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6화-뒤풀이 시간
종이 울렸다. 그것으로 3박 4일 간의 길었던 기말고사가 종료되었다.
“자, OMR카드 앞으로 전달!”
감독관으로 들어온 담임선생님의 지시를 따라 모두들 OMR카드를 앞자리로 넘겨주었다.
선생님은 교탁에 서서 거둬들인 OMR카드의 장수를 확인했다.
“오케이. 이상 없네. 오늘 집에서 가채점도 해보고 그러면서 푹 쉬어. 이상!”
담임선생님이 OMR카드를 팔락팔락 흔들고 나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 시험 끝이다아!”
“크으. 드디어, 놀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아. 이번 생은 망했어…….”
누군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야, 성적표 컴싸로 위조될까?”
범죄(?)를 도모하는 애도 있었다.
“이번에도 성적 안 좋으면 엄마 손에 죽는데.”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교실의 풍경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윤희였다.
“이번에도 정신없이 지나간 것 같아.”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이쪽을 향해 눈길을 던지는 윤희.
“마지막 건 잘 봤어?”
“음. 그럭저럭.”
윤희가 가방 지퍼를 닫았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재야, 윤희야!”
규원이가 들뜬 발걸음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무척 개운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자유다!”
두 팔을 높이 들고 규원이가 환호했다.
“그렇게 힘들었어?”
“응, 응!”
규원이가 세차게 고개를 움직였다.
“하아. 아무튼 끝나서 너무 행복해애.”
황홀경에 찬 눈이 우리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떡볶이 신이 계신 모양이다.
“누가 보면 이번이 마지막 시험인 줄 알겠네.”
윤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소릴 냈다.
문득 사방을 둘러보니 교실이 휑했다. 마치 서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막처럼.
“너넨 아직 안 가?”
앞자리에 있던 도연이가 흥미를 드러내며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슬슬 나가려던 참이야.”
윤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설마 모여서 뒤풀이를 한다거나?”
“뒤풀이?”
도연이의 말에 반문이 튀어 나갔다.
“보통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그러고 놀잖아. 스터디드림에는 그런 거 없어?”
“음. 중간고사 때는 조촐하게 했는데, 이번에는 딱히 계획하고 있지 않았거든.”
뒤풀이라…….
속으로 되뇌며 턱을 문질렀다.
중간고사 때는 시험이 끝난 바로 당일이 아니라 성적표가 나온 날에 했다. 그조차도 애초에 예정에 없다가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하게 되었지.
이번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동안 누군가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으앗!”
순간적인 기습 때문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누구야?”
“누구겠어.”
규원이가 자신의 검지를 흔들며 씨익 웃었고, 윤희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도연이는 재밌는 구경을 하는 눈으로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재야아.”
흐물흐물한 치즈마냥 끈덕진 목소리를 내는 규원이.
“내 맘, 알지?”
웃는 상으로 회심의 윙크를 쏘아 보내기까지 했다. 윤희 쪽을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귀여운 눈짓을 보내왔다.
“오호라. 이거 여론이 압도적인데?”
도연이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건드렸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그래, 하자. 나도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쉽거든.”
“오예!”
규원이가 곧장 환호성을 냈고, 윤희고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
도연이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세 사람은 돌아가며 하이파이브를 쳤다. 하이파이브를 달가워하지 않던 윤희도.
꽤 신선한 광경이었지만,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놀라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난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뒤풀이 재밌게 즐겨.”
기운 넘치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뎐 도연이가 우뚝 멈춰 섰다.
“아! 깜빡할 뻔했네. 주말 간 학생 교사 활동한 거 포상은 다음 주 중으로 준다고 하셨어. 그럼 진짜로 갈게.”
포상이란, 바로 문화상품권 3만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걸로 문제집 좀 사야겠구만.
우리는 도연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 윤희는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소식을 전하겠다며 곧장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 맞다! 규원아. 물어보려다가 깜빡한 건데 이번 시험 어땠어?”
“어? 이번, 시험?”
내 질문을 받은 규원이가 슬금슬금 눈길을 피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이, 일단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잘 모르겠는데…….”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그럼 가채점 먼저 해야겠네.”
끄덕. 규원이가 고개를 움직였다.
때마침 전파가 끝났는지 윤희가 스마트폰을 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둘 다 아직 교실이니까 곧 가겠대.”
