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74화-조심스럽게 혹은 어정쩡하게(2)
“요즘 참 덥죠?”
“…….”
주현 선배의 눈길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고정된 상태였다.
……무시 당하는 건 좀 그런데.
하지만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면, 주현 선배가 더더욱 움츠러들지도 모른다.
지금은 칠전팔기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
“아직 6월 중순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푹푹 찌기나 하고.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겠어요.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죠?”
“응……. 덥지…….”
주현 선배가 개미 만한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살며시 움직였다.
“그나저나 선배는 미니 선풍기 갖고 있나요?”
날씨가 덥다는 화제에서부터 시작하여 미니 선풍기로 이어가는 자연스러운 흐름.
어떻게든 대화의 끈을 이어가고자 하는 발악이었다.
그러나 주현 선배는 나의 노력에 조금도 응해주지 않았다.
“미안……. 이거, 외우고 싶어…….”
“…….”
그러면서 시선을 스마트폰 화면으로 돌려버리는 주현 선배.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 시뮬레이션에서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아……. 네.”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괜히 더 말을 붙였다간 방해꾼 취급받을지도 모를 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경사로의 끝 지점에 다다랐다. 앞서 가던 세 사람은 이미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세 사람이 동시에 내게 눈빛 신호를 보냈다. 잘 됐냐고.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아 누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규원이는 주현 선배를 곁눈질로 흘겨보았고.
그러자 옆에 있던 윤희가 하지 말라면서 규원이의 팔뚝을 검지로 찔렀다.
주현 선배가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들었다. 다행히 규원이가 흘겨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오늘도 여기서 헤어지네. 둘이 잘 들어가.”
지아 누나가 인사하며 손을 흔들자 규원이와 윤희도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나도 손으로 화답한 뒤 주현 선배 쪽을 쳐다보았다. 선배는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곧바로 내렸다.
우리는 각자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에도 나는 주현 선배와 함께 돌아가게 되었다.
“…….”
걸어가면서도 선배는 조그마한 액정에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영단어 몇 개씩 외우세요?”
“50개.”
넌지시 말을 걸었더니 곧바로 돌아오는 응답.
“하루에 50개인 거죠?”
고개를 살짝 움직여서 긍정의 표시를 하는 주현 선배. 눈은 단 한 치도 액정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또 끊기네.
나는 입술을 벌리려다가 금세 다물었다.
도로를 내달리는 차량들이 내는 굉음과 행인들이 내는 소음이 우리의 주위를 감쌌다.
나는 주현 선배의 느릿한 걸음에 최대한 보폭을 맞추었다.
어서 단어 50개를 다 외우길!
곁눈질로 선배의 기색을 살피면서 속으로 그렇게 외친 지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선배가 드디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기회는 지금!
다행히 미리 생각해 둔 화제가 있다. 꽤나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내용이라는 점이 문제인데…….
주현 선배는 지면을 향해 고개를 내리깔고 있었다.
이대로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건 역시 좋지 않겠지. 좋아, 이판사판이다!
“주현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일부러 밝은 톤으로 운을 떼자 선배가 반응을 보였다.
“어느 대학교에 가실 거예요?”
주현 선배가 눈을 몇 차례 깜빡거렸다.
“그건, 왜…….”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요.”
되도록 가벼운 느낌이 드는 어조를 선택했다.
그런데 주현 선배의 보폭가 보폭을 늦추었다.
“주현 선배?”
“나는……. 한성, 대학교.”
“진짜요? 저도 한성대학교 노리고 있는데.”
“…….”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성대학교라는 명사에 흥분하고 말았다는 것을.
나를 바라보는 주현 선배의 눈빛에는 살짝 놀란 기색이 담겨 있었다.
“아.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냐…….”
고개를 홱 돌리는 선배.
이대로라면 또다시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어떻게든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
“한성대학교의 어느 과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의과…….”
“그러면 장래 희망이 의사에요?”
선배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좋은 꿈이네요.”
“……응.”
