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72화-하나가 될 수 없는(3)
주현 선배에게서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학원 수업 듣나 봐.”
중얼거린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나는 지아 누나와 똑같은 수학 문제집을 펼쳐놓고 개념과 풀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윤희는 규원이의 사회 과목 공부를 봐주었다.
대략 1시간 반 가까이 공부를 이어가다가 휴식 시간을 가졌다.
“다들 홍차 한 잔 어때?”
윤희의 권유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답했다.
“그럼 준비해 올게.”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윤희에게 도와줄 게 없냐고 물었다.
“아냐. 편하게 앉아있어.”
윤희가 슬며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지.
“어머. 영재 바람맞았네.”
지아 누나가 옆에서 입술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었다.
“아아, 이 누난 또 그런 걸로 막 놀리네. 뭔 바람을 맞아요?”
“흐음. 왜 갑자기 흥분하고 그러실까……. 혹시 찔린다든가?”
지아 누나는 자신의 턱을 검지로 문질러댔다. 다 이해한다는 듯한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찔리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다고 그래요오. 누나 혹시, 전생에 악마였어요?”
“글쎄에.”
지아 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쩌면 네 말대로 악마였을지도 모르겠는 걸?”
“역시나!”
주먹으로 식탁을 가볍게 내리쳤다.
지아 누나는 전생에 아마 남자 수백쯤은 홀리고 다녔을 요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틈만 나면 나를 놀리려고 하지.
“언니! 언제 전생을 본 거야? 나도 궁금해! 알고 싶어!”
옆에서 열을 올리며 끼어드는 규원이.
웬일로 가만히 있는다 싶더니만.
“에이, 그런 걸 어떻게 봤겠어? 그치, 영재야?”
지아 누나는 규원이를 향해 손사래를 치고는 내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킨 채 생각을 거듭했고, 또 다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어쩌면, 구미호였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악마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엄청 예뻤을 것 같잖아.”
지금도 충분히 예쁘십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런 데서 사심 섞인 발언을 하기는 좀 그랬다.
“네. 확실히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니 이 정도 선에서 대답하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영재야, 영재야! 내 전생은?”
규원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너, 설마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
“물론이지! 재미로 한다는 것쯤은 안다구.”
“……진짜?”
목소리를 깔고 되물었다.
“아, 알고 있다니깐! 날 뭘로 보고.”
“원한다면 들려줄 수도 있어.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규원이를 향해 고개를 약간 들이밀었다. 그러자 규원이가 갑자기 손사래를 치며 저어했다.
“아, 아냐. 갑자기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아쉽다. 나는 영재가 우리 규원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는데.”
명랑한 목소리로 바람을 넣는 지아 누나.
“그러면 누나한테만 살짝 말할까요?”
“응. 좋아.”
“잠깐! 그럴 거면 그냥 들을래. 들을 거야.”
규원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셋이서 아웅다웅 거리는 동안 윤희가 쟁반을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 소란스럽네.”
윤희가 가볍게 웃었다. 쟁반에는 똑같은 모양을 한 머그컵 4잔이 올려져 있었다.
“홍차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구나?”
“티백이라도 최소 3분 정도는 우려야 하거든요. 물 끓이느라 걸린 시간도 있구요.”
“아하.”
지아 누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윤희가 쟁반에 올려놓은 잔을 우리들에게 건넸다.
나는 머그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김이 피어오르는 연붉은 빛깔의 액체.
“향을 먼저 느끼고 머금으면 좋아.”
우리는 윤희가 설명해준 대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산뜻한 듯 싱그러운 듯, 그러면서도 은은하고 화사한 향이 느껴졌다. 저번에 마셔본 기억이 있는 향.
“이거 얼그레이(Earl Grey)야?”
윤희가 잔에서 입술을 떼고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때도 마셔봤으니까. 향 맡아보니까 기억이 나더라.”
“기억력 좋구나. 하긴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는 거겠지.”
“어……. 나름 상관관계가 깊기는 하지.”
“얼그레이가 뭐야?”
질문을 던진 규원이 외에 지아 누나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홍차의 한 종류예요. 얼그레이 외에도 스트레이트 티, 밀크티, 수테차 등등 종류가 다양해요.”