“잘됐네. 어서 가자.”
내가 선두에 서자 윤희와 규원이가 얼른 뒤따라왔다.
* * * *
스터디부에 5명 전부가 모였다.
지아 누나의 얼굴빛이 무척 환했다. 해방감이라는 세 글자가 현신하면 저런 외양일 것이다.
주현 선배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모습이었고.
나는 멤버들에게 제안했다.
“뒤풀이에 앞서 가채점 먼저 할까요? 그 편이 더 홀가분하고 좋을 것 같은데.”
“너만 홀가분 하려고 그러는 거지?”
지아 누나가 반쯤 뜬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어라, 언제 제 머릿속을 들여다본 거죠?”
“허얼. 왕재수!”
규원이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래도 미리 확인하고 뒤풀이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윤희는 차분한 어조로 동의를 표했다. 주현 선배는 고개를 한 번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하여 2학년은 2학년끼리, 1학년은 1학년끼리 자리를 옮겨서 가채점을 시작했다.
나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올백.
“진짜 왕재수…….”
“그렇게 눈 부라려도 결과는 안 변해.”
나는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모두들 가채점을 마무리했다.
“영재는 또 올백이래, 언니.”
얘가 바로 선수를 쳐버리네?
“뭐, 영재 성적은 이제 놀랍지도 않아.”
지아 누나의 말에 윤희가 맞장구를 쳤다.
주현 선배의 동공이 아까보다 커진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규원이에게 차례를 뺏긴 탓에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나는 윤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윤희가 금세 알아듣고 자신의 성적을 공개했다.
“저는 평균 90점이예요.”
중간 때 평균이 86점이었던 걸 생각하면 노력한 댓가를 얻은 셈이다.
이후로 규원이, 지아 누나, 주현 선배 순으로 성적을 공개했다.
규원이 평균 57점.
지아 누나 평균 79점.
주현 선배 평균 92점.
규원이가 큰 폭으로 상승했고, 주현 선배만 유일하게 점수가 떨어졌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평균 50점을 넘어본 적이 없는데. 오오, 나에게도 이런 날이!”
규원이는 만세를 하며 기쁨을 한껏 누렸다.
주현 선배는 딱히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속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책상 위에 펼쳐놓은 시험지를 정리했다.
“뒤풀이는 과자랑 음료수면 되겠어?”
지아 누나가 나에게 질문했다.
“저번에도 그렇게 했으니까 충분할 걸요.”
“거기 잠깐 스톱!”
규원이가 오른손을 들고 우리의 대화 흐름을 잘랐다. 그러더니 상체를 홱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이번에 성적 많이 올랐잖아.”
“그래서?”
“부장으로서 포상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두 같고…….”
“아! 나 영재가 사주는 배달 음식 먹고 싶어.”
지아 누나가 몰아가기를 시도했다.
누나, 면목이 없지만 제 지갑은 항상 굶주린 상태랍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용돈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밝혔다.
“흐음. 그럼 어렵겠네…….”
지아 누나는 턱을 괴었다.
“나 진짜 성적 많이 올랐는데.”
간절한 눈망울을 하는 규원이.
“슬프게도 진짜로 돈이 없어서.”
“에이. 그럼 어쩔 수 없네.”
규원이의 서운함에 찬 눈빛을 애써 피했다. 그때 구세주가 나섰다.
“이번에 내가 낼게. 영재가 쏘는 걸로 해서.”
바로 윤희였다.
“와아! 자동문 멋져!”
박수까지 치며 감탄하는 규원이. 조금 전까지 침울해 있던 애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빠른 회복.
근데 왠지 단어가 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듯한…….
“그 얘기 딴 데서 하지 마.”
윤희가 날카로운 눈빛을 쏘자 규원이가 재빨리 자신의 입술을 잠갔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내자, 윤희야.”
“괜찮아요, 언니. 마음이 내켜서 하는 거니까.”
지아 누나를 바라보며 윤희가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그럼 다음에는 내가 쏠게. 그러면 되지?”
“네.”
윤희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후 우리는 치킨을 할지, 피자를 할지에 대해 잠시 의견을 나누었다.
그나저나 왜 떡볶이가 후보에서 제외된 거지?
그 이유가 궁금하여 자타공인 광신도에게 물어보았다.
