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73화-조심스럽게 혹은 어정쩡하게(1)
윤희네 집에서 합숙하고 난 다음날.
새로운 한 주의 시작부터 교실이 소란스러웠다.
바로 주말 내내 나와 윤희가 학생 교사를 하지 못한 것을 두고 나온 풍문 때문이었다.
“저번 주 주말에 스터디 부원들끼리 합숙했다고 누가 그랬는데, 진짜야?”
적극적인 여자애들 몇몇이 나와 윤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호기심을 내비쳤다.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찔리는 기분이었다.
윤희네 집에서 합숙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도연이밖에 없는데 어떻게 안 거지?
“누가 그랬어?”
나는 철판을 깔고 되물었다.
“글쎄에……. 나도 어디서 들었어. 모텔에서 단체 합숙했다고…….”
“설마, 한방에서 잤다든가?”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왜 뜬금없이 모텔이 나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절로 목청이 올라갔다.
“뭐지 이 반응은? 이거, 합리적 의심이 가는데?”
“합리고 자시고, 너네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거잖아.”
따지듯이 얘기하자 여자애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경우는 참기가 어려웠다.
오해는 최대한 없도록 하는 게 좋으니까.
윤희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적절한 타이밍에 한 마디 얹었다.
“맞아. 우리 집에서 합숙했어. 그만큼 공부도 많이 했고. 됐지?”
“아, 그랬어? 너네들 엄청 사이 좋아졌구나.”
그 말을 끝으로 여자애들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나는 윤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뭘. 이상한 짓 한 것도 아니고.”
윤희가 어깨를 가볍게 들먹였다.
“어 응. 그렇지…….”
“아니면, 세게 나가서 놀란 거야?”
역시 눈치 백단…….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윤희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의외네. 벌써 적응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음에는 안 놀랄 거야. 진짜로.”
“약속한 거다?”
“물론.”
나는 힘주어 응답했다.
그런 뒤, 소문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규원이를 슬쩍 떠보았다. 하지만 그런 적이 없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걔네들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알아냈는지 영영 알아낼 수 없게 되었다.
윤희의 현명한 대처 덕분에 이후로 풍문이 나돌지 않게 되었으니 상관은 없지만.
그로부터 이틀이 흘러, 기말고사가 2주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 수업 시간마다 졸던 애들도 이제는 슬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 몰라라 하고 엎어져 자는 애들도 있지만.
나는 노트 필기하다 말고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윤희의 모습. 손에는 샤프를 쥐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크게 한 번.
눈물이 찔끔 나왔는지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왜?”
고개를 45도 정도 돌린 채 내게 눈길을 던졌다.
“수업 잘 듣고 있나 해서.”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애초부터 이유는 없었다. 그냥 문득, 쳐다본 것뿐이니까.
“흐음.”
윤희는 싱겁게 반응하고 나서 다시 칠판으로 눈길을 던졌다. 이윽고 활자를 쓰기 시작하는 손.
나는 맨 앞줄에 앉은 규원이의 뒤통수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전봇대처럼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잠들지 않는 습관이 상당히 많이 밴 것이다.
무척 보기 좋은 모습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규원이의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솟구쳐 올랐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워준 뒤 칠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 한눈을 팔았지만, 수업 내용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귀를 항상 열어놓기 때문이다.
나른하면서도 평화로운 오전 수업의 한때.
아마 이번 한 주는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리들의 인사를 받고 교실 문을 나서는 선생님.
볼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쭈욱 켰다.
이번 시간에는 여유를 즐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
점심 시간, 우리 셋은 급식을 먹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잠깐 매점 들르자!”
제안을 한 규원이가 우리들을 이끌었다. 그러고는 콜라 3캔을 샀다.
“자. 너네 거.”
나와 윤희에게 캔을 건네며 규원이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그렸다.
“응. 고마워.”
감사를 전하며 캔을 땄다.
“잘 마실게.”
윤희가 밝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후후. 친구끼리니까. 다음엔 나도 기대할게.”
규원이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선심 쓰듯이 굴더니 나중에 다 받아먹으려는 생각이었구만?
그렇다고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친구 사이니까.
콜라를 다 마시고 나서 교실로 돌아왔다.
“난 좀만 잘래…….”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규원이가 금세 책상과 한 몸이 되었다. 우리는 자리로 돌아와서 각자 공부할 책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틀어 윤희를 바라보았다. 눈을 부릅뜬 채 집중하고 있는 모습.
슬쩍 확인해 보니 수학 문제집이었다.
방해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내 노트로 고개를 돌린 찰나,
“영재야아!”
매우 낯익은, 명랑하고 밝은 음성이 들려왔다. 위치는 교실 뒷문.
시선을 돌리자 손을 흔들고 있는 지아 누나가 보였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에게 다가갔다.
“누나 어쩐 일이에요? 혹시 규원이 찾으러 왔어요?”
“아니. 너네한테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머릿속에서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세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윤희가 서 있었다.
“규원이라면 지금 자고 있어요. 깨울까요?”
“응. 그래 주면 고맙지.”
윤희가 규원이를 깨우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 윤희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지아 누나가 곧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저번에 카페 가서 주현이 얘기했던 거 기억하지?”
“아!”
다행히 이번에는 곧장 기억해냈다.
그때 맞았던 딱밤의 맛을 잊지 않아서 그런 걸까.
“슬슬 애들한테도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야.”
“확실히 누나 말대로라고 생각해요. 그나저나 주현 선배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지아 선배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부군요.”
“맞아. 어딘가의 한씨 성을 가진 애처럼.”
말괄량이 같은 미소를 짓는 지아 누나.
“에이, 제가 뭐 공부하는 기계도 아니고.”
