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84화한 발 더 깊이(1)
* * *
7월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학교로 이어지는 경사로를 조금만 걸어도 땀으로 샤워를 할 지경이니 말 다 했지.
그럼에도 스터디부 활동일이 되면 모두가 참석했다.
다들 부 활동에 열성을 다하는 만큼 부장인 내가 더 잘해야지.
스터디부가 있는 별관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니 한결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물기를 닦을 만한 수건은 없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날씨면 금방 마르니까.
스터디부 앞에 도착했더니 먼저 와 있던 윤희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안녕. 언제부터 기다렸던 거야?”
“얼마 안 됐어. 10분 정도.”
“아하. 별로 안 기다렸네.”
윤희는 눈을 몇 차례 깜빡이며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많이 더웠나 보네. 세수까지 하고 온 걸 보면.”
“응. 땀을 너무 흘렸거든.”
대답하면서 주머니에서 부실 열쇠를 꺼냈다. 이 순간에 들리는 짤랑거리는 소리가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부장으로서 뭔가 할 말 없어?”
윤희가 내 뒤에 바짝 다가선 채 속삭였다.
“음……. 부 활동 열심히 하는구나?”
뒤돌아본 상태로 문고리를 돌렸다.
윤희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를?”
나는 진짜로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냐. 그냥 말을 말자.”
윤희가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부실 안으로 들어선 다음 항상 앉는 자리로 향했다.
가방에서 필통과 문제집을 꺼내는 동안 지아 누나와 규원이도 부실에 도착했다.
“흐어어어. 살겠, 드아.”
규원이는 문틀에 기댄 채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벌어진 입 사이로 영혼 같은 게 튀어나올 것만 같은 모습.
“후우. 진짜 비라도 한 번 왔으면 좋겠어.”
지아 누나는 휴대용 선풍기로 자신의 목을 식혔다. 그래도 이쪽은 비교적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언니이, 나도오.”
규원이가 지아 누나를 향해 힘겹게 손을 내밀었다. 누나가 규원이를 흘깃 보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게 왜 선풍기 깜빡하고 왔어?”
“급하게 나오다가 그만…….”
“자.”
누나가 선풍기를 내밀자 곧바로 반색하는 규원이.
“너희도 오늘 더웠지?”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누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늘만이 아니라 항상 덥죠. 죽을 것 같아요.”
“요샌 에어컨 없이는 못 살 정도에요.”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고, 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 그래도 여기서는 시원하게 공부하니까 참 다행이지 뭐야.”
지아 누나가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다 이사장님 덕분이죠.”
윤희가 이사장님의 공을 언급하는 날이 올 줄이야.
윤희의 말마따나 이사장님은, 3학년 학생들이 공부를 하러 학교에 나오는 만큼 최대한 편의를 봐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도 에어컨 바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러게 말야. 이사장님이 우리들 편의를 많이 봐주셔서 참 다행이지.”
지아 누나는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사장님 만세!”
어느새 에어컨 바로 아래로 이동한 규원이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런 규원이의 반응을 보면서 윤희가 옅게 미소 지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 중 이사장님이 윤희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은 나밖에 모르는 상황.
지금의 윤희라면 머지않아 저 두 사람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을까.
문득 윤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윤희가 검지를 세우고 자신의 입술에 살며시 대었다.
묘한 눈웃음과 함께.
……언제 내 머릿속을 읽은 거지?
윤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알겠지?
신호를 정확하게 받은 나는 이해했다는 의미로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간신히 넋을 되찾아 온 규원이가 자리에 앉았다.
우리들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 * * *
그로부터 2시간쯤 지났을까.
“영재야.”
지아 누나가 명랑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네, 누나.”
평소보다 밝게 대답하자 누나가 피식 웃었다.
“너 평소에도 집에서 오래 앉아있지?”
“그렇죠. 거의 공부하니까.”
“그럼 스트레칭은 안 하고?”
“네. 대신에 가끔 일어나서 기지개는 켜요.”
“흐음…….”
지아 누나가 미심쩍어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원래 1시간 정도 앉아있었으면 5분간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어줘야 하거든. 넌 지금 그렇게 안 한다는 거고.”
“좀만 집중하다 보면 2시간은 순식간이라서요.”
