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65화-우리가 만들어가는 방향(1) (65/131)



〈 65화 〉65화-우리가 만들어가는 방향(1)

방과 후가 되자 나와 윤희는 책가방을 챙겼다. 잠시 후 우리보다 동작이 빠른 규원이가 책가방을 어깨에 대충 걸친 모습으로 다가왔다.
“너네 둘은 항상 보면 늦더라.  내가 행차해야만 하는 거야?”
규원이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너보다 챙길  더 많거든. 그렇지?”
옆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자,
“그럼.”
윤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아냐. 나도 챙길 거 많다구!”
목소릴 높이면서 규원이가 눈에 힘을 주었다.
“예를 들면?”
윤희가 되묻자 규원이는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어……. 손거울이랑, 충전기랑, 초코바랑 그리고, 공부할 것들.”
손가락 네 개를 펼치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초코바는 왜?”
내가 의문을 입에 담자 규원이가 배시시 웃었다.
“요새 머리 쓰는 일이 많잖아. 그러니까 필수품이라구!”
꽤나 납득이 가는 이유로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제로 최근 들어 규원이가 수업 시간에 곯아떨어지는 빈도가 대폭 줄었다. 뭐, 매우 지루한 몇몇 수업은 여전히  버티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부실 열쇠를 윤희에게 건넸다.
“나 오늘은 선생님하고 면담이 있어서 그러는데, 먼저  있을래?”
윤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슬쩍 내비쳤고, 규원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쌤이 그런 말 안 하지 않았어?”
결국 규원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좀 얘기할 게 있어서 그런 거지, 뭐. 여튼 끝나면 바로 갈게.”
“알겠어.”
“돌아올  초코바!”
나는 규원이의 외침을 무시한 채 나는 교실을 나섰다.

