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85화한 발 더 깊이(2)
* * *
나는 지아 누나를 따라 상가 건물 3층까지 올라갔다. 누나는 ‘발레강습소’라고 적힌 유리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자.”
누나는 거침없이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면 자기 방에 들어가는 줄 알겠네.
“여기 신발장에 있는 슬리퍼 신고 들어오면 돼.”
나는 누나의 말대로 샌들을 벗은 뒤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실내를 둘러보니 공간이 꽤 널찍한 편이었다. 밖에서는 그렇게 안 커 보였는데.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이었다.
그때 ‘원장실’ 팻말이 적힌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누구세……. 어머! 지아 왔구나!”
“안녕하세요.”
누나가 밝게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고, 나도 한 박자 늦게 인사했다.
보아하니 지난번에 얘기한 발레 선생님인 모양이구만.
그녀는 머리칼을 뒤로 묶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까만 레오타드가 늘씬한 몸매를 강조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남자애는? 남자친구?”
나와 지아 누나가 그런 사이로 보였다면 나쁘지 않은 오해인데.
하지만 지아 누나는 양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아녜요. 그냥 같은 동아리의 후배예요. 이름은 한영재라고 하고요.”
“그래? 너라면 지금쯤 애인 한 명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쉽네.”
“조만간 생기겠죠, 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지아 누나가 손뼉을 치더니 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 맞다! 소개해 드려야지. 이분은 내가 발레 시작했을때부터 지도해 주신 선생님이셔. 지금은 여기 원장님이시고.”
“반가워.”
원장님이 눈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흔들었고, 나는 재차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혹시 발레에 관심 있니? 우리는 신입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거든.”
“아, 저, 그게…… 제가 상당한 몸치라서요.”
답하고 나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몸치라도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몸치인 애들이 더 많이 등록해.”
“선생님 말이 맞아. 나도 어릴 땐 이 정도로 유연하지 않았거든.”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 지아 누나.
“그래요?”
“못 믿는 거야?”
“저는 이런 분야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는 주의라서요.”
“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누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원장님이 한 마디 보탰다.
“발레가 자세 교정이나 키 크기에 좋아. 전신의 근육을 쓰기 때문에 운동 효과도 뛰어나고. 그래서 운동을 하기 위해서 등록하는 사람들도 많아.”
“아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이거, 영업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이쪽 화제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 듯했다.
“아, 그럼 생각을 좀 해볼게요. 부모님께도 여쭤봐야 해서.”
“천천히 생각해. 할 마음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주고.”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옆에서 지아 누나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오늘 연습 좀 해봐도 될까요?”
“응, 얼마든지. 지금은 수강 시간도 아니니까.”
원장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발레하는 모습을 보겠네.”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지아 누나가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쑥스러워했다.
“레오타드는? 없으면 내 거 빌려 입으래?”
하지만 지아 누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리 챙겨 와서 괜찮아요.”
누나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노란 목욕 가방을 꺼냈다. 처음부터 여기에 올 계획이었구만.
“그나저나 요즘 애들은 방학에도 학교에 나가지?”
원장님의 눈길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아 누나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가방을 메고 있어서 물어본 것 같았다.
“체대 입시 준비하는 애들은 아침부터 와서 연습하고 그러거든. 요즘 고등학생들은 다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아, 저희 학교는 3학년들만 와요. 저랑 누나는 부 활동을 하느라 학교에 다니는 거구요.”
“아하. 무슨 동아리길래?”
“스터디부예요.”
나 대신 지아 누나가 대답했다.
“열심히 하는구나.”
“공부해야죠. 체대는 이미 못 가게 됐으니까요.”
누나가 입술을 살짝 움직여서 웃음을 그렸다.
“그렇지. 어쩔 수 없지…….”
원장님이 중얼거리듯이 내뱉는 말에는 쓰디쓴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저는 진짜로 괜찮아요.”
나긋한 어조로 말하는 지아 누나.
누나는 벽으로 다가가서 가방을 세워놓았다.
“선생님. 탈의실 빌릴게요.”
“저기 원장실 옆이야. 알지?”
“그럼요.”