“밀크티도 홍차의 한 종류였구나. 가끔 사 마셨는데 홍차인 줄은 몰랐어.”
지아 누나가 신기해하며 머그잔에 입술을 댔다.
“음. 향은 나는데 맛은 어째 밍밍한 것 같다?”
“연하게 탔어. 진하게 타면 쓴맛이 강해지거든.”
“아하!”
규원이가 외마디 감탄를 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누군가의 스마트폰에서 깨톡 알림음이 울렸다.
“어? 내 거다.”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주현이가 번호 알려줘서 고맙다고 그러네. 학원 수업 때문에 이제야 봤다고 하면서 말야.”
“조금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신호일까요?”
물음표를 던지자 누나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받아들여도 될 것 같아. 이왕이면 좋게 생각하자.”
“응응. 언니 말대로 생각하자. 어쩌면 너어무 소심해서 못 물어봤던 걸 수도 있잖아.”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규원이의 생각에 윤희가 동조했다.
“답장 보내야겠다. 공부 열심히 해, 라고.”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 액정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우리도 한 마디씩 보내자.”
윤희가 나서서 제안하자 나와 규원이도 각자의 휴대폰을 꺼냈다.
다른 애들은 깨톡으로 보내는데 혼자서만 문자메시지로 보내려니 따로 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뭐 어때.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으니까.
* * * *
홍차를 즐기고 난 다음에는 수업 대신 각자 공부를 했다.
계속 누나만 가르쳐 주다간 내 공부를 할 여유가 없어지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체감상 시간이 꽤 흘렀을 무렵 규원이가 문제집 위로 엎어졌다.
“배고파아.”
어린아이 같은 칭얼거림.
“벌써 2시가 지났네!”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보며 소리쳤다. 아침을 9시쯤에 먹었으니 꽤나 시간이 지났구만.
“뭣 좀 먹고 공부해야겠네.”
나는 몬아미 볼펜을 책 페이지 사이에 끼웠다.
윤희도 만년필의 뚜껑을 닫고 조심스럽게 노트에 올려놓았다.
“각자 뭐 먹고 싶은지부터 얘기해 볼까? 나는 떡볶이나 돈가스.”
지아 누나가 선수를 쳤다.
윤희는 초밥 아니면 우동.
규원이는 죽어도 떡볶이라며 목에 힘을 주었다.
“요새 떡볶이 타령 자주 한다?”
“후훗.”
지적해 보았지만 규원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의견이 겹치는 건 떡볶이 하나뿐…….”
“그러게. 윤희 말대로네. 영재 너는?”
“저는 뭐든 좋아요.”
나는 지아 누나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누나가 우리를 둘러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떡볶이로 할까?”
“응! 무조건 떡볶이! 읎기떡볶이!”
쌍수를 들며 외치는 규원이.
누가 보면 야구장에서 응원하는 야구팬인 줄 알겠네.
나는 윤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어때?”
“그럼 나도 떡볶이로.”
윤희도 동의를 표하면서, 만장일치로 읎기떡볶이로 결정되었다.
“오예에에!”
가장 들뜬 사람은 당연히 규원이었다.
“그럼 각자 돈 모아서 내는 걸로 하자!”
“그게 얼마야?”
너무 비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오천원!”
얼마나 자주 시켜 먹었으면 곧바로 답변이 튀어나오는 거냐.
그나저나 만오천원을 4등분하면 얼마씩 내야 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암산을 해보았다. 결과는 3,750원.
집에 돌아갈 때는 버스를 안 탈 예정이니 돈을 낼 수는 있다. 부담은 상당하지만…….
그때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냐. 내가 초대한 거니까 내가 낼게.”
“응?”
우리 셋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윤희야. 오히려 우리가 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 너네 집에서 얻어먹은 것도 있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 지아 누나.
누나의 말은 타당했다. 이틀 동안 신세 진 걸 생각하면 얻어먹기가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니까.
나와 규원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지아 누나의 의견에 동조했다.