“오오, 역시 공부 벌레…….”
옆에서 규원이가 감탄했다.
“어디 잠깐 상태 좀 볼까.”
지아 누나가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등 뒤에 섰다.
“영재야. 어깨 주물러 줄게.”
“진짜요? 누나한테 이런 서비스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누나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라왔다.
“어깨에 힘 빼고.”
지시대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심장이 원래의 리듬을 놓치고 자꾸만 두근거렸다.
누나의 손길이 부드럽게 어깨를 쓰다듬었다.
리드미컬한 동작으로 문지르기까지 하자 기대감이 점점 더 치솟았다.
“이제, 제대로 갈게.”
귓전을 간질이는 목소리가 멎자마자 누나가 손에 힘을 세게 주었다.
“아, 아, 아아아아!”
새된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나는 몸부림을 치면서 누나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아직이야.”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누나! 그만, 그마안!”
그 말 한 마디를 하면서도 간헐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누나가 그제야 어깨를 놓아주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역시나. 어깨랑 목이 엄청 뻣뻣하게 굳었잖아. 이러고 다니면 안 좋다구.”
“괜찮아?”
윤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어깨에 여전히 얼얼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이 누나, 진짜로 손이 맵다.
나는 지아 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은 자세로 내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누나. 그렇게 세게 하는 게 어딨어요?”
따져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짤막한 한숨뿐이었다.
“원래 뭉친 근육 풀 때 그 정도는 해야 돼. 너는 엄청 뭉쳐 있는 상태고. 평소에 불편한 거 못 느꼈어?”
“아뇨. 딱히…….”
“언니이! 나도 어깨 뭉쳤는지 좀 봐주라.”
규원이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옆으로 돌렸다.
내가 당한 걸 보고도 저런 부탁을 하다니……. 보통내기가 아니구만.
“그래, 어디 보자…….”
누나가 한쪽 손을 규원이의 어깨에 얹은 뒤 몇 차례 가볍게 움켜쥐었다.
“악, 간지러.”
규원이가 키들키들 웃으면서 상체를 배배 꼬았다.
저기요, 누나? 아까 나한테 할 때랑은 너무 다르지 않나요?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순간,
“으아아아악!”
규원이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팔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렇게 힘을 주는데도 지아 누나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혹시나 해서 윤희를 살펴보니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언니이! 살려줘어!”
규원이의 SOS요청에 그제야 지아 누나가 손에 힘을 풀었다.
“우리 규원이는 영재만큼 뻣뻣하지는 않네.”
“악마다…….”
윤희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윤희도 어떤지 봐줄까?”
“아뇨, 아뇨!”
윤희가 손과 목을 이용하면서까지 강하게 거부했다. 쟤도 다급해지면 저렇게 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래? 살짝 아쉬운데.”
누나가 입맛을 다시며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솔직히 좀, 악마 같아 보였다.
“영재야. 너 몸도 뻣뻣하지?”
악마 치고는 지나치게 예쁜 사람이 밝은 표정을 하고 있으니 두려웠던 감정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네. 그렇죠.”
대답한 직후, 지난날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유연성 테스트를 할 때마다 꼴찌를 도맡아야 했던 흑역사들이.
“원래 유연성 떨어지는 애들이 근육도 더 쉽게 뻣뻣해지거든. 말 나온 김에 한 번 테스트해보자.”
“네? 또요?”
겁에 질려서 나도 모르게 볼륨이 크게 나왔다.
“어깨 주무르기 아니니까 걱정마. 하여튼 엄살은.”
“아냐! 진짜 아팠어!”
규원이가 외쳤다.
윤희는 당해보지 않았으니 말을 아끼고 있었고.
누나는 콧숨을 내쉬고 규원이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너도 몸이 뻣뻣해서 그래. 이참에 테스트해보자.”
“어떤 걸, 하려구요?”
조심스레 물었더니 지아 누나가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검지로 마룻바닥을 가리켰다.
“저기에 앉아 봐. 다리는 일자로 뻗어서.”
“설마, 윗몸 앞으로 굽히기요?”
누나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거 손 안 닿는데요.”
“그냥 어느 정도로 뻣뻣한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이거 혹시 신종 괴롭힘인가?