원장님이 가리키는 곳으로 누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너도 가방 벗고 편하게 있어.”
“아, 네.”
나는 지아 누나의 가방 옆에 내 가방을 내려놓고 나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탈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재, 라고 했지?”
“네. 맞아요.”
“지아가 발레를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네.”
“네. 최근에 누나가 얘기해줬어요.”
“그렇구나…….”
말끄트머리를 삼킨 원장님이 벽 한쪽에 정리해놓은 쇠봉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중 하나를 골라서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다가 원장님에게 다가갔다.
“도와드릴게요.”
“아냐. 보기보다 가벼운 거니까. 그리고 손님에게 일 시키는 거 아냐.”
원장님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밀었던 손을 어색하게 거두었다.
“이 쇠봉은 어디에 쓰는 거예요?”
어색한 기분을 덜어내고자 질문을 던졌다.
“양손 바라고, 발레 연습할 때 주로 쓰는 거야.”
원장님이 양손 바를 공간 한가운데에 내려놓고 나자 지아 누나가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며칠 전에 본 적 있는 연분홍빛 레오타드를 입고 있었다.
어깻죽지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머리칼은 포니테일로 정리한 상태였고, 발레용 하얀 스타킹에 토슈즈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며칠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치마를 입지 않아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새로 산 거니? 잘 어울리네.”
“그쵸?”
활짝 웃는 지아 누나.
그러고 나서 사뿐사뿐 걸어와서 양손 바를 쥐었다.
“영재야. 잘 봐.”
발랄한 음성에 나는 눈을 들었다.
분명 똑같은 레오타드인데도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는 오리들 사이에 낀 백조처럼 돋보였다면, 여기서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조화로웠다.
분위기, 때문일까?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누나에게 여기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은 없다는 사실을.
“음악 켤게.”
원장님이 잰걸음으로 원장실로 향하는 동안, 지아 누나는 심호흡을 내뱉고 활 모양이 되도록 허리를 최대한 폈다.
이따금 깜빡거리는 눈꺼풀.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진지한 눈빛.
잠시 후 실내에 잔잔한 음악이 깔렸다.
원장실을 나온 원장님이 문에 기댄 채 섰다.
시선은 지아 누나에게 고정.
“3번 포지션. 앙 바(En Bas).”
원장님의 한 마디에 지아 누나가 몸을 움직였다.
허리를 곧추세운 상태에서 왼발 뒤꿈치가 오른발의 오목한 곳에 수평이 되도록 붙였다. 아랫배에 가지런히 모인 팔은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발레의 ‘ㅂ’자도 모르는 내 눈에도 완벽해 보이는 자세였다.
“앙 아방(En avant)."
발동작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지아 누나가 두 팔을 가슴과 명치 사이 높이만큼 들어 올렸다.
둥그런 모양이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5번 포지션. 앙 오(En haut)."
둥그런 모양을 유지한 채로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발은 앞부분이 서로 교차되도록 하여 오른발이 왼발 뒤로 밀착. 무릎이나 허리가 구부러지는 일 없이 일자를 유지했다.
“오오…….”
나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감탄을 흘렸다.
이후로도 원장님의 지시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지아 누나는 팔과 다리를 움직여가며 다양한 자세를 선보였다. 마치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연결.
사소한 손짓마저 동작과 어우러지며 보는 이를 황홀경 속으로 밀어 넣었다.
실내를 가득 메우는 음악과 어우러지는 몸짓은 가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쪽 다리를 양손 바에 올려놓고 발가락으로 서는 동작을 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잘하지?”
바로 곁에서 들리는 음성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맞은편에 서 있었던 원장님이 어느새 다가온 것이었다.
“……네.”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다시 지아 누나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나는 이 순간 발레리나 정지아에게 홀린 관객이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원장님은 더 이상 누나에게 동작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지아 누나 홀로 동작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
원장님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닿았다.
“지금도 계속 발레를 했더라면 아마 세계무대에 설 수 있는 발레리나가 되었을지도 몰라.”
“…….”
멍하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동자는 오로지 지아 누나의 몸짓을 좇아가기 바빴다.
