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69화-커다란 한 걸음
주말을 지나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탓에 학교로 향하는 내내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일사병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교실에 도착했다. 정수리에 닿는 시원한 선풍기 바람 덕분에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러고 있자 근처에 있던 애가 내게 정겹게 인사를 건넸다.
“그나저나 학교 오면서 샤워했어? 땀에 푹 절었네.”
“운동 삼아 걸었더니 너무 더워.”
손부채질을 하며 답하자 그 애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리로 돌아갔더니 윤희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다른 한 손에는 늘 그럲듯이 시집을 쥐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윤희가 곧장 말을 걸었다.
“땀 너무 흘렸는데. 그러다 탈수증 올지도 몰라.”
“아냐. 내 몸이 보기보다 튼튼하다고.”
물을 들이켜니 확실히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물 먹는 하마가 따로 없네.”
“뭐 어때. 여름인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내뱉고 나서 물통을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제 슬슬 예습을 해야겠구만.
윤희는 짧게 입바람을 불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름 필수 아이템이라 불리는 휴대용 선풍기였다.
“이거라도 써.”
“오. 고마워.”
나는 그것을 덥석 받아서 스위치를 올렸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면서 땀을 식혔다.
“천국이다아.”
“하나쯤 있으니까 좋더라. 다이쒀에 가면 얼마 안 하기도 하고.”
“얼만데?”
“음, 5천원이었던가.”
“괜찮네.”
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장만하는 건 좀 더 생각해 보는 걸로 해야겠어.
그때 연수와 명지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영재야. 토요일에 했던 수업, 이번 주에도 하는 거지?”
연수가 고개를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응.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에도 할 거고.”
“그럼 어젠 왜 학교 안 왔어? 우리는 와서 공부했었는데.”
“아아, 다른 약속이 있었거든.”
그러자 둘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공부를 안 하고 놀았다고? 우리 학교 수석인 네가?”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담담한 투로 중학교 친구와 스터디부 멤버와 함께 모여서 공부를 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둘은 그럼 그렇지, 하며 머리를 까딱거렸다.
“너네, 수석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큰 거 아냐? 나도 나름 놀 줄 안다고.”
“전혀 안 그렇게 보여.”
그러면서 둘은 까르르 웃었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거야?”
“별 건 아니고. 그냥 학생 교사 계속하는지 궁금해서 그랬지. 한다고 하니 다행이야. 그때 수업 들었을 때 이해가 잘 됐거든.”
“그랬구나.”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안심이 되는 한편, 기분이 좋아졌다.
“우린 앞으로 주말마다 학교 나올 거니까 앞으로는 빠지지 말라구, 선생님?”
“그럴게.”
나는 연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명지는 윤희를 향해 미소지었다.
“윤희야. 너도 앞으로 잘 부탁해.”
윤희는 놀란 듯 눈썹을 움찔했으나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응. 노력할게.”
HR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갔다.
“영재야. 나, 학생 교사하길 잘한 것 같아.”
“거봐. 해보길 잘했지?”
“응.”
윤희가 싱긋 웃었다.
기말까지는 앞으로 3주 남짓.
모두가 이대로 열심히 해준다면, 분명히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 * * *
방과 후, 우리는 스터디부로 향했다. 오늘은 웬일로 2학년 선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열어 줘어. 다리 아파.”
문에 기댄 채 서 있던 지아 누나가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터치했다. 주현 선배는 반대쪽 위치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네, 잠시만요.”
열쇠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아 누나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곧장 나에게 다가왔다.
“영재야. 오늘은 내 공부 좀 봐줄래?”
“누나 부탁이면 당연히 해드려야죠.”
“고마워.”
지아 누나가 규원이를 향해 슬쩍 눈길을 돌렸다.
“그런고로 규원아. 오늘은 자리 좀 옮기자.”
“알아썽.”
비음 섞인 대답과 함께 벌떡 일어서는 규원이.
“아, 규원아.오늘 해야 될 분량 정해줄 테니까 문제집 줘 봐.”