* * * *

노크를 하고 나서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모두가 퇴근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어, 영재. 뭔 일 있어?”
담임선생님이 재킷을 걸치다 말고 눈길을 던졌다.
사실 담임선생님과 개인 면담을 하겠다는 것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기말고사에 대해서 상담할 게 있어서요.”
“네가 성적으로 걱정할 놈은 아니잖냐.”
나는 피식 웃는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혹시, 지금 이사장님 계세요?”
“응?”
선생님이 반문하면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너 안 부르셨는데?”
“제가 찾아갈 이유가 있어서요.”
“아! 그랬구만.”
그제야 내가 찾아온 이유를 깨달은 선생님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이사장실에 계실 테니까 올라가 봐.”
“아, 네.”
나는 3층에 위치한 이사장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계신가?
한 번 더 노크를 하려던 찰나,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사장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맨날 업무를 처리하던 모습만 봐서 그런지 신선하게 느껴지는 광경.
거기서 슬쩍 시선을 틀자 조그마한 탁상 하나가 보였다. 믹스커피는 거의 안 남아 있는데, 녹차 티백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저럴 거면 녹차를 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저기, 이사장님…….”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자 이사장님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더니 다소 뜬금없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름이 왔구나.”
“아, 네. 그렇죠.”
반 박자 늦게 반응한 나.
“곧 장마가 오겠구나. 미리 화단을 정비해둬야겠어.”
“그렇군요…….”
혼잣말인가?
“일단 앉지. 커피로 하겠니?”
“네.”
응답하고 나서 이사장님이 권한 대로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이사장님이 양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나는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이사장님은 맞은편에 앉아서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웬일로 네 쪽에서 찾아왔구나. 무슨 용건이냐?”
“이번 달 말에 있을 기말고사 때문에 왔어요.”
나는 탁자 위에 종이컵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기말고사라는 단어에 이사장님의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띠었다.
그간 스터디부를 해오면서 느낀 것이 있다.
혼자서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윤희가 스터디드림의 부원이 된 것도, 규원이와 다시 화해한 것도, 지아 누나와 주현 선배가 입부한 것 역시도.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일들 모두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당면한 과제는 제일고등학교의 전체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
이번에도 성과가 없으면 한성고 편입의 꿈은 더더욱 멀어진다.
그러니 지금은 어떠한 수단이든 동원해야만 한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하니까.
“그렇구먼…….”
이사장님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묵직한 침음을 흘렸다.
“무언가 묘수가 없을까요? 저와 스터디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니까요.”
나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이사장님의 힘이 없으면 정말로 어렵다고, 그런 마음을 담아서.
한동안 침묵 끝에 이사장님이 입술을 움직였다.
“나에게 생각은 있다. 하지만 오직 나만의 생각으로 일을 추진하고 싶지는 않구나. 나는 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단다. 여기에 오는 동안 대책 한두 가지쯤은 생각해 왔을 테니.”
반대로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되어버릴 줄이야. 적당히 떠넘기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 들고…….
이사장님의 입술이 옅은 미소를 그렸다.
“우린 지금 한 배를 탄 운명이잖나.”
이사장님의 말마따나 나름대로 생각해 본 안은 있다. 이게 좋을지 어떨지에 대한 판단이 전혀 안 서는 게 문제지.
판은 이사장님이 깔아주었다. 그 위에 서는 것은 나의 몫.
며칠 내내 생각한 내용들을 머릿속에서  번 더 정리하고 나서, 날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로는 시험 기간에 한해서만 야간자율학습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건 아닌  같구나.”
이사장님이 곧장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전에도 얘기했듯이, 그런 방법은 쓰고 싶지 않구나. 나의 교육 철학과는 대척되니까.”
역시나 기각.
확실히 자신만의 철학에 대해서만큼은 완고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로는 시험 난이도를 조정하는 방법이에요. 공부를 한 애들은 그만큼 점수를 올리기가 쉽고, 평균치 역시도 높아지겠죠. 전체적인 학업성취도도 덩달아 오를 테고요.”
마침표를 찍자 이사장님이 깍지 낀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쳤다. 근엄한 표정.
그러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고려는 하고 있다. 하지만 실행하기에는 문제점이 따르지.”
“애들이 시험을 제대로 안 치르면 소용없다는 얘기인가요?”
“물론.”
이사장님이 고개를 움직인 뒤 깍지를 풀었다.
대답하기는 했지만 내 머리로는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중요한 시험을 그렇게 날로 치르려는 녀석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 이번만이 아니라 다음에도 계속 그렇게 할  있느냐의 문제란 게야.”
“…….”
“몇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을 테지.  말대로 평균치도 높아질 테고. 그런데 그게 우리 학생들에게 진짜로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단다.”
일언반구도 못한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구나.
입술을 꾹 닫은 채 이사장님을 바라보았다.
남은 안건은 이제  가지뿐. 이것마저도 퇴짜를 맞으면 끝이다.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했다.
“방과 후에 하위권 학생들을 위한 스터디를 개설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이번에는 이사장님도 꽤 심도 있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킨 이사장님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비슷하구나.”
일단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속으로 안도하는 동안, 이사장님이 보충 설명을 이어나갔다.
“최근에 교직원들과 회의를 한 적이 있다. 학교 차원에서 도움을 줘야 한다는 점에는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였지만……. 언제 어느 때에 할 것인지를 놓고 현재 의견이 분분한 상태란다. 지도할 선생님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것도 논해야 하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게지.”
“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탄식.
“학생들 입장에서 차별로 여길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말야.”
나는 수긍하는 고갯짓을 했다.
“더 생각나는  없는가?”
이사장님이 물음표를 던진 뒤 커피를 호로록 삼켰다.
“아뇨…….”
나는 탁자에 놔둔 종이컵으로 시선을 내렸다.
남은 안건은 단 하나.
분명 내가 제안하는 모든 방안들이 퇴짜를 맞는다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사장님이 생각한 방법대로 진행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이번 건은 통과했으면 좋겠는데 말야.
내가 제안한 안건이 제일고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
나는 고개를 들고 이사장님과 시선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건, 주말 학생 교사입니다.”
미동도 않는 이사장님.
나는 아랑곳않고 말꼬리를 이어나갔다.
“주말에 학교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위해 교실을 열고, 희망하는 학생들에 한해 그날 일일 교사로서 활동하게 만드는 거죠. 또래 학생이 가르치는 거니까 눈높이에서 설명하기도 더욱 쉬울 테고, 그만큼 수업을 재미있게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들 수업은 재미없고?”
“아,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
생각지 못한 반론에 나는 당황하여 손을 휘휘 저었다.
“학생 교사는 어떻게 뽑을 생각이지? 만약 희망자가 없다면?”
쉴 틈을 주지 않고 들어오는 반격.
“그, 그건…….”
거기까지 고려해보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아, 이것도 결국 기각인가. 아쉬움이  밑까지 차오르는 순간, 이사장님이 뜻밖의 발언을 꺼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해결책이 있는 법이다.”
나는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이사장님은 그런 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야. 그간 스터디부 활동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왔구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든다. 이걸로 한 번 해보자꾸나.”
“진짜요?”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되물었다.
“내가 내세우는 교육 철학에 가장 가까우니까.”
이사장님이 쥐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보완할 사항들은 내가 생각해 보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기뻤던 탓에 나도 모르게 목청이 올라갔다.
“우리 윤희는 잘 지내고 있고?”
“그럼요. 전보다 많이 밝아졌어요.”
나는 명랑한 톤으로 말했다.
“다행이구나.”
“아마도, 스터디드림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변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이사장님이 목적으로 두었을 이유.
“고맙다.”
그러더니 이사장님이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앞으로 남은 기간 잘 부탁하마.”
 말에 담긴 무게가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기분 탓만이 아닐 것이다.
“네.”
힘주어 대답한 뒤 그 손을 잡았다.
어쩌면,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 * *

