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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화 〉 78화­방학에는 조금 색다른 자극을!(1) (78/131)

〈 78화 〉 78화­방학에는 조금 색다른 자극을!(1)

* * *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설마 주현 선배가 기숙 학원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문자메시지를 작성했다.

「언제까지 하는 건가요?」

금세 답장이 왔다.

「그게... 7/20부터 8/13까지.....」

그 말인 즉, 개학을 이틀 앞두고 복귀한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방학 내내 학원에서 생활하다니…….

아마 부모님이 보낸 거겠군.

나는 지난번에 보았던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정나미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 마치 나와 지아 누나를 물건 감정하는 듯이 쳐다보았지.

주현 선배는 성격상 순순히 가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덮어두기로 했다. 이미 정해진 사항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그리고 주현 선배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끙끙거릴 게 눈에 선하기도 하고.

「아쉽네요ㅠㅠ 잘 다녀오세요~」

답신을 보낸 다음 나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했을 쯤에는 비지땀으로 얼굴과 옷이 흥건하게 젖었다.

“허얼. 땀 좀 봐…….”

슬기가 나를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참고로 슬기는 이틀 전부터 방학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걸어왔어?”

“당연하지.”

묵직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꺼낸 물병을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너 빨래했어?”

슬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왜?”

“그럼 방학 숙제는? 내가 미리미리 조금씩 해두라고 말했을 텐데.”

“아, 그게…….”

나는 한숨을 내뱉고 물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너 방학 내내 놀다가 숙제 다 못하고 그랬잖아.”

“…….”

슬기가 뚱한 얼굴을 한 채 바닥만 쳐다봤다.

어이쿠, 오자마자 잔소리부터 하고 말았네.

마침 TV에서는 예능프로그램을 방송하는지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저걸 보면서 뒹굴거리고 있었던 거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냐, 아냐. 내가 잠깐 더위 먹었나 봐.”

“응?”

슬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에 엄마가 빨래해 놓으라고 했는데 안 했다고 해서 순간 화났네. 미안.”

나는 솔직하게 시인하며 사과했다. 그런데 슬기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엄마가 하랬다고?”

“엄마가 나가기 전에 말했잖아. 너 그때 응, 이라고 대답했어.”

“내가?”

슬기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문했다. 그러고는 침음을 흘리며 기억을 되짚는 모양새를 취했다.

“기억이 안 나는데…….”

“잠깐만. 너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

“나? 으음. 언제더라……. 아! 12시였어!”

“아주 그냥 꿀잠을 잤구만. 팔자 폈네, 폈어.”

“헤헤.”

천진난만하게 웃는 슬기를 보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얘를 어찌하면 좋을까.

“아, 아무튼 빨래는 좀 있다가 할게. 나 저거 봐야 하거든.”

“놔둬. 어차피 교복도 빨아야 하니까 내가 할게.”

슬기의 표정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역시 순수하기 그지 없구만. 이 오빠가 언제나 반전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어먹고 말이지.

나는 검지를 치켜세운 채 목소리를 높였다.

“대신! 너는 지금부터 방학 숙제를 한다. 오케이?”

“에엥?”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게?”

“오빠, 지금 방학 숙제가 중요한 게 아냐. 좀 있으면 방실소년단 노래 나온단 말야!”

슬기가 TV를 손으로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때마침 TV에서 방실소년단을 무대로 모시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아.”

슬기가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왔기에 나는 절충안을 내놓기로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좋아. 내가 샤워하고 나서 숙제하는 걸로 하자. 알았지?”

“알았어!”

슬기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TV를 보러 뛰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슬쩍 웃었다. 한창때 나이니까 이해는 한다.

교복을 벗어서 세탁기 안에 던져 넣은 뒤 화장실에 들어갔다.

* * * *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에도 슬기는 여전히 TV를 보고 있었다.

“슬기야. 방학 숙제할 거 가져와 봐.”

슬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숙제를 가져왔다. 나는 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겨보며 분량을 지정해 주었다.

“오늘은 여기부터 여기까지 해.”

“이렇게나 많이?”

슬기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미리 다 해놓고 노는 게 더 마음 편할 걸?”

“으. 응.”

“TV 보면서 해도 돼. 단, 오늘 안에 무조건 다할 것.”

왠지 규원이한테 과제를 내주던 때가 떠오르는군.

