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71화-하나가 될 수 없는(2)
“하아.”
윤희가 팔짱을 낀 채 거센 한숨을 내뱉었다. 지아 누나는 아랫배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무튼, 그런 장난은 치지 마세요. 아시겠죠?”
윤희가 지아 누나를 향해 검지를 치켜세웠다.
“미안. 장난이 좀 지나쳤네.”
시선을 살짝 내리깐 채 머쓱해하는 지아 누나.
항상 주도권을 쥐고 분위기를 휘어잡는 사람이 꼬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꽤 신선했다.
솔직히 방금 건 내 생각에도 도가 지나치다 싶었고.
매우 좋은(?) 구경을 못한 게 한편으로 아쉽…… 지는 않다. 나는 지극히 도덕적인 사람이니까.
“아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지아 누나는 윤희에게 한 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다.
“와, 언니가 저러는 모습은 진짜 오랜만에 보는데.”
규원이에게도 상당히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 아무튼, 다음에는 진짜로 안 그럴게. 응?”
지아 누나가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윤희는 그제야 팔짱을 풀었다.
“그나저나 윤희야. 아까 나한테 언니라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건, 급박한 상황이어서 저도 모르게…….”
지아 누나의 지적에 말꼬리를 흐리는 윤희. 덕분에 순식간에 구도가 역전되었다.
“아냐. 저번 주에 내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으니까. 이제야 불러주는구나 싶어서.”
“네. 그랬죠…….”
윤희가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조금 전까지 지아 누나에게 한소리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담?
“그래서 좀 많이 기뻤어. 선배보다는 언니가 더 가까운 사이 같잖아.”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
윤희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규원이가 어깨를 한 번 들먹였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나 몰라. 나처럼 그냥 편하게 언니, 언니 하고, 반말도 하고.”
“아니, 넌 지아 누나랑 원래 친했으니까 그런 거잖아.”
“물론 그렇지.”
내 지적에 규원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주현 언니랑은 별로 안 친한데도 언니이, 라고도 하잖아. 반말은 아직 못하겠지만 말야. 에휴.”
“아직 주현 선배에게는 거리감이 많이 느껴지니까. 조심스러워.”
“나도 그래.”
윤희의 말에 나는 동감을 표했다.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친근감을 표시하는 규원이조차도 반말은 못하겠다고 할 정도인데, 나와 윤희는 오죽하겠는가.
지아 누나도 어느새 식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일단 그 문제는 시간을 갖고 지켜보자구.”
“응!”
규원이가 기운차게 대답했고, 윤희는 이쪽을 향해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지아 누나가 나 대신 의문을 표했다.
“언니는 스킨쉽에 별로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서요.”
“아. 언니 소리 듣기 좋다. 한 번만 더 해 줘.”
“계속 그러시면 다시 선배라고 할 거예요.”
윤희가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아이 참, 알았어. 안 할게.”
지아 누나가 결국 꼬리를 내렸다. 그런 뒤 윤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 말대로야. 나 스킨십에는 많이 익숙하거든.”
누나의 오른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만지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발언.
나와 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직 규원이만 다 이해한다는 듯 실실 웃었다.
“그건 그렇고 윤희 너, 최근에 부쩍 밝아졌네. 훨씬 보기 좋아.”
“그래요?”
윤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아 누나의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영재야.”
지아 누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나가 고개를 가까이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누, 누나?”
“가만히 있어.”
이윽고 들려오는,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 잠시 후 지아 누나가 내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땀 냄새 나. 샤워해야겠네.”
“헐? 진짜요?”
충격을 받은 채 되묻자 누나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호, 혹시, 많이 심해요?”
“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샤워하러 가겠습니다!”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다음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영재야. 혹시 문 잠글 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그러면 재미없는데.”
“네?”
나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 나갔다.
“샤워도 스릴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 맞아! 스릴 있는 인생이야 말로 재밌는 거지.”
동조하고 나서는 규원이.
나는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반문했다.