음악이 점점 격정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클라이맥스일까.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황홀한 순간도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눈꺼풀을 움직이는 일조차 잊어먹은 채 누나에게 시선 고정.
하지만 끝은 의외로 너무도 싱거웠다.
지아 누나가 어떤 동작을 앞둔 채 멈칫해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팔을 서서히 내렸다.
고조되어 가던 음악은 홀로 마라톤을 하게 되었다.
지아 누나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원장님이 원장실로 후다닥 달려가서 음악을 껐다.
“하아.”
지아 누나가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뒤 바닥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왼쪽 발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지아 누나가 도중에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곁으로 다가가자,
“조금만 풀어주면 돼.”
지아 누나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원장님도 누나 옆으로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니? 파스 붙여줄까?”
“에이, 그 정돈 아녜요. 그냥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봐요.”
누나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있는 위치에서는 누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아마도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겠지.
“이리 줘 봐.”
원장님이 아예 누나의 다리를 들어 올려서 부드럽게 발목을 돌려주었다.
누나가 미간을 찌푸린 채 가끔 신음성을 흘렸다.
“으음. 죄송해요…….”
원장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 네가 다리에 쥐 났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풀어준 거.”
“그러게요. 이렇게 케어받는 거 오랜만이네요.”
배시시 웃는 두 사람.
주고받는 눈길이 오랜 시간 친분을 다져온 사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영재야. 미안해. 끝까지 하려고 했는데.”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로 푹 빠져서 봤으니까요.”
“고마워.”
원장님은 여전히 지아 누나의 발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신호가 왔었니?”
“네.”
“잘했어. 그때 무리했으면 더 큰일 났을 거야.”
“그날 이후로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는데 어딘가 서글픈 미소였다.
“이제 어때? 괜찮아?”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원장님이 지아 누나의 다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누나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고마워요, 선생님.”
원장님은 응답 대신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 * * *
발레강습소를 나섰을 때는 해가 서편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가는 중이었다.
“아아, 개운하다.”
지아 누나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누나는 발레를 끝내고 나서 샤워장에서 샤워도 했다.
“땀에 젖은 옷을 또 걸치는 건 기분이 좀 그렇지만.”
“아. 그 기분 잘 알죠.”
나는 동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란히 걷고 있던 도중에 지아 누나가 걸음을 멈췄다.
“나 어땠어?”
“진짜 대단했어요. 아름답고 멋지고, 원더풀!”
내가 들어도 흥분에 찬 목소리였다.
“왕년이었으면 그 정도 칭찬으로 안 끝났을 걸?”
누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당겼다.
“하하. 저도 제가 아는 모든 감탄사를 다 활용하지는 않았죠.”
“요것 봐라? 요즘 받아치는 솜씨가 아주 예술인데.”
“이게 다 하늘 같은 어느 선배님 덕분이죠.”
우리는 수 초간 서로를 응시하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 뒤에 진정하고 나서 나는 누나에게 제안했다.
“바래다줄게요.”
“괜찮아. 시간도 늦었고.”
“아직 벌 안 끝났잖아요. 게다가 눈 호강도 시켜줬는데.”
“으으. 엉큼해라.”
지아 누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누나. 설마, 제가 싫어진 거예요?”
“그럴 리가. 난 언제나 영재 널 좋아한다구.”
“어…….”
순간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애초에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오면…….
“푸흡. 또 당하네?”
“아!”
“쯧쯧. 날 이기려면 아직 멀었어.”
누나가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는 정말이지 발레만큼 뛰어나다니깐.
분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해가 완전히 저물고 가로등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어서 가요. 더 늦기 전에.”
지아 누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럴까.”
그러면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영재야. 한 가지 알려줄까?”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지아 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렇게 발레 연습하는 모습 부모님이랑 규원이, 그리고 너에게밖에 안 보여줬어.”
귓가를 파고드는 선명한 어조.
“…….”
눈만 멀뚱히 뜨고 있는 나를 보며 누나가 슬며시 웃었다.
누나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의 사이가 그만큼 깊어졌다는 것.
좋은 일이다.
분명히 좋은 일인데.
왜 이다지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까.
푸른 하늘에 떠오른 달이 홀로 고고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