규원이가 내게 문제집을 척 내밀었다. 나는 적당한 분량을 지정해준 뒤 규원이에게 돌려주었다.
“항상 옆에서 보기만 하다가 직접 해보려니 기대되네.”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짓는 걸 보니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최선을 다할게요.”
“잘 부탁합니다, 부장님.”
누나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어떤 과목을 배우고 싶으세요?”
“수학.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해도 잘 이해가 안 돼서.”
“일단 문제가 어떤지 확인부터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지아 누나에게서 문제집을 받아 들었다. 2학년 수학은 무얼 배우는지 호기심을 품은 채 문제를 확인해 보니 ‘확률과 통계’였다.
하필이면 1학년 때는 배우지 않는 거라니…….
“어…….”
입술 사이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그래?”
“아. 그게, 1학년 때 안 배우는 거라서요…….”
“그럼 이건 어쩔 수 없으려나.”
“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아쉬움을 삼키며 발언을 하던 중 누군가를 떠올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아 누나에게 수학을 가르쳐 줄 능력이 되는 사람.바로 주현 선배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현 선배를 바라보았다. 선배의 눈길은 문제집에서 단 1mm도 벗어나지 않았다.
“주현 선배!”
소리 내어 부르자 선배가 손을 멈추었다.
“혹시 여유가 있으면, 지아 누나 수학 공부 좀 가르쳐줄 수 있나요?”
“…….”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주현 선배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
“제가 2학년 수학은 아직 잘 몰라서……. 그리고 주현 선배는 공부 잘하니까요.”
“…….”
돌아오지 않는 응답.
지아 누나도 팔을 걷고 나섰다.
“주현아. 우리 같은 반이기도 하잖아. 응?”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미안.”
“아, 네…….”
실망감이 밴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가능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는데.
그러자 주현 선배가 이유를 덧붙였다.
“오늘, 정해진 분량을, 다 해야 해서…….”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군요.”
듣고만 있던 윤희도 한 마디 곁들였다.
“매일 스스로 정해놓고 하는 건가요?”
내가 반문하자 주현 선배가 시선을 약간 내리깔았다.
“부모님이…….”
“우와! 우리 엄마 아빠는 공부하라고만 하지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안 쓰는데. 언니네 집은 다르네요.”
신기하게 여기는 규원이.
“응…….”
주현 선배가 살며시 고갯짓을 한 뒤 다시 샤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들 중 누구도 더 이상 주현 선배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부모님이 정해준다, 인가.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지아 선배. 수학 문제집 어떤 거 쓰시나요?”
“윤희 네가 웬일로 관심을 다 보이네. 드디어 내가 좋아진 걸까?”
쟤가 진짜로 웬일이지?
나는 윤희를 쳐다보았다.
“스터디드림이잖아요.”
지아 누나의 농담을 가볍게 받아넘기는 윤희.
“게다가 저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난 마음만으로도 고마운 걸?”
“마음만큼이나 보이는 것도 중요하죠.”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듣는 재미가 있었다.
누나는 문제집을 덮고 겉표지에 적힌 제목을 윤희에게 알려주었다.
“고마워요, 선배.”
“그나저나 윤희야.”
지아 누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며칠 전에 말했지 않아? 선배 말고 언니.”
“아!”
윤희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아 누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윤희를 응시했다.
“으음…….”
슬쩍 눈을 피하는 윤희.
“아직은, 어색한 느낌이, 있어서요…….”
“그렇구나. 알았어.”
지아 누나는 생각보다 쉽게 물러났다.
“그나저나 어떤 도움을 주려는 걸까? 갑자기 엄청 기대된다.”
“생각한 게 있어요.”
윤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오호라, 대체 뭘까?
나도 덩달아 궁금해졌다. 뭐, 그건 나중에 알게 되겠지.
지아 누나는 수학 문제집을 집어넣고 영어 문제집을 꺼냈다.
“영재야. 그럼 오늘은 영어를 좀 부탁할게.”
“맡겨만 주세요.”
호언장담하자 지아 누나가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
나와 윤희, 그리고 규원이는 점심을 먹고 나서 교실로 돌아왔다.