“그러니까 그 말인 즉, 엿보기를 한다는…….”
두 사람이 대답 대신 입꼬리를 귀밑까지 끌어올렸다.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 최대의 위기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때 윤희가 두 사람의 어깨를 붙들었다.
“우리 매너는 지킵시다. 넌 어서 샤워하러 가. 내가 감시할 테니까.”
“어? 어. 고마워.”
나는 욕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 * * *
이런저런 소동이 있고 난 이후로 찾아온 취침 시간.
여자들은 윤희의 방에서 자기로 했다. 남자인 나는 거실 소파행.
윤희가 가져다준 얇은 이불로 몸을 덮었는데, 영 잠이 오지 않았다.
항상 바닥에 이불만 깔고 자다가 푹신한 곳에 몸을 뉘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여자애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널따란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지만 어두워서 누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영재야. 자?”
윤희의 목소리에 나는 곧장 응답했다.
“아니. 왜?”
“잠깐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윤희는 잠시 식당으로 자릴 옮기자고 얘기하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윤희의 뒤를 따라갔다.
식당에 도착하자 윤희가 주황색 조명을 켰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윤희는 식탁 위에 베이지색 노트 한 권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지난번에 본 적 있는 시집 노트였다.
“읽어달라는 거지?”
“미안해. 이런 늦은 시간에…….”
나는 마음 쓰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부탁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잖아. 이해해.”
다 같이 공부하는 자리에서 시를 읽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나는 윤희에게서 받아든 시집 노트를 펼쳤다. 정갈한 글씨체가 먼저 눈에 띄었다.
“수학여행 다녀온 뒤로는 계속 글감이 떠오르더라고.”
“그렇구나.”
윤희의 부연 설명을 들으며 한 글자씩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 내려갔다.
대체로 짧은 시편들.
간혹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할 만큼 긴 분량을 지닌 시도 있었다.
그렇게 총 10편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읽었다.
“으음.”
나는 노트를 조심스레 덮고 윤희에게 돌려주었다.
“어땠어?”
무척이나 긴장한 말씨였다. 나는 턱을 괸 채 신음성을 냈다.
“그냥, 느낀 그대로 얘기해 줬으면 해.”
이렇게나 저자세로 나오는 윤희는 꽤 오랜만이었다.
조금 더 애간장을 태울까 하는 나쁜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러나 벌 받을 생각으로 지레 겁먹은 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럴 마음이 쏙 들어갔다.
“솔직하게?”
재차 확인하자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느낌이야.”
이 점을 분명하게 전제한 뒤, 신중하게 표현을 골라가며 말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시는 그때의 기억이나 감상들이 떠올라서 좋았어. 북촌 한옥마을의 전망을 보았던 그 느낌도 생생했고. 시 속의 화자가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도 명확하게 와닿아. 저번에 보여준 것들처럼 이해하기 쉬운 편이었어. 하지만 좀, 너무 드러내놓는 것 같은 인상도 받았어. 읽는 사람이 꼭 그렇게 느껴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꽤 예리하네.”
담담한 음성으로 얘기하는 윤희.
“그래도 계속 쓰다 보면 더 좋아질 것 같아.”
“고마워. 덕분에 다음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도움이 되었으면 다행이고.”
“응.”
윤희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살며시 움직였다. 나는 그런 윤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 쓰는 건 어때?”
담담한 투로 물어보니 윤희는 나를 응시하다가 시작 노트로 눈길을 내렸다.
“재밌어. 재밌고……. 쉬운 듯 쉽지 않다고 해야 하려나.”
“그렇게 얘기하니까 아리송하네.”
나는 짤막한 웃음소릴 내었다.
“항상 쓸 때마다 느껴지는 게 달라서. 하지만 재미있다는 건 변함없어.”
윤희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았다.
“계속, 쓸 거지?”
“아마도 그럴 것 같아.”
윤희가 생긋 미소 지었다.
“고마워.”
“시를 봐줘서?”
되물었더니 윤희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서도.”