“으음……. 가능하면 안 하고 싶달까…….”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구나.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누나의 어조에서 실망감이 잔뜩 묻어나왔다.
“아쉽다……. 기대했는데…….”
그 말에 윤희와 규원이도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너네는 또 왜 그러는 건데. 게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까지 하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는 등 떠밀리는 모양새로 마룻바닥에 앉았다.
“딱 3초만 할 거예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자 누나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움직였다.
규원이와 윤희도 어느새 지아 누나 옆에 밀착했다.
나는 허리를 최대한도로 숙이고 팔을 앞으로 뻗었다.
허벅지 뒤쪽이 무척 당기는 통증을 느끼며 속으로 3까지 센 다음, 다시 허리를 폈다.
“영재야? 그게, 최선이야?”
가장 먼저 목소리를 표한 사람은 윤희였다.
“나보다 심하다.”
대놓고 놀라워하는 규원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지아 누나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이미 익숙한 반응이라서 딱히 어떤 감정이 일지는 않았다.
“중학생 때 마이너스 13cm였어요.”
담담하게 얘기해도 지아 누나의 표정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푸훕. 그, 그거 사람 맞냐?”
규원이는 실소를 터뜨렸다.
옆에서 지아 누나가 규원이의 어깨를 툭 치자 금세 웃음을 그쳤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윤희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위로해줘서 고맙긴 한데, 마음이 더 쓰려지는 걸까…….
“영재 혼자만 하는 건 불공평하니까 우리도 하자.”
누나의 한 마디에 윤희와 규원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졸지에 스터디드림배 유연성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지아 누나는 발레를 오래 했던 만큼 유연성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발가락 끝에 손목이 닿는 사람이 있었다니.
윤희는 발가락을 잡는 정도였다.
그 정도만 해도 일반인으로서는 꽤 유연한 편이지.
규원이는 낑낑거리던 끝에 간신히 중지가 발가락에 닿았다.
“후후. 내가 이겼지롱!”
V자 사인을 내게 날려대며 규원이가 약을 올렸다.
나중에 두고 보자, 이규원.
나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
6시에 부 활동을 종료했다. 끝까지 남아서 공부를 한 사람은 나와 지아 누나뿐.
규원이는 2시쯤에 친구들과 PC방을 가기 위해 먼저 떠났다.
윤희는 지역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시인과의 만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4시쯤에 부실을 나섰다.
“슬슬 가볼까요?”
“좋아.”
나와 지아 누나는 별관 건물을 나온 뒤, 나란히 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매미 우는 소리에 우리들의 발소리가 묻혔다.
그때 지아 누나가 내게 물음표를 던졌다.
“영재야. 오늘 시간 많아?”
정면을 향하던 시선이 나에게로 슬쩍 방향을 틀었다.
“저야 방학에는 늘 시간이 넘쳐흐르죠.”
“주로 공부한다며?”
“네.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은 하네요.”
“잠깐만. 이상한데?”
지아 누나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은 많다면서 하루에 8시간 공부를 하는 거면, 시간 없는 거 아냐?”
“지아 누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어드릴 수 있다는 의미죠.”
고개를 슥 돌려서 누나를 바라보았는데, 누나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진짜로? 와! 나 지금, 엄청 기분 좋은 말 들었는데.”
순수하게 기뻐하는 누나의 표정을 보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준비해놓은 멘트를 읊었다.
“사실 농담입니다. 저에게는 공부가 가장 중요하거든요.”
말을 끝맺으며 씨익 웃었떠니 지아 누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너어.”
“누나가 항상 저를 놀려대서, 오늘은 반대로 한 번 해봤죠. 흐흐흐.”
그러자 지아 누나가 내 옆구리를 가볍게 몇 대 때렸다.
“아, 아파요!”
“그럼 안 아프라고 때리겠어?”
입술을 삐죽 내민 모습. 이건 이거대로 좋구만.
게다가 진짜로 힘을 빼고 때리는 거라서 전혀 아프지도 않고.
누나는 팔짱을 낀 채 콧김을 뿜었다.
“지아 누나?”
내 쪽을 향하는 지아 누나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나 놀린 벌로 오늘은 무조건 시간 내 줘.”
“네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누나가 내 손을 이끌고 앞서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상가 건물에 위치한 발레 학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