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4화-초여름과 동상이몽(3)
“그런고로 오늘은 영재 한 번 빌려 갈게.”
지아 누나가 나머지 부원들을 둘러보며 양해를 구했다.
주현 선배는 별 반응이 없는 것에 비해, 윤희는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규원이는,
“뭔데, 뭔데?”
자못 흥미로운 눈빛을 한 채 지아 누나에게 다가왔다. 지아 누나는 그런 규원이를 향해 검지를 까딱거렸다.
“안 돼. 이건 영재랑 둘이서만 할 얘기라구.”
“아아, 궁금하단 말야아.”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쓰기 시작하는 규원이.
지아 누나는 규원이를 상대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진짜지? 언니 약속한 거다.”
“물론.”
“그럼 손가락 걸자!”
규원이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지아 누나에게 내밀었다.
말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는 모양이구만.
“그래. 약속!”
두 사람은 손가락을 걸었다. 뭐, 지아 누나가 진짜로 얘기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주현 선배는 먼저 학원에 가보겠다고,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말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지아 누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윤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되지?”
허가를 구하는 듯한 말투에 윤희가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자, 영재야. 그렇게 됐으니까.”
누나는 함박 미소를 머금은 채 내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너희들은 조심히 들어가!”
누나가 윤희와 규원이에게 손을 흔들자 옆에 있던 나도 따라서 흔들었다. 그런 뒤 지아 누나는 평소 가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자, 이제 우리도 가자.”
“네.”
나는 누나의 보폭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걸어간 끝에 우리는 조그마한 카페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아는 곳이에요?”
“아니. 그냥 눈에 띄어서.”
우리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를 둘러보니 꽤 아늑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영재야. 어떤 거 할래?”
지아 누나의 질문에 나는 벽에 걸려 있는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프렌차이즈가 아니라서 저렴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오산이었군.
“아메리카노가 3,500원…….”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내가 내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옆에서 들려오는 미성.
누나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이럴 때에 부담 없이 말할 수 있는 상대는 형준이뿐이다. 그 녀석은 뭘 주문하든 괜찮다고 하니까.
괜히 싼 걸 얘기했다가는 등짝을 때리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고.
카페라떼나 바닐라라떼를 보니 역시나 아메리카노보다 비쌌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진짜?”
누나는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커피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안 보였는데.”
아뇨. 사실은 가장 싸서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네. 뭐…….”
“나는 아이스 카페모카로 해야겠다. 여기 주문할게요!”
저번에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카페모카를 마셨지 않나?
직원에게 주문하는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사실 나도 달달한 맛 좋아하는데.
하지만 이미 정해버린 주문을 변경할 수도 없고.
카운터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음료가 나왔고, 나는 쟁반 담당을 도맡았다.
“여기가 좋겠다.”
우리는 창가 쪽 테이블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머그잔에 빨대를 꽂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더니 쓴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몇 번 마셔봐서 좀 익숙해졌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군.
“역시 쓰지?”
“아, 네. 좀…….”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던 모양이다.
“저기 셀프바에 시럽통 있네.”
나는 머그잔을 들고 셀프바로 갔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자 그나마 먹을 만해졌다.
그런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주현 선배 얘기를 하려는 거예요?”
지아 누나가 물고 있던 빨대를 살며시 놓았다.
“저번에 통화했을 때 한 얘기 기억하지?”
“네? 어, 잠시만요.”
나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 검지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저번이라면 분명히 2학년 선배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을 얘기하는 것일 텐데.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누나에게 놀림 당한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거죠? 누나랑 얘기할 때 다른 여자는 언급하지 말라던 거.”
“가까이 와 봐.”
누나가 검지손을 까딱거리자 나는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렇게요?”
“응. 그러고 있어.”
딱!
이마 한가운데에서 울리는 맑고 경쾌한 소리.
누나가 딱밤을 먹인 것이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이마를 감쌌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누나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나 지금 진지한데 장난칠래?”
“아, 아뇨.”
여자가 때리는 건 별로 안 아플 줄 알았는데…….
“이래뵈도 내 손 꽤 매워.”
다음번엔 농담도 가려가면서 해야겠구만.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지아 누나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제주도 가서 주현이랑 최대한 붙어있어 보겠다고 했잖아.”
“아아! 그 얘기!”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 주현이 얘기도 하겠다고 했는데.”
“사실은 왜 갑자기 주현 선배 얘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어요.”
너무 눈치 없게 군 것 같아서 속으로 무안했다.
지아 누나가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무튼 주현이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위기감 때문이야.”
“위기감, 요?”
“사실 제주도에서 같이 다니기가 꽤 어려웠거든.”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잠자코 지아 누나의 말을 기다렸다.
“주현이가 반에서도 워낙에 말수가 없다 보니까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더라고. 애초에 교실에서도 화장실 갈 때 말곤 앉아서 공부만 하는 애니까.”
“쉬는 시간 내내 공부만 하는 거예요?”
“응. 맞아. 1학년 때부터 계속.”
하긴 그런 공부 습관이 고작 몇 달 만에 몸에 밸 리가 없지.
“제주도에서는 어땠는데요?”
그러자 지아 누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 쉬었다.
“좀, 많이 갑갑했지. 애들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모습은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살갑게 들러붙었는데, 반응이 영 신통찮았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보니 대충 어땠을지 상상이 갔다.
“아직은 별로 안 친하니까 친구끼리 하는 스킨십은 못 하겠어. 괜히 했다가 미운털 박힐 것도 같고. 왠지 주현이는 그런 거 안 좋아할 것 같거든.”
“제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요.”