“나른하다아. 좀만 자야지이.”
규원이가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엎드렸다.
“그래. 오후 수업 생각해서라도 좀 자 둬.”
“우와아. 영재 입에서 자도 된다는 말이 나오다니…….”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규원이가 거의 웅얼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러게. 다른 누구도 아닌 영재가.”
윤희마저 공감을 표했다.
“아니, 수업 시간에 자는 걸로만 뭐라고 했을 뿐인데. 참나.”
어이없어하며 어깨를 으쓱였더니 둘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난 이만…….”
규원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와 윤희는 자리로 돌아왔다. 노트를 펼치고 복습을 하려는데, 윤희가 내게 문제집 한 권을 내밀었다.
“웬 문제집?”
“확인해 봐.”
윤희가 말하는 대로 문제집을 받아들고 겉표지를 확인해 보았다.
어제 지아 누나가 공부하려고 했던 수학 문제집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건 왜?”
“똑같은 문제집으로 공부하면 너도 지아 선배를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기야 하겠다만…….”
문제집을 술술 훑어보았다.
아직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은 탓에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에 용돈 별로 못 받는다고 얘기했잖아. 그래서 문제집은 내가 준비했어.”
“아하.”
윤희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너에게 떠맡기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주현 선배가 안 되면 너밖에 없으니까.”
나는 문제집을 응시하며 손으로 턱을 받쳤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2학년 수학 공부도 병행한다?
더구나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지아 누나를 가르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집에서 설명하는 개념만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풀어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
가능할까?
고심하고 있자 윤희가 말문을 열었다.
“혼자서 하기 부담스러우면, 나도 같이 공부할게.”
“아냐.”
나는 손을 내저었다.
“한 번 해볼게. 어렵겠지만…….”
나는 스터디드림의 부장이다. 그러므로 책임을 지려는 것이다.
지아 누나 또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스터디드림에 들어왔을 테니까.
주현 선배가 도와줄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주현 선배에게 섭섭한 마음도 없잖아 들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내가 하는 수밖에 없지.
“오랜만에 부장다운 발언이었어.”
윤희가 안도한 듯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정 안 되겠으면 너한테도 부탁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문제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혹시나 해서 하나 더 샀어. 걱정 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윤희를 응시했다.
“돈 아깝지 않아?”
“글쎄? 필요한 곳에 쓴 거라서 딱히.”
윤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래서 돈 많은 애들이란…….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어.”
“뭔데?”
되물어보자 윤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말을 꺼냈다.
“요 며칠 계속 생각한 계획이 하나 있어.”
“공부랑 관련된 거야?”
윤희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좀 더 들이밀었고, 윤희는 내게 귓말을 해주었다.
“진짜로?”
윤희의 계획을 들은 직후 곧장 튀어 나간 물음.
“응.”
윤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히 결심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늘 스터디부에서 얘기할 거야.”
“난 일단 찬성. 아마 모두들 찬성할 것 같아.”
“그러면 나야 좋지.”
윤희가 활짝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주 주말 교사는 못할 것 같다고 애들에게 알려줘야겠다.
* * * *
스터디부에 들어왔더니 오늘은 규원이가 가르침을 청해왔다.
과목은 가장 약한 수학.
고등학생이 되면 가장 먼저 포기하는 교과목이 수학일 정도니까 이해는 한다.
그래도 풀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웬만큼 풀 수 있는 게 수학인데.
그 점이 안타깝다고 하자 규원이가 도리질을 했다.
“그건 너라서 가능한 거라구.”
“야, 너도 할 수 있어. 나도 타고 나서 하는 건 아니란 말야.”
“왠지 믿음이 안 가.”
규원이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문제집 봐, 문제집.”
그런 식으로 해나가다 보니 어느덧 부 활동을 끝낼 때가 되었다.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앞으로 나왔다.
“잠깐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응? 뭔데 그래?”
지아 누나가 관심을 보였다.
윤희가 우리들의 면면을 하나씩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주 주말에 저희 집에서 스터디부 합숙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