대답을 마친 주현 선배가 다시 시선을 지면으로 내렸다.
보통이라면 역으로도 질문을 날리면서 대화가 이어질 텐데.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조용히 한숨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실망한 것은 아니다.
기회는 앞으로도 더 있을 테니까.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덧 선배가 다니는 학원 건물에 당도했다.
“……갈게.”
“네. 들어가세요.”
목례를 하자 선배가 손을 살짝 들었다. 그러고 나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 * *
저녁 8시를 조금 넘긴 시각. 밥상을 사이에 두고 나와 슬기가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오이소박이와 구운 김, 김치, 간장.
“끄응. 오이는 싫은데.”
오만상을 찌푸리는 슬기.
슬기는 어릴 적에 쓰디쓴 오이를 먹고 난 이후로 오이만 보면 질색했다.
“왜? 시원하고 맛있는데.”
나는 그렇게 내뱉은 뒤 오이소박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두 안 먹을래!”
슬기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고는 간장 종지를 자기 쪽으로 당겨왔다.
“오늘은 김이랑 김치만 먹을 거야!”
“그러든지.”
영락없는 어린애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한동안 밥그릇 비우기에 열중했다.
“오빠.”
슬기가 숟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빠네 반에는 어엄청 소심한 사람 없어?”
“갑자기 왜?”
김 한 장을 집었다가 도로 놓으면서 되물었다.
“있어? 없어?”
“음……. 우리 반에는 없어.”
예전 같았으면 그나마 윤희를 떠올렸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점차 밝은 쪽으로 변해가고 있으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예전부터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었다. 소심함 성격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셈.
“아하.”
슬기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사실 우리 반 친구 중 한 명이 엄청 소심해서. 막 말을 걸면 깜짝깜짝 놀라더라구. 그래서인지 항상 혼자 겉돌아.”
“웬일로 그런 것에 신경 쓰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고민 상담인 듯하여 나는 진지한 태도로 임하며 귀를 열었다. 슬기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목소리를 내었다.
“그 애랑 친해지고 싶어서. 근데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오빠는 알아?”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응……. 어떤 애일지 궁금하고 막 그래.”
“흐음. 소심한 애랑 친해지는 방법…….”
나는 턱을 문질러댔다.
슬기가 얼굴에 기대감을 드러내며 나에게 집중했다.
……은근히 부담스러운데.
“계속 말을 붙여보는 게 가장 좋을 거야.”
“부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데도?”
슬기가 동그랗게 뜬 눈을 한 채 반문했다.
“점점 불리는 게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거지. 그렇게 차츰 관계를 쌓아나가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친해져 있을 거야.”
사실 이 말은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나와 스터디 부원들이 계속 해서 두드리면, 주현 선배가 언젠가는 마음을 열 것이라는 희망.
“아!”
슬기가 손뼉을 쳤는데 무척이나 시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고마워, 오빠.”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고.”
주현 선배와도 이렇게 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우리는 다시 밥그릇에 집중했다.
* * * *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 나는 방에 들어가 국어문제집을 꺼냈다.
부 활동 시간에 이미 정해둔 분량까지 다 풀었지만 좀 더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문제를 풀던 중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표시된 발신자는 지아 누나였다.
“여보세요?”
[영재야아. 지금 뭐 해?]
지아 누나의 목소리는 언제 어느 때에 들어도 발랄하고 활력 넘쳤다.
“한참 공부하던 중이었죠.”
[아아. 혹시 방해한 거야?]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뜬금없이 기합 들어가 있네.]
누나의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영재야. 혹시 잠깐만 만날 수 있을까? 저번에 만났던 놀이터에서 말야.]
“음? 누나 설마, 자전거 탔어요?”
[딩동댕.]
위기의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발랄한 음성.
나는 놀라서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이미 10시를 지난 참.
“누나. 거기 근처에 이상한 사람 없죠?”
[당연히 없지. 나 혼자야.]
저번에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으면서…….
