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70화-하나가 될 수 없는(1) (70/131)



〈 70화 〉70화-하나가 될 수 없는(1)

윤희가 발의한 ‘주말 스터디부 합숙’은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재밌겠다!”
지아 누나가 찬성표를 던졌다.
“와아! 드디어 너희 집에 가보는구나. 만세!”
규원이는 열렬한 환호로도 모자라 쌍수를 들었다. 나는 진즉에 찬성하는 쪽이었고.
주현 선배는 별다른 의견을 표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은 곧 긍정(?)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전원 찬성으로 토요일에 윤희네 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금요일인 어제는 몇몇 애들에게는 양해를 구했다. 이번 주 주말 교사는 일정이 생겨서 못하게 되었다고.
그러자 애들이 우려와는 달리, 나의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참고로 도연이에게는 미리 사정을 밝혔다. 그러자 도연이는 묵은 때를 벗겨내듯이 시원스레 응답했다.
“그래. 이번 주는 내가 너네 몫만큼 노력하지, 뭐. 대신에 커피 하나 사.”
“응?”
눈을 깜빡거리며 되묻자 도연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넌 자꾸 나한테 상처를 주는구나……. 기껏 아물고 있었는데…….”
“아아! 당연히  주지! 그깟 커피쯤이야! 말만 해. 말만.”
고릴라마냥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럼, 약속한 거다?”
“어, 어. 그래.”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토요일이 밝았다.
나는 필요한 짐을 챙긴 다음 가방을 어깨에 멨다. 집을 나서기에 앞서 나는 휴대폰의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어제 윤희과 나눈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자들밖에 없는데 내가 껴도 괜찮은 거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 물어본 것이다.

「괜찮아. 어차피 머릿수로는 여성진이 우세하니까.」

 번을 읽어봐도 납득이 가는 이유로군.
나는 슬기에게 숙제 잘하라고 일러놓은 다음 현관을 나섰다. 여기서 윤희네 집까지 도보로 1시간 남짓.
하지만 나는 몇 걸음 옮기다가 이내 멈춰 섰다.
 이렇게 더운 거냐…….
그러고 보니 일기예보에서 기온이 30도랬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미래를 예측해 보았다. 내가 이대로 1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면 당연히 옷에서  냄새가 날 테고, 그렇다면…….
남의 집에서 땀내를 풍기는 비매너 인간이 되는 거겠지.
세상에 그만한 민폐가 또 어딨을까.
나는 지갑을 열어 자금 현황을 체크했다. 5,840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돌아올  걸어오면  좋을 듯했다.
나는 지갑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 * * *