“휴우. 그래서 그런 쪽으로는 최대한 조심하면서 말을 붙였거든. 주현아, 우리 저기에 가 보자, 같이 기념품 사러 가자, 이런 식으로.”
“죄다 제안하는 말들이네요.”
내 지적에 지아 누나가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사실 그게 아니면 할 만한 말이 없어서. 아무튼 제안하면 일단 따라오기는 해. 근데 정말 따라만 오지, 같이 뭘 하려고 하지는 않더라.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 자체를 많이 불편해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떤 느낌인지 대강은 알 것 같았다.
주현 선배가 우리들의 잡담에 끼어든 적이 있었던가?
다른 부원들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었던가?
대략 2주일 넘게 지켜본 결과,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혼자만 별세계에 속해 있는 느낌.
한때 윤희도 그랬다. 하지만 이 경우는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일부러 거리를 둔 케이스였지.
주현 선배도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뭔가 느낌이 달랐다. 무언가에 얽매여 있어서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인달까.
처음 며칠간은 정말로 대단한 집중력이라고 경탄해마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왜 그렇게 극성인 걸까 궁금해졌다.
“어떻게든 반응을 이끌어 내보고 싶어서 기념품 두 개를 골라서 뭐가 더 좋냐고, 직접 눈앞에 보여주며 물어보기도 했거든. 근데 어떻게 했는지 알아?”
“어떻게 했는데요?”
그러자 지아 누나가 양손을 들고 책을 보는 흉내를 냈다.
“주현이가 이렇게 영어단어장 들고 다녔거든. 내가 그렇게 하니까 둘 다, 이렇게만 대답하고 아예 몸을 홱 돌리더라. 목소리도 작아서 간신히 알아들었고.”
……들으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중학생 수학여행 때 나도 수시로 영어단어장을 펼쳐서 보던 놈이었다.
그래도 장소를 이동할 때나 그랬지, 놀 때는 애들하고 같이 어울려 놀았다.
“나한테 아예 흥미가 없는 것 같았어.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고, 지금도 같은 반에, 심지어 스터디부 멤버인데도. 너무 갑갑해서 결국 중간에 포기해 버렸어. 그렇게 하니까 계속 혼자서만 다니더라. 영어단어장 펼쳐 든 채로 말야.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긴 했는데, 다른 친구들하고 즐겁게 보내는 게 더 좋으니까…….”
지아 누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괜찮아요.”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친해지려고 노력해도 상대가 무반응으로 일관하면 누구나 지치기 마련이니까.
어쨌거나 지아 누나의 말마따나, 주현 선배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태였다.
하지만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하나도 없다.
“우선,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제가 놓치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 알게 됐으니까.”
“조만간 다른 애들에게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
“규원이한테도요?”
반문하자 누나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규원이도 같은 부원이니까.”
“물론 그렇긴 한데……. 또 눈치 없이 주현 선배한테 그런 얘길 막 할까 봐서요.”
“아무리 그래도 규원이가 그 정도 눈치는 있긴 한데…….”
지아 누나가 말꼬리를 삼키면서 검지로 입술을 살짝 눌렀다.
“혹시 모르니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겠어.”
“네. 무슨 일이든 만약을 대비해야죠.”
우리는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카페를 나섰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8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누나. 바래다 드릴게요.”
“나 여기서 15분밖에 안 걸려. 괜찮아.”
“오늘은 자전거 안 탔으니까요.”
말대꾸를 했더니 누나가 야릇한 미소를 그렸다.
“라면 먹고 갈래? 마침 부모님도 늦게 오시는데.”
“아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항변하자 지아 누나가 배를 움켜쥐고 깔깔 웃었다. 그렇게 웃어도 여전히 빼어난 미모였다.
누나는 한참을 웃고 나서 산뜻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늘은 기사님의 에스코트를 받아볼까. 잘 부탁해.”
“맡겨만 주세요!”
목청을 돋우면서 주먹으로 왼쪽 가슴팍을 쳤다.
“응. 아주 맘에 들어.”
우리는 나란히 서서 발걸음을 뗐다. 몇 분 정도 걸었을 쯤,
“잠깐만 저기 좀 갔다 올래?”
지아 누나가 검지로 웬 골목을 가리켰다.
“집이 여기에요?”
“아냐.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따라와.”
나는 지아 누나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불 켜진 슈퍼마켓과 과일점을 지나서 우리는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누나가 왼쪽 모퉁이로 돌아갔다.
4층 높이의 어느 허름한 상가 건물 앞에서 우뚝 멈춰 서는 누나.
“여기예요?”
옆에 서서 묻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누나가 하는 대로 고개를 들고 건물을 바라보았다.
발레, 태권도, 피아노, 합기도, 이발소 등등의 간판이 벽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상가 건물이었다.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의문을 품은 채 지아 누나의 옆얼굴을 살폈다.
턱을 살짝 세운 채 건물을 올려다보는 모습. 주변이 어둑하여 표정은 알아낼 수 없었다.
“이제 됐어. 가자.”
지아 누나가 몸을 홱 돌렸다.
“그걸로 끝이에요? 안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물음표를 던지자 누나가 우뚝 멈춰 섰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랬어.”
누나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갔다.
“저 곳에 추억이 많거든. 좋은 거랑, 안 좋은 거랑…….”
묘하게 애수에 젖은 듯한 어조 탓에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누나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까지면 충분해. 너도 늦겠다. 어서 들어가.”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더 이상 고집을 앞세울 수가 없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너도.”
나는 지아 누나와 헤어지고 나서 상가 건물에 눈길을 던졌다.
대체 무슨 추억이 깃들어 있는 걸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의문을 속에 품은 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
이제 본격적인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이 6월 말에 있을 기말고사를 공지했다.
이제는,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