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75화-서로 한 발짝씩
주현 선배의 아주머니와 마주치고 난 이후, 우리는 학원에서 마중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지아 누나의 집이었다.
“좋은 아이디어 같았는데, 아쉽다.”
지아 누나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는 것으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여기까지면 충분해.”
지아 누나가 다시 자전거 안장에 앉았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너도 조심하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아 누나는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누나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나서 발걸음을 돌렸다.
덕분에 귀가하고 나서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지아 누나와 만나느라 그랬던 거니까 싸게 치는 거라고 생각하자.
* * * *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주현 선배와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주현 선배는 모두에게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단답 혹은 무응답.
간혹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30초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기말고사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내심 주현 선배가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과는 전혀 없었다.
하긴, 그건 너무 욕심이겠지.
담임선생님의 영어 수업 시간.
선생님은 무척이나 열성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졸고 있는 애들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염려되는 규원이의 뒷모습에 잠시 눈길을 고정했다.
고개를 한 번이라도 떨어뜨릴 줄 알았는데 오늘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그만큼 압박감을 주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렇게 아무도 졸지 않는 풍경을, 입학 초기에는 상상할 수가 없었는데 말이지.
우리 학교가, 학생들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칠판에 적힌 예문을 읽어보라며 나를 지목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유창한 발음으로 예문을 읽었다. 선생님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한참 뒤에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빠져나가자 애들 예닐곱 명이 나와 윤희 주위로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영재야, 이것 좀 가르쳐 줘!”
“윤희야, 이 문제 좀 봐주라!”
앞자리로 시선을 옮겨보니 도연이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최근 일주일 내내 쉬는 시간은 항상 이런 식이다.
“먼저 온 애들부터 한 명씩 봐줄게. 질서 지켜 줘.”
부탁하자 애들이 잠깐의 의논을 거치고는 한 줄로 섰다. 그렇게 나와 윤희는 차례로 한 명씩 상대했다.
덕분에 쉬는 시간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종이 울리자 애들이 뿔뿔이 흩어져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도연이가 때마침 뒤를 돌아보았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서로 고생이 많았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옆에서 윤희가 나를 불렀다.
“왜?”
“점심때 나랑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주현 선배와 관련해서?”
“그것도 있긴 한데…….”
그때 도덕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우리는 얼른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고 수업 준비를 했다.
* * * *
점심시간이 되었다. 우리 셋은 점심을 먹고 곧장 교실로 돌아왔다.
규원이가 자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제 자려고?”
물어보자 머리를 가로젓는 규원이.
“아냐! 이제 자면 안 돼. 공부해야 하거든!”
규원이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뒤 서랍에서 공부할 책을 꺼냈다. 이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와아, 이규원…….”
윤희도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놀란 듯했다.
규원이가 팔짱을 끼고 후후 웃었다. 그러더니 팔을 높이 들고 선언했다.
“나는 한다! 전교 80등!”
중간고사 때 규원이의 등수는 101등. 80등 정도면 해볼 만한 도전이다.
“할 수 있을 거야.”
윤희가 진심이 담긴 어조로 응원했다. 규원이가 고맙다고 하며 함박미소를그렸다.
이럴 땐 부장으로서 한 마디 해야겠지. 목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분명히 원하는 결과를 얻을 거야.”
그러자 규원이와 윤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뭐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왜?”
“이게 바로 흔한 영재의 무게 잡기인가…….”
규원이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했고,
“이렇게 하면 잘 당황하더라구.”
윤희는 애초부터 놀릴 목적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아니지. 둘 다 나를 놀리려고 한 거잖아.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윤희와 규원이는 서로 마주 보더니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너네도 이제 공부할 거지?”
“음. 잠깐 영재랑 할 얘기가 있어서.”
“헐? 뭔데?”
규원이가 책상을 쾅 소리 나게 짚으며 일어났다. 무척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어떤 얘기일 것 같은데?”
그렇게 질문하는 윤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으음…….”
미간을 좁히는 규원이.
“주현이 언니 얘기일 거 같은데.”
“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 나갔다.
“후훗. 나에게 이 정도 예측이야 식은 죽 먹기지.”
규원이가 으스대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을 했다.
“잠깐만. 그러면 굳이 둘이서만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나도 관계자인데.”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요새 좀 감이 날카로워졌구만.
“말고 다른 얘기도 있으니까 그래.”
이번에는 내가 답변했다.
“뭔가 신경 쓰인단 말야. 혹시나 내 뒷담이라든가…….”
“우리가 왜 귀찮게 뒷담을 하겠어? 그냥 앞담하면 되는데.”
“그러게.”
윤희가 나에게 맞장구를 쳤다. 규원이가 눈을 홉뜨고 언성을 높였다.
“잠깐만! 그게 더 너무한 거 아냐?”
나와 윤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힝. 둘 다 너무해…….”
규원이가 토라진 채 걸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우리는 농담이었다며 규원이의 기분을 풀어주고 나서 별관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윤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스터디부실을 가리켰다.
“안에서 얘기하자.”
“굳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까지 오는 사람 거의 없잖아.”
“안에서 얘기하고 싶어.”
단호한 눈빛을 보내는 윤희.
주현 선배에 대한 것 말고 대체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걸까.
스터디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복도 쪽 창가에 기대어 섰다.
“주현 선배에 대한 것 말고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야?”
나는 곧장 궁금증을 표출했다.
“영재야.”
윤희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 눈을 마주했다.
“궁금한 게 있어. 사실대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담담하게 내리깐 어조.
“어, 응.”
기세에 눌려서 자동으로 고개를 움직이고 말았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윤희의 페이스.
“학생 교사 말인데, 참 좋은 것 같아.”