TV를 봐도 된다는 조건 덕분인지 슬기가 군말 없이 숙제를 받아 갔다. 나는 슬기가 반상에 앉아서 숙제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주현 선배가 스터디부 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직 전파하지 못했다. 나도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깨톡으로 바로 알렸을 텐데.

휴대폰을 열고 전화번호부 목록을 펼쳤다.

규원이는 일단 아웃이고.

남은 사람은 윤희와 지아 누나.

두 사람의 이름을 보면서 고민하다가 지아 누나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 지아 누나가 주현 선배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쏟고 있으니까.

통화 버튼을 누르자 한동안 수신음이 이어졌다.

[여보세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반가운 목소리.

“아, 누나. 지금 통화 괜찮아요?”

[당연하지.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전화인데.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해야지.]

“일단 괜찮다는 거네요. 집에는 잘 들어갔어요?”

[그럼. 누구 씨가 그렇게 걱정을 하는데 당연히 잘 들어가야지.]

하하.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누나가 명랑하고 쾌활한 덕에 통화가 즐거웠다.

[그런데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했을까? 혹시, 데이트 신청?]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구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오는 누나의 장난도 이제는 적절히 받아칠 수 있게 되었고.

[쩝. 진짜 아쉽다.]

실망감이 밴 어조였지만 아마도 농담이겠지.

“갑자기 전화한 이유는 다른 애들한테도 알려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예요. 주현 선배 관련해서…….”

[못 온댔어?]

윤희만큼은 아니지만 누나도 꽤 예리한 편이었다.

“네.”

[음. 같이 활동하면 좋을 텐데……. 아쉽다.]

지아 누나의 ‘아쉽다’가 내게는 무척 진심으로 들렸다.

[혼자서 공부하려고 그러는 거래?]

“아, 그게 아니라 기숙 학원을 들어간대요. 모레에 들어가서 8월 13일까지요.”

수화기 너머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아, 그러고 보니 내 친구도 기숙 학원에 들어간다고 그랬어. 걔는 억지로 가는 거라서 엄청 가기 싫다고 어찌나 하소연을 하던지. 주현이도 같은 곳일까?]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요.”

지아 누나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구나. 에휴,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네. 그래야죠.”

대답하는 내 음성에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애들한테 깨톡으로 알려줄게. 주현이한테는 잘 다녀오라고 인사 남겨야겠고.]

“아무래도 문자보다는 깨톡으로 알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요. 고마워요, 누나.”

[그거, 그냥 귀찮아서 떠넘기는 거 아냐?]

지아 누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아이, 그럴 리가요.”

속으로 살짝 뜨끔했지만 전화상이니까 티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참에 스마트폰 하나 해달라고 해 봐. 중저가형 모델도 많으니까.]

“스마트폰은 대학생 때 마련할 계획이라서요.”

그것도 제가 직접 돈을 모아서 말이죠.

[우리 영재 효자네. 부모님께서 엄청 좋아하시겠다.]

나는 머쓱해져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까지 스터디부원들 중 누구에게도 우리 집 사정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으니까 지아 누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밝히지 않을 예정이고.

나는 벽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몇 마디 안 한 것 같은데 벌써 30분이 넘게 지나간 시간.

“아, 누나. 저 이제 슬슬 공부해야겠어요.”

[벌써어? 통화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나는 네 목소리 더 듣고 싶어.]

누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내 귀를 살며시 녹였다.

이런 걸 두고 황홀한 기분이라고 얘기하는 건가.

[그래도 공부하겠다는 걸 방해하면 안 되겠지?]

누나의 그 말이 섭섭하게 들리는 건 대체 왜일까.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도로 삼킬 수는 없는 법.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나는 즐거움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우리 영재가 누나를 기대하게 만드네.]

스피커를 타고 넘어오는 사근사근한 웃음소리.

“누나가 먼저 걸어주는 것도 좋고요.”

[그래. 꼭, 그렇게 할게. 나중에 스터디부에서 봐.]

‘꼭’에 악센트를 넣은 걸 보니 정말로 그럴 생각인 듯했다.

나야 물론 대환영이지!

지아 누나가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나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한 다음 책상 앞에 앉았다.

“자. 이제 공부를 한 번 해볼까.”

기지개를 켠 뒤 몬아미 볼펜을 손에 쥐었다.