“다른 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뭣하면 한 번 물어볼까?”
“……다시 생각해 보니 누나 말이 맞는 것도 같네요.”
결국 수긍하고 마는 나였다.
“깨워 왔어요.”
윤희가 규원이를 앞장세운 채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규원이는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으하암. 언니 왜에?”
엿가락 마냥 한껏 늘어지는 음성.
“자는 거 방해해서 미안. 근데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규원이가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거세게 비볐다. 눈꺼풀을 두세 차례 깜빡거리자 눈빛이 한결 맑아졌다.
“할 얘기? 응. 여기서 하려는 거지?”
“…….”
규원이의 발언에 우리 셋은 잠시 말을 잃었다.
“우리가 이해해야지.”
“그러게.”
윤희가 나와 뜻을 같이 했다.
지아 누나는 규원이를 보며 배시시 웃는 게 전부였다.
“자리 옮길 거야. 나 따라 와.”
지아 누나가 한 걸음 먼저 앞장섰고, 우리 셋은 그 뒤를 따라갔다.
윤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냥 내 예감인데, 주현 선배 얘기하려는 거야?”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윤희가 물었다.
솔직히 놀랍지도 않았다. 3달 넘게 겪었으니까.
나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윤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나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둘이 뭔 얘기했어?”
맨 뒤에서 따라오던 규원이가 의문을 표했다.
“네 욕했어.”
상쾌하게 답하는 윤희.
“뭐, 뭐? 내 욕?”
“응.”
“윤희 너. 그런 애로 안 봤는데…….”
실망에 젖은 음성이 내 귓가에도 맴돌았다.
“사실 뻥이야.”
“……잠깐만. 난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는 거야?”
규원이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윤희가 소리 내어 웃었다.
둘이 정말로 사이가 좋아졌구나.
나는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우리는 구름다리를 지나 별관동으로 넘어갔다.
스터디드림으로 향하는 3층 계단에서 지아 누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지아 누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부른 건, 주현이 때문이야.”
“아, 그랬구나. 그래서.”
내 옆에서 규원이가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주현이가 우리랑 별로 엮이지 않으려고 하니까.”
“사실 저도 걱정하는 부분이었어요.”
윤희가 동감을 표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가장 걱정하는 점이었다.
지아 누나가 우리들을 한 번씩 바라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나와 단둘이서 했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었을 때 주현 선배가 보인 행동, 평소 교실에서의 모습과 1학년 때 보였던 모습들.
말을 마친 지아 누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간에 살짝 그늘이 져 있었다.
윤희와 규원이의 표정도 그다지 밝지 않았다.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래. 생각해 보니까 주현이 언니는 하굣길에 항상 거리를 두더라.”
규원이가 엄지로 턱을 받친 채 조심스러운 톤으로 말했다.
“그것 말고도 많지…….”
말끝을 얼버무리면서 주현 선배의 평소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스터디부에서는 거의 한 마디도 않고 공부에만 매진하고.
나와 단둘이 돌아갈 때도 절대로 먼저 말을 걸지 않고.
말을 걸어도 단답만 할 뿐.
“주현이 문제는 한두 사람만 다가간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봐.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것 같아.”
“누나. 혹시 생각해둔 방안 같은 게 있어요?”
“방법이라고 해봤자 우리가 어떻게든 다가가는 것 말곤 없지. 말을 계속 붙여본다거나 교실에서도 일부러 같이 붙어 있는다 거나…….”
“두 번째 방법은 언니만 할 수 있겠네요.”
윤희의 지적에 지아 누나가 입을 다물었다.
규원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신음성만 냈다.
나도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지아 누나가 말한 것보다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스터디부에서 계속 말을 거는 건 공부를 방해하게 될 테니 일단 패스.
남은 방법이라고 해봐야 하굣길에서 계속 말을 거는 것 정도.
하지만 그건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내가 그 얘기를 하자 윤희가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입술을 열었다.
“방법은 어차피 말을 걸고 같이 붙어 있는 걸로 친밀감을 높이는 것밖에 없어. 그러니까 방식을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떨까?”
“방식?”
지아 누나가 되물었다.
윤희가 슬며시 미소를 짓고 나서 설명을 시작했고, 우리 모두 그 방식에 찬성했다.
* * * *
오늘도 별 탈 없이 스터디부 활동을 마치고 나서 우리는 하굣길에 올랐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와 윤희는 바로 뒤에서.
주현 선배는 당연히 먼 발치에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주현 선배의 동향을 살폈다.
주현 선배는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리 집중해서 보고 있는 걸까.
고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윤희가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바라보자 시선이 마주쳤다.
가볍게 고갯짓을 하는 윤희.
지아 누나와 규원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 개시.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고, 세 사람은 보폭을 유지하며 나아갔다.
슬쩍 뒤돌아보니 주현 선배와의 거리가 좁혀져 갔다.
나는 아예 다리를 멈췄다. 어느덧 앞서가는 세 사람과 거리가 꽤나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윤희가 생각한 방식이었다.
네 명이 동시에 다가가면 주현 선배가 부담스러워할 테니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해보자는 것.
첫 번째 주자는 나.
스터디드림의 부장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굣길 집 방향이 같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잠시 후 주현 선배와 나란히 서게 되었다.
“주현 선배.”
목소릴 낮춰서 불렀는데도 주현 선배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앗. 미안해요.”
“……아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나저나 뭐 보고 있어요?”
주현 선배가 한 번 힐끔거리더니 스마트폰을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화면에는 영단어가 적혀 있었다.
“진짜 열심히 하네요.”
주현 선배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엄마가 항상, 하라고…….”
선배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역시 말 걸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모두가 정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