“떡볶이는 주식처럼 먹지만, 치킨이나 피자는 자주 먹기 어려우니까!”
떡볶이교에서 들으면 이단으로 처단할 만한 발언을 당당하게 하는 규원이었다.
“나, 나는……. 피자가, 좋아…….”
토의하는 내내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던 주현 선배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그럼, 피자로 할까?”
지아 누나가 우리들을 둘러보았고, 모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피자가 선정되었다.
윤희는 전화로 피자를 주문한 뒤,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럼 30분 동안 뭐 하고 놀아? 여기서는 놀거리가 전혀 없는데.”
규원이의 지적대로였다. 여기서 할 만한 거라곤 끽해야 수다 떨기뿐.
하지만 그것만 하기에는 좀 아쉬울 것 같단 말이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는 중에 지아 누나가 하나 제안했다.
“그러면 간단하게 음료수랑 과자 사와서 먹을까?”
“오! 그거 좋다!”
규원이가 손뼉까지 치며 환영했다.
“확실히 그게 낫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근처에 편의점도 있으니까 잘 됐지. 영재야, 같이 가자.”
“아녜요, 언니. 제가 갈게요.”
이번에도 윤희가 나섰다.
“피자도 샀는데 이것까지 하겠다고?”
“네.”
윤희의 대답을 들은 지아 누나가 내게 눈길을 보냈다.
“너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질문처럼 느껴지는데.
“저는 뭐든 상관없어요.”
“아님 내가 갈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드는 규원이.
“음……. 일단 알겠어. 둘이 갔다 와.”
지아 누나가 우리 둘을 향해 시원스레 내던졌다.
“저기, 나는?”
규원이가 자신을 검지로 가리키자 누나가 셋이서 얘기하자며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나와 윤희는 스터디부를 나왔다.
“주현 선배, 저번보다 1점 떨어졌더라.”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나는 넌지시 화제를 꺼냈다.
“열심히 했는데도 그런 결과면 많이 속상할 거야. 성적 얘기는 안 꺼내는 게 좋겠어.”
“응. 그래야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희를 향해 응답했다.
“뒤풀이한다는 결정 정말 잘한 것 같아.”
“그야, 다들 고생했으니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도연이지만.”
“그게 아냐.”
윤희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주현 선배가 피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아!”
그 말만으로도 윤희의 속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주현 선배가 스터디부원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얘기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어느덧 우리는 편의점에 도착했다.
* * * *
뒤풀이는 흥겹고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한쪽에는 과자를 산처럼 쌓아두고, 다른 한쪽에는 먹음직스런 피자를 두고서.
규원이는 분위기에 취해 트로트 한 곡조를 뽑아냈다. 의외로 잘 불러서 모두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오후 4시를 막 넘긴 시각.
우리는 뒤풀이를 마감하고서 자리를 정리했다. 그런 뒤 각자의 가방을 챙겨 학교를 나섰다.
윤희, 규원이, 지아 누나가 선두에 서고, 나는 주현 선배와 보조를 맞추었다.
오늘은 내가 주현 선배를 담당하는 날이므로 당연한 배치다.
뒤풀이를 할 때 주현 선배도 과자와 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시며 자리를 지켰다.
규원이가 노래할 때 슬며시 웃기도 했고.
솔직히 말해서 갑자기 공부한다며 책상에 앉거나 먼저 집으로 들어가거나 할 것 같아서 내심 조마조마했다.
주현 선배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관찰하다가 한 마디 꺼내 보았다.
“피자 어땠어요? 제가 산 건 아니지만.”
“……맛있, 었어.”
“그럼 다음에도 이렇게 5명이서 피자 먹어요.”
“……응.”
다시 찾아온 침묵의 시간.
한동안 걷다 보니 헤어질 때가 되었다.
서로 웃으며 작별한 뒤, 나와 주현 선배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오늘 학원은 언제 가세요?”
“8시…….”
“그럼 집에서는 뭐해요? 쉴 것 같긴 한데.”
“아냐……. 공부, 해야 돼…….”
점수가 떨어져서 더 매진하려는 걸까.
호기심을 느낀 그때 주현 선배가 발을 멈췄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주현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열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은, 즐거웠, 어…….”
주현 선배가 돌아서서 잰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라서 주현 선배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응시했다.
어쩌면, 주현 선배는 조금씩 변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성과가 있었네.”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