* * * *

저녁을 먹고 나서 밀린 집안일을 처리했다. 그런 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공부를 했다.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올 시간이 되었을 쯤 나는 거실로 나왔다. 슬기는 여전히 밥상에 앉아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으아앙. 너무 TV만 보고 있었어.”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한 마디 해줬다.

“약속 기억하지? 12시 되기 전까지 다 못 끝내면…….”

“못 끝내면?”

슬기가 불안감 서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끝내기 전까지 못 자게 할 거다!”

사자후를 발사하자 슬기가 아예 식겁을 했다.

“악마…….”

“뭐라고?”

“아, 아냐.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미 다 들었거든.

하지만 구태여 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현관으로 갔다. 엄마는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이건 뭐야?”

“아침에 두부구이 하려고 사 왔지.”

손을 내밀자 엄마가 자연스럽게 비닐을 넘겼다.

내가 비닐에 든 두부팩을 꺼내서 냉장고에 넣는 동안 슬기가 밥상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했다.

나는 얼른 엄마가 먹을 저녁상을 차렸다.

“고마워, 아들.”

엄마가 눈웃음을 그렸다.

나는 엄마가 수저를 드는 모습을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참! 영재야. 오늘 방학했지?”

“응. 맞아.”

“잠깐만 여기 앉아보렴.”

엄마가 검지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엄마에게 다가갔다. 맞은편에 앉자 엄마가 말문을 열었다.

“여름방학 계획은 생각해놨니?”

“웬만하면 공부만 하려고. 아, 매주 월수금에는 스터디부에 나가기로 했고.”

“너무 공부만 하는 거 아닐까? 엄만 오히려 걱정되네.”

“학생의 본분은 공부잖아. 방학이라고 퍼져 있으면 안 되지.”

그리고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단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할 수 없다.

엄마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급식은 안 나오지?”

“방학이니까 당연히.”

“점심은 사 먹어야 되겠구나.”

엄마가 중얼거렸다.

사실 내가 오늘 방학 중 스터디부 활동을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밖에서 밥을 먹으면 그만큼 돈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는 게 한이었다.

“그리고 버스비도 있어야 할 테고.”

“에이, 버스비는 무슨. 걸어 다녀도 돼.”

나는 손사래를 쳤다.

“어머 얘가. 최근에 뉴스에서 일사병 주의하라고 한 거 모르니?”

“엄마, 나 이래 봬도 엄마 닮아서 몸 하난 튼튼하다구. 걱정 안 해도 돼.”

허세를 부렸지만 엄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늘어가지고…….”

엄마는 내 손목을 어루만지며 염려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동안 용돈을 제대로 못 챙겨줬잖아. 이번 방학 동안 매주 2만원씩 챙겨줄게. 그걸로 버스도 타고, 밥도 사 먹고 그렇게 해. 알았지?”

“2만원까지는 필요 없어.”

“요즘은 식당도 비싸잖니.”

“편의점에서 먹으면 싸.”

“거기 음식은 몸에 안 좋잖니. 차라리 식당에서 사 먹으렴. 알았지?”

엄마가 단호하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나도 더 이상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고개를 움직이자 그제야 엄마가 내 손을 놓았다.

이제 밥을 먹으려나 싶었는데 엄마는 아직 할 말이 더 있는지 다시 운을 뗐다.

“아! 그리고 같이 일하는 분이 얘기해주던데, 요즘 통신사에서 방학 맞이 세일을 한다고 하는 거야.”

귀가 솔깃해지는 정보였다.

“아들. 휴대폰 오래 썼지?”

“3~4년쯤?”

“이번에 스마트폰으로 바꿔 줄게. 비싼 건 못 해주지만…….”

“이거 아직 더 쓸 수 있어. 괜찮아, 엄마.”

하지만 엄마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동안 너무 못 챙겨준 것 같아서.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야.”

“어? 엄마 나도 스마트폰!”

엎드린 자세로 숙제를 하던 슬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슬기는 좀 더 크면 해줄게.”

엄마의 상냥한 목소리에 슬기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지만 생떼를 부리지는 않았다.

“모레에 엄마 쉬니까 그때 가보자.”

엄마가 싱긋 미소 지었다.

“엄마, 고마워!”

활짝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들떴다.

나에게도 스마트폰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휴대폰부터 쥐었다.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나는 그 대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윤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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