“갑자기 그러네.”
나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윤희의 표정이 진지했기에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우리 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는 찰나에 윤희가 입술을 움직였다.
“사실 스터디 드림 멤버 전부를 초대하려고 말하기 전에 엄청 긴장하고 있었어.”
사실만을 고하려는 담담한 음성.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내가 원래 숨기는 거 잘하잖아.”
윤희가 웃었다. 어쩐지 자조적인 미소처럼 느껴져서 함부로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무척 긴장하고 있었어. 지아 선배, 가 아니라 언니랑 규원이가 인터폰 누르기 전까지 혼자 계속 청소하고 있었을 정도였어.”
원래 집안일을 봐주는 분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 주말에는 오지 않은 모양이다.
“너도 알다시피, 안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 혹여나 이번에도 그런 일을 겪게 되는 것 아닐까.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 계속 불안했거든. 계속…….”
윤희의 음성에 온 신경을 기울여 집중했다.
겨울날 창문에 대고 부는 입김처럼 한숨을 흘려보내는 윤희.
“하지만 불안하다고 지레 겁먹고 있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잖아. 나는 앞으로는 변하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것도 네가 듣는 자리에서.”
대관람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변하고 싶으니까. 그러면 좀 더 용기를 내야겠구나, 그런 마음이었어. 그런데 두 사람이 먼저 오고 나서 집 안을 둘러보며 즐거워하니까, 그게 무섭더라.”
“지아 누나랑 규원이는 그 애들하고 달라.”
적어도 그 두 사람은 동전 뒤집기 하듯이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래도 무서웠던 건 사실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로는 알더라도 마음이 꼭 그대로 따라가지만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오늘 하루종일 같이 지내니까 마치 스터디부에서 같이 공부하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더라. 지아 언니와 규원이, 주현 선배는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똑같다는 걸 느꼈어. 초대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해.”
“다행이야.”
“이렇게 용기 낼 수 있었던 건 다 네 덕분이야.”
“난 도와준 게 없어.”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전부 네 덕이야.”
부드러운 시선에서 나는 윤희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 네가 한 거야. 나는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래도 고마워.”
윤희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다.
하지만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여 나는 눈길을 슬쩍 피했다.
“정말로, 고마워.”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
다음날, 다 함께 아침을 차려 먹은 뒤, 스터디부 활동을 재개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지아 누나.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누나가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힘내야겠구만.
규원이의 공부는 윤희가 봐주는 것으로 했다.
“아! 지아 누나. 혹시 주현 선배한테 연락할 수 있어요?”
“어떤 걸?”
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윤희네 집에 올지 말지에 대해서요.”
“어제 집에서 공부한다고 했잖아.”
“그건 알지만 그래도…….”
간절한 눈빛을 보내자 지아 누나가 슬며시 웃었다.
“그래. 영재 부탁인데 이 누나가 들어줘야지.”
누나가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깨톡을 보냈다. 잠시 후 누나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오! 주현이 언니 의외로 답장은 빠르구나.”
규원이가 옆에서 감탄을 했다.
그런데 화면을 들여다보는 지아 누나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음. 지금은 학원을 가서 안 되겠다고 하네. 그런 뒤에는 바로 집에서 공부할 거라고 그러고.”
“아, 역시 안 되는군요.”
“어쩌겠어. 우리는 우리대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지아 누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야죠.”
맞은편에서 윤희가 맞장구를 쳤다.
그때 지아 누나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맞다! 이참에 주현이 번호 공유할게. 일일이 나를 통해서 연락하려면 힘들잖아. 안 그래?”
누나가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주현 선배 허락 없이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반론을 제기하는 윤희. 누나는 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미리 깨톡 보내놓지 뭐. 이렇게 하면 문제없잖아. 하는 김에 너네 번호도 보내놓고.”
“아, 그렇네요.”
윤희의 목소리.
“그럼 번호 불러줄게.”
그렇게 우리는 주현 선배와 각자의 휴대폰 번호를 공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