그로부터 이틀 후, 반 게시판마다 공지사항이 적힌 게시물이 붙었다.
제목은 [시험기간 한정 주말 학생 교사 모집].
신청 가능 인원은 총 5명.
교사 활동을  학생들에게는 문화상품권 3만원을 준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시험 기간에 한해서 주말에 교실을 개방하겠다는 내용의 공지도 나란히 붙었다.
스터디부에서 각자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영재야. 그 학생 교사라는 거, 나도 한 번 해볼까?”
윤희가 말을 걸었다. 내가 곧장 이름을 기입한 걸 보고 마음이 동한 걸까.
“한 번 해봐. 너라면 잘할 거라고 생각해. 이미 경험도 쌓고 있으니까. 덤으로 문상도 받을 수 있고.”
“막상 하려고 생각하니 좀 긴장되어서.”
하긴, 한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여러모로.”
“한 번, 생각해 볼게.”
신중한 답변을 내놓는 윤희.
윤희라면 분명히 내 말에 담긴 의미를 눈치챘을 것이다.
“나도 3만원 탐나는데.”
“안타깝지만 넌…….”
나는 규원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알고 있어. 알고 있다구.”
응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침울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남을 가르칠 역량은 못 되니까 딴 애들에게 맡겨야지, 뭐.”
지아 누나가 어깨를 가볍게 한 번 들먹였다.
1학년만 하는 줄 알았더니 학년 전체에 소식이 들어갔구나.
기왕 실행하는 김에 아예 처음부터 크게 해보려는 모양이다.
대단한 모험심이라고 해야 할지.
입안자로서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긴장되기도 했다.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무 소용없어. 공부는…… 혼자, 하는 거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 주현 선배가 있었다.
“아…….”
주현 선배가 손으로 입술을 눌렀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미, 미안.”

간신히 한 마디 내뱉은 뒤 주현 선배는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