“…….”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눈꺼풀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금 내가 의심 받고 있는 건가.
“중간고사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수업 분위기가 훨씬 더 좋잖아. 물론 기말고사에 대한 압박감이 크겠지만 꼭 그것 때문에만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러면?”
“다 함께 공부한다고 느끼면서부터 너도나도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 그런 인식이 생기도록 한 건 학생 교사 활동의 역할이 컸고.”
윤희는 마지막에 자신의 생각이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그렇구나.”
이해한다는 취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좋은 효과를 볼 것이라고는 먼지만큼도 생각지 못했다.
“진짜 질문은 여기서야. 과연 학생 교사 활동을 누가 생각해 냈을까? 순전히 할아버지가 떠올린 아이디어일까?”
“그건, 별로 상관없지 않아? 아무튼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으니까.”
윤희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번 일의 발단을 알고 싶어서 그래.”
“너무 파고드는 거 아냐?”
“이게 내 성향인 걸. 아마 이런 점만큼은 평생 변하지 않을 거야.”
윤희가 만면에 은근한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가, 질문에 대답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 같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건,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좋다, 나쁘다를 따지려는 게 아니라. 학생 교사 활동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이 우리 학교에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윤희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목소릴 내었다.
“내 생각엔 네가 제안한 아이디어처럼 느껴지거든.”
“왜 그렇게 생각해?”
“우리 또래가 아니면 낼 수 없을 법한 아이디어니까. 그리고 그걸 할아버지에게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은 전교에서 너밖에없어. 그렇지 않아?”
윤희가 검지로 나를 겨누었다.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역시 촉이 좋구만.
가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말 다 한 셈이지.
게다가 또래들보다 이 학교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쉬운 위치에 있기도 하니 추리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고.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윤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래. 맞아. 내가 제안한 거야.”
어차피 윤희는 다 알고 나서 나에게 물어본 것이다.
이럴 때는 숨기려고 하기보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인정하는 편이 낫다.
내가 뭐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웬일로 좋은 생각을 다 했네. 잘했어.”
“고마워.”
윤희의 칭찬에 나는 이번에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 뒤로 우리는 주현 선배에 대한 얘기를 잠시 나누었다.
어제는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약간이라도 진전이 있었는지.
우리는 서로 성과가 없었다고 인정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또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응? 또?”
“아냐. 이번에는 지아 언니한테.”
“궁금한 게 참 많구나. 피곤하지 않아?”
“전혀.”
윤희가 그렇게 답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게 궁금한지 스리슬쩍 알려주면 안 돼?”
나는 웃으면서 머리를 약간 들이밀었다.
“대단한 건 아냐. 그냥, 왜 지아 언니는 주현 선배를 그렇게 신경 써주는 건지.”
“누난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평가가 엄청 후하네.”
“당연하지!”
나는 목소리를 키웠다.
이유라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다. 빼어난 외모, 재치 있는 입담, 배려심 있는 성격 등등.
하지만 윤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10분 뒤면 5교시 수업이네.”
벽시계에 눈길을 던지는 윤희.
우리는 부실을 나섰다.
“잠깐 매점에 들렀다 가자.”
매점으로 갔더니 윤희는 커피 캔 세 개를 샀다.
“하난 규원이 주려고. 저번에 콜라 받았으니까.”
나에게 캔을 건네며 윤희가 미소 지었다.
* * * *
방과 후.
우리 셋은 스터디부로 향했다. 지아 누나는 조금 늦게 스터디부에 도착했다.
“오늘 주현이가 몸살 때문에 조퇴했어. 수업 중에 코피도 쏟았고.”
누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소식을 들은 우리도 걱정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병원 다녀오면 좀 괜찮아질 텐데. 그래도 걱정되긴 하네요.”
내 말에 윤희와 규원이가 동감을 표했다.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봐.”
그렇게 읊조리는 윤희의 어조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배어 나왔다.
“헐 코피까지…….”
규원이는 코피에서 더 놀란 듯하고.
“오늘은 4명이서 하는 수밖에 없네.”
지아 누나가 한숨을 내뱉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윤희가 지아 누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응. 그렇지.”
누나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가방에서 꺼낸 책을 펼쳤다.
환자는 쉬는 게 일이라면, 우리는 일은 공부를 하는 것.
나는 곁눈질로 윤희를 살폈다. 윤희의 시선은 문제집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분위기상 지아 누나에게 물어보지 않을 것 같군.
하지만 윤희는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지아 언니. 혹시 잠깐만 시간 내어줄 수 있나요?”
“오! 네가 웬일로 나한테 러브콜을…….”
지아 누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공부하셔야 하는데 시간 뺏는 건 아닐지…….”
“아냐아냐! 괜찮아. 집 가서도 계속 하고 있거든.”
지아 누나가 손을 붕붕 내저으며 내뱉었다.
두 사람은 곧 부실 밖으로 나갔다.
윤희가 질문하려는 건 한 가지니까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휴우.”
규원이가 입김을 날려 보냈다. 나는 규원이의 관자놀이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주현 선배 뭔가 안쓰러워. 스터디부 활동 끝나면 바로 학원 가고, 주말에도 학원 다니고……. 그러다가 몸살까지 났다고 하니까.”
규원이의 목소리에 웬일로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엄청 힘들겠다.”
“내일은 멀쩡하게 스터디부에 올 거야.”
규원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당연히 그래야지!”
“악. 침 튀었어.”
나는볼을 슥슥 문질러냈다.
“앗! 미안.”
규원이의 목소리가 다시 쪼그라들었다.
“아, 안 되겠다. 병 옮을 수도 있으니까 세수 좀 하고 올게.”
“나 양치질 하루에 두 번 꼬박꼬박 하거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주현 선배의 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만 빈자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뒤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