그로부터 30분 뒤 윤희네 집에 도착했다. 스이첸 1503동 307호.
여길 이렇게  오게 될 줄이야.
인터폰을 누르자 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누구세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윤희의 목소리.
“나야. 한영재.”
[잠깐만.]
인터폰이 끊기고 나서 한참 기다렸더니 현관문 틈새로 윤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나를 경악하게 했던 자동문은 여전히 건재했다. 자동문 너머로 지아 누나와 규원이의 모습도 보였다.
“어서 와.”
“실례할게.”
나는 현관으로 들어섰다.
“너도 일찍 왔네.”
“지금 몇 시야?”
물어보자 윤희가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10시 반.”
원래 11시까지 오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확실히 버스를 타니까 빠르긴 하구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자동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잠깐, 그럼   사람은 대체 언제  거지?
나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뒤, 지아 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누나. 몇 시에 온 거예요?”
“몇 시더라? 윤희야!”
지아 누나가 도움을 청하자 윤희가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10시 약간 넘어서 왔어.”
“내가 언니한테 빨리 가자고 했거든.”
규원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V사인을 흔들어 보였다. 혹시 공부가 그만큼 하고 싶었다는 암시인가?
“셋이서 뭐 하고 있었어?”
윤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음.  펴놓고,  구경하고 있었는데…….”
“충분히 그럴 만해.”
이 정도로 으리으리한 집이면 누구라도 구경해보고 싶을 테니까.
“그나저나 영재 넌, 자동문 보고도 놀라지 않는구나? 나랑 규원이는 진짜 깜짝 놀랐거든.”
“저는 저번에 와본 적이 있어서요.”
그러자 지아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언제 와봤대?”
“스터디부 홍보물 만들 때 왔었죠. 같이 만들어 보겠다고.”
“그거 둘이서 만든 거였구나.”
“고생 좀 했죠.”
얘기하면서 돌이켜 보니 그게 벌써 3달  일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니.
윤희가 우리들을 향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여기 계속 있을 거 아니잖아. 안으로 들어가자.”
“아참! 쿠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지.”
규원이는 두 손을 가슴께에 그러모은  기대에 부푼 눈을 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갔다. 산에서 경보하는 아주머니처럼 팔을 움직이면서.
지아 누나는 규원이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규원이  귀엽다니까.”
누나의 혼잣말.
나는 누나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등 뒤에서 들려온 윤희의 목소리.
예전 같았으면 아예 공감을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래.”
그때 규원이가 홱 돌아서서 얼른 오라고 손짓을 했다.
“빨리 와! 허리 업!”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네.”
윤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을 신호로 우리 셋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갑자기 왜들 웃어?”
“그런  있어.”
내가 답해주자 규원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뭔가 바보 취급당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그렇게 말하는 지아 누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규원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식당에 도달했다.
6인용은 족히 되는 넉넉한 식탁. 그 위에는 펼쳐놓은 책과 산처럼 쌓인 쿠키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윤희가 직접 만들었대. 맛있더라구.”
규원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알아. 그때 먹어봤으니까.”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교재와 필통을 꺼냈다.
지아 누나는 집어 든 쿠키를 이리저리 살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원하신다면 가르쳐 드릴게요.”
“진짜? 나야 고맙지.”
누나의 얼굴에 화색이 번지자 윤희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보기 좋은 한 폭의 그림.
불현듯 나는 주현 선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깨달았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거의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누나. 혹시 주현 선배에게 언제 오는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맞다! 주현이가 아직 안 왔지.”
누나가 부랴부랴 스마트폰을 꺼내서 깨톡을 보냈다.
“아. 깨톡 왔다!”
“뭐래요? 늦는대요?”
질문하자 지아 누나가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학원이 11시 반에 끝난다고 해.”
“으아아……. 주말 아침부터 학원이라니. 끔찍하다.”
규원이가 오만상을 쓰며 도리질을 쳤다.
“일단 우리끼리 공부하고 있자.”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누나. 오늘 수학 공부 봐 드릴게요.”
“우와! 드디어 영재한테 배우는 거야?”
“요 며칠 2학년 수학 공부만 팠거든요.”
자랑스럽게 답하며 지아 누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살다 살다 선행학습까지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하지만 멤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리.
나는 지아 누나의 문제집을 확인한 뒤 볼펜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주현 선배는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나서야 윤희네 집에 왔다.
“안, 녕?”
주현 선배는 우리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런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교재를 주섬주섬 꺼냈다.
우리 넷은 그런 주현 선배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눈앞의 문제집에 집중했다.
마치 식탁 두 개를 나누어 쓰는 기분이었다.