“누나.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요. 제가 진짜 10분, 아니 5분 내로 달려갈게요.”
[만나러 와주는 거야? 고마워라.]
“걱정되니까 그러는 거라구요! 아무튼 지금 갈게요.”
얼른 통화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부는 나중이다. 일단 지아 누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다.
“오빠 어디 가?”
“잠깐 친구 만나러!”
대충 둘러대고 나서 현관을 나섰다. 그런 뒤 놀이터까지 쉼 없이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쯤에는 숨넘어가기 직전의 상태였다.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있던 지아 누나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와아. 진짜 금방 왔네.”
헉. 헉.
너무 숨이 차올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앉아서 숨부터 고르자.”
지아 누나가 나를 부축하다시피 하여 벤치에 앉혔다. 심호흡을 수 차례 하고 나서야 간신히 원래의 호흡을 되찾았다.
“후우. 아무 일 없어 보여서 다행이네요.”
“보기보다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구나?”
“저번에 안 좋은 일도 있었잖아요.”
안 좋은 일이란, 지아 누나가 양아치들에게 헌팅 당했던 일이다.
“아, 그거. 그래도 걱정 안 해도 돼.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거든.”
누나의 태평스런 응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위험한 건 위험한 거라구요.”
강하게 밀어붙이자 지아 누나가 입을 다물었다.
“알겠어. 조심할 테니까.”
“약속이에요.”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째 규원이가 하는 짓을 따라 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는 듯한데.
지아 누나가 빙그레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주현이 때문이야. 집 돌아갈 때 주현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누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모가 빼어난 걸로도 모자라 마음씨마저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런 정성을 주현 선배가 눈치채 준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나는 지아 누나에게 주현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음…….”
누나는 잠시 침음을 흘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거의, 대화가 아니네. 네가 일방적으로 질문하고 주현이는 대답만 하고…….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정보는 잘 건진 것 같아.”
누나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했다.
“역시 주현이와 친해지는 일은 쉽지 않네.”
지아 누나가 짤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게 말이에요.”
“조금 더 다가갈 만한 방법 없을까?”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누나. 눈빛에서 왠지 모를 간절함이 느껴졌다.
“글쎄요…….”
“생각 안 나면 말구.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긴 한데…….”
말꼬리를 흐리는 중에 불현 듯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 저 방금 뭔가 떠올랐어요.”
“오오! 뭔데?”
“주현 선배가 8시부터 학원을 가거든요. 그러니까 마칠 시간쯤에 마중을 나가는 건 어떨까요?”
* * * *
결과부터 말하자면 지아 누나는 찬성했다.
나는 주현 선배에게 미리 연락을 하여 마치는 시간을 알아냈다.
“영재야. 내 뒤에 탈래?”
지아 누나가 자전거 뒷바퀴를 가리켰는데 마침 앉을 만한 받침대가 있었다.
“이런 건 원래 제가 해야 하는데.”
“자전거 잘 타?”
슬프게도 내가 타본 자전거는 세발자전거뿐이다.
“아뇨…….”
“그럼 나한테 맡겨.”
“안전 운전 부탁드릴게요.”
“걱정마.”
누나가 눈을 찡긋했다.
그로부터 약 10분 후, 우리는 학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주현 선배가 나올 때다.
우리는 건물 입구에 들어가 있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리자 주현 선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너네들…….”
주현 선배가 무척 놀란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마중 왔어.”
지아 누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이 기대를 밑돌았다.
“그, 그러지, 않아도…….”
“주현 선배.”
나는 말을 더 이어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말꼬리를 끊어버렸다.
“김주현.”
우리는 동시에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웬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어, 엄마…….”
나와 누나는 놀란 눈을 한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얘네들은 누구니?”
인사를 드리려는 찰나에 주현 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치, 친구들. 스터디부의…….”
아주머니의 눈이 우리를 훑어보았는데, 마치 염탐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주현아. 집 가야지.”
아주머니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섰다.
주현 선배는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쭈뼛거렸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