 과자도 슬기와 함께 나눠 먹었다.

그러면서 오늘 방학 숙제는 무조건 정해 준 분량까지 풀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으으. 하기 싫은데…….”

“그럼 오늘 쉬고 내일 두 배로 할까?”

내 제안에 슬기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몰아서 하는 거보단 매일 조금씩 하는 게 훨씬 나아. 그러니까 꼭 풀어야 해. 알았지?”

“응…….”

슬기의 대답이 시원찮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계속 감시할 예정이므로.

과자를 약간 남겨둔 상태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네가 설거지해 놓도록 해. 볶음밥 내가 했으니까.”

“그러면……. 지금 바로 할래!”

슬기가 상을 번쩍 들어 올린 뒤 싱크대로 향했다.

나는 공부를 재개하기 위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서 몬아미 볼펜을 집어 든 찰나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윤희.

윤희가 전화를 거는 건 간만의 일인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영재야. 공부하고 있었어?]

“아쉽게도 틀렸어. 이제 막 공부를 하려던 참이었거든.”

나는 허공에 대고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래도 공부랑 연관은 있었네.]

“50퍼센트 정답으로 인정할게.”

내 응답을 들은 윤희가 입을 가린 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조금 전에 할아버지가 한 가지 제안했거든. 스터디드림에 관련해서.]

이사장님이 화제에 오르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뭔데?”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좋지 않은 대답들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

불과 수 초밖에 안 되는 침묵.

하지만 내게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윤희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부수며 들어왔다.

[우리 멤버들끼리 바다에서 놀다 오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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