* * * *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쉼 없이 교재와 씨름하던 주현 선배가 조심스레 책을 덮었다. 그리고 필통을 챙기고 가방에 하나둘 집어넣었다.
“벌써 가려고요?”
윤희가 의아함을 표시했다.
“응. 또, 학원 가야 해…….”
대답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는 주현 선배.
이윽고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멨다.
“먼저, 갈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선배. 내일도  건가요?”
내가 묻자 주현 선배가 굼뜬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집에서, 공부하라, 셔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는 현관까지 가서 주현 선배를 배웅했다. 그런 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했다.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나서 우리는 다 함께 푸짐한 저녁상을 차려서 먹었다.
“후아아. 잘 먹었다아.”
규원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윤희야. 욕실 좀 써도 될까? 샤워  하면  찝찝해서.”
“네. 저쪽에 가면 욕실 있어요. 안방에도 하나 있고요.”
“고마워.”
지아 누나가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그러더니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영재야. 나 샤워하러 갈게.”
“네.”
“나 샤워하러 간다니까?”
그러면서 야릇한 미소를 그렸다.
“저어기에 있는 욕실에 갈 거야.”
아까 윤희가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알겠어요.”
“어라. 좀 컸다?”
나의 덤덤한 반응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사실은 엄청 두근거리는 시추에이션이지만, 여기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법.
“저는 누나 씻고 나오면 씻을게요.”
나는 일부러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 귀여운 반응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쉰 뒤 누나가 욕실로 향했다.
“규원아. 너도 씻고 와.”
윤희의 말에 규원이가 벌떡 일어났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규원이가 총알 같이 움직이더니 안방 욕실로 향했다.
“윤희  언제 씻을 거야?”
나는 눈만 살짝 들어서 윤희를 보았다. 윤희는 샤프를 쥔 손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왜?”
“그냥…….”
“설마?”
“아, 아냐. 내가 그럴 놈으로 보여?”
해명했지만, 윤희가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변태.”
그러면서 윤희가 자리를 슬쩍 피했다. 나는 졸지에 인간쓰레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냐, 아니라고!”
“흥.”
새침한 콧방귀와 함께 고개를 홱 돌리는 윤희.
더 이상의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완고한 태도였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 가지고……. 역시 이놈의 주둥아리가 문제라니까.
결국 이후로는 강제 묵언 수행이 이어졌다. 때때로 윤희의 기색을 살펴보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기회를 봐서 찬찬히 얘기해 보는 수밖에…….
그때 등 뒤에서 지아 누나의 발랄한 음성이 들려왔다.
“영재야아.”
지아 누나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베스타올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로.
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볼과 귀에 붙어 있었다.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린  지아 누나를 바라보았다.
“서, 선배!”
윤희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아 누나는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도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영재야. 솔직히 말해 봐.”
“네?”
“보고 싶지?”
요염한 눈짓.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서큐버스가 실존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지만 이성의 끈을 놓쳐서는  된다.
“아……. 아뇨…….”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그으래? 아쉽다. 진짜로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선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옷 입고 오세요.”
윤희가 지아 누나에게 다가가 등을 떠밀었다.
“뭐야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한발 늦게 안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규원이.
참고로 규원이는 옷도 다 갈아입은 데다 머리도  말린 상태였다.
“음? 언니는 왜 저러고 있대?”
“나도 몰라…….”
지아 누나와 윤희는 여전히 아웅다웅하는 중이었다.
“언니이!”
윤희가 목청을 높였다.
“어디든, 들어가서, 갈아, 입어요!”
힘겨루기를 하다 보니 윤희의 말이 마디마다 끊겼다.
“아앗, 잠깐만!”
지아 누나는 이상하리만치 버티고 섰다.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의문을 품을 즈음, 지아 누나가 잡고 있던 베스타올을 놓치고 말았다.
“앗!”
“아.”
두 사람이 내는, 높낮이가 다른 외마디 소리.
이윽고 베스타올이 바닥에 완전히 흘러내렸다.
“오오.”
규원이의 감탄사.
지아 누나가 베스타올로 가리고 있던 것은 바로 흰색 얇은 셔츠와 까만 돌핀 팬츠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몸이 아니었다.
지아 누나가 머쓱한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냥, 장난 좀 쳐보려고 한 건데.”
윤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니. 다음엔 이런 장난치지 마세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누나.
“진짜 벗은 건 아니었네.”
규원이는 내 옆에 서서 실실 웃었다.
나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지아 누나가 사실은 옷을 입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윤희의 호칭이 선배에서 언니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는 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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