세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윤희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담가지지 말아요. 그만큼 믿는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규원이와 지아 누나가 의아한 표정을 내비쳤으나 윤희는 그저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 자리에서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을 테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규원아. 주문은 네가 해. 나는 그런 거 시켜 먹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몰라.”
“오케이. 나만 믿으라구!”
규원이가 엄지를 치켜세운 뒤 전화로 주문을 했다.
“매운맛은 중간 정도로 했으니까 먹을 만할 거야.”
규원이의 입꼬리가 계속 씰룩거렸다. 먹을 생각만으로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20분 정도가 지난 후 떡볶이가 배달되었다.
식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커다란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시뻘건 용암 같은 비주얼이 세상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떡에 소시지에 어묵에, 허연 건 치즈로군.
“그래. 이거지, 이거.”
규원이의 눈빛이 황홀경에 차 있었다. 지아 누나도 행복한지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각자 먹을 만큼 그릇에 덜어낸 뒤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젓가락으로 떡을 집어 들고 그대로 입에 넣었다.
……매웠다. 아주 격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윤희도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음? 너네 왜 안 먹어?”
규원이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었다. 참고로 규원이와 지아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매워서.”
“이게? 일부러 중간 맛으로 한 건데.”
“그래도 매워죽겠는데.”
윤희도 고개를 움직이며 내 말에 맞장구 했다.
“의외다. 윤희는 그렇다 쳐도 영재 넌 매운 거 잘 먹을 줄 알았는데.”
“정 안 되겠으면 너네 둘은 다른 걸 먹어야겠네.”
누나의 말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떡볶이는 두 사람에게 맡긴 채 우리는 단지 내에 위치한 편의점으로 향했다.
“내 돈 내고 내가 못 먹을 줄은 몰랐는데.”
윤희는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내가 살 테니까 맘 편히 골라.”
그래서 컵라면 하나만 골라오자 윤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보단 좋은 걸로 먹자.”
“……응.”
시키는 대로 컵라면을 제자리에 놓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윤희가 고른 것은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저기서 먹을까?”
나는 안쪽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아냐. 그래도 같이 한 자리에서 먹는 게 낫지.”
“아. 그렇네.”
계산을 마친 뒤 우리는 편의점을 나섰다.
짐을 드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 * * *
저녁 8시가 되어 스터디부 활동을 마감했다.
나와 지아 누나, 규원이는 각자의 짐을 챙겼다.
“조심히 들어가.”
현관 앞에서 윤희가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 셋은 정말로 즐거웠다고 덕담을 한 마디씩 하고 나서 현관을 나섰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앞에 서고, 나는 바로 뒤에서 따라갔다.
“집 가면 가볍게 자전거나 탈까.”
지아 누나가 기지개를 켰다.
“이 시간에요?”
“뭐든 운동을 안 하면 좀이 쑤셔서 말야. 자전거 타면 또 기분이 상쾌하거든. 그리고 일전에 자전거 탔을 때 만났잖아.”
“둘이 언제 만났대?”
흥미를 드러내는 규원이.
“아. 저번에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난 적이 있거든.”
“오호라. 그랬단 말이지.”
“그냥 얘기 좀 했었어. 다른 건 없어.”
지아 누나가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아니면, 집에서 스트레칭을 해도 되겠고.”
“언니, 그거 말하는 거지? 근력 키우는 거.”
“응. 맞아.”
당최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짜고짜 주어가 빠진 문장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스트레칭은 원래 몸 푸는 거 아닌가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보냈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 발레했었거든.”
지아 누나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옆에서 규원이가 고개를 두 번 움직였다.
“그때 언니가 엄청 잘했어!”
“너무 띄우지 말아.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인 걸.”
“그치만 언니…….”
“쉿.”
누나가 검지를 입술에 대자 규원이가 합죽이가 되었다.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 지아 누나.
“아무튼 그런 적이 있었어.”
“그랬군요.”
곧이어 헤어질 때가 다가왔다.
“영재야, 잘 가.”
두 사람이 내게 손을 흔들어주자 나도 손을 들고 화답했다.
우리는 각자의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사실은 좀 더 물어보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단지 규원이가 옆에 있어서라는 이유때문이 아니었다.
지아 누나의 눈빛이 어딘가 서글퍼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