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3화-초여름과 동상이몽(2)
나는 주현 선배와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걸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8시를 약간 넘긴 시간이었다.
“오빠 왔어?”
슬기는 대(大)자로 드러누운 채 손만 들어 올렸다.
흰색 반팔 면티에 학교 체육복 반바지 차림새였다. 훌러덩 드러난 배꼽은 바깥 구경을 하는 중이었고.
슬기가 손부채질을 하며 배를 벅벅 긁어댔다.
“네가 아저씨야?”
“더워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더니 슬기가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소릴 뽑아냈다.
“너 그렇게 배 내밀고 있으면 배탈 난다.”
“더워어어.”
슬기가 말대꾸를 하면서 옷자락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공기가 좀 갑갑하긴 하네.
나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유일하게 창문이 존재하는 부엌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 더우면 창문이라도 열지 그랬어?”
“이불 밖은 위험해애…….”
이불도 안 덮고 있는 애가 무슨.
“일어나. 저녁 먹어야지.”
저녁이라는 말에 슬기가 곧장 상체를 일으켰다.
“오빠! 오늘 반찬 뭐야?”
“잠시만.”
나는 상다리를 펼쳐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던 김치와 시금치 무침, 그리고 랩으로 싸놓은 계란말이 6조각을 꺼냈다.
그런 뒤 밥상을 들고 거실로 옮겼다.
슬기는 계란말이를 보더니 황홀경에 찬 눈빛을 했다.
“우와아, 계란말이! 오빠. 나 4개 먹으면 안 돼?”
“3개씩이야.”
단호하게 내뱉자 슬기가 두 손을 비비며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다음엔 내가 양보할게! 응?”
“너 이래놓고 나중에 기억 안 난다고 할 거잖아. 안 돼.”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슬기가 작전을 변경했다.
“숙제 혼자서 할게…….”
“그건 원래 혼자서 하는 거고.”
이미 4월 들어서부터 거의 안 도와주고 있었다.
계속 도와주면 슬기가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게 되니까.
“기말시험 100점…….”
“지구 종말이 더 빠를 것 같은데.”
슬기가 미간을 찌푸린 채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슬기를 관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일 고기반찬…….”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치잇.”
슬기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골을 냈다.
네가 그렇게 해도 이 오빠는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단다. 나도 계란말이 좋아하거든.
나는 젓가락으로 계란말이 한 조각을 집어왔다. 한 입 베어물자 살짝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역시 엄마표 계란말이가 최고야.
한참 저녁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데 슬기가 운을 뗐다.
“오빠. 근데 요새 스터디부는 어때? 아직도 사람 구하고 있어?”
최근에 스터디부와 관련된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더니 궁금한 모양이네.
나는 밥덩이를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아니. 이제 다 모집했어. 나 포함해서 총 5명.”
“근데 오빠. 진짜로 공부만 하는 거야? 다른 건 전혀 안 해? 보드게임이나 나가서 놀거나.”
슬기에게 우리 스터디드림은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는 부처럼 비치는 모양이다.
“스터디부는 오로지 공부만 하는 곳이야. 다른 활동은 시간 낭비라고.”
애초에 스터디부는 이사장님의 목적을 위해 세워졌으니까.
슬기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서로 안 친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서로 얘기도 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공부하고 있어. 나는 요새 공부 잘 못하는 애를 가르쳐주고 있고.”
“그러면 공부가 좀 재밌어?”
“아무래도 같이 하니까 좀 낫지.”
나는 혼자서도 잘만 하지만, 보통이라면 친구들과 같이 하는 편이 더 즐거울 테다.
“그렇구나……. 나도 친구들하고 같이 공부할까?”
슬기가 말을 끝맺은 뒤 계란말이 하나를 입에 욱여넣었다.
“어디서 하게? 공부할 친구들은 있고?”
“어……. 다들 학원 갈 때 아니면 놀기 바쁘던데. 아, 나도 학원 가고 싶다.”
나는 피식 웃었다.
친구가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학원을 가고 싶어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철부지였으니까.
“엄마한테 한 번 말해볼까?”
“아서라. 밥이나 먹어.”
나는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런데 슬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갑자기 왜 일어나?”
고개를 쳐들고 슬기를 올려다보았다.
“아 서라며. 아, 서라.”
맙소사.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차분하게 의미를 설명했다.
“아서라, 라는 말은 일어서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이야.”
“근데 왜 아서라야? 하지 말라는 뜻이랑 무슨 상관인데?”
슬기가 되물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이거 참. 해가 왜 하늘에 떠 있냐고 묻는 거랑 똑같은 질문을 하다니.
“그냥 그런 말이 있다고 알면 돼. 알겠지?”
그러자 슬기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이제야 다시 밥을 먹을 수 있겠군.
“오빠. 진짜로 계란말이 하나만 주면 안 돼?”
“절대 안 돼.”
나는 얼른 계란말이를 집어삼켰다.
* * * *
다음날. 오전 수업을 알차게 보내고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규원이가 총총걸음으로 내 자리에 다가왔다.
“영재야! 밥 먹으러 가자!”
“지금 사람 많잖아.”
내가 반대 의견을 제시하자,
“줄 금방 빠져!”
규원이가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응답했다.
“윤희야. 너도 가자.”
규원이의 호출에 윤희는 책상 서랍에서 시집을 꺼내다 말고 눈을 들었다.
“벌써?”
“벌써라니. 이미 종 친 지 5분이나 지났어.”
규원이가 스마트폰 시계를 보여주었는데 정확히 12시 5분이었다.
“어떡할래?”
“음. 오늘은 빨리 먹을까.”
내 질문에 윤희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하더니 시집을 서랍에 다시 집어넣었다. 산뜻한 동작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오오. 우리 윤희가 웬일이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사람이 항상 같은 모습일 수만은 없잖아.”
규원이를 향해 시원스레 내뱉은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규원이는 신기하다며 연신 감탄을 했다.
“호들갑 떨긴.”
살랑살랑 고개를 흔드는 윤희.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규원이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나 역시도 최근 들어 윤희를 볼 때마다 놀라고 있으니까.
수학여행 날 대관람차에서 했던 선언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거였구나.
나란히 앞장서서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흐뭇해졌다.
급식실에서 점심을 먹은 뒤 나와 윤희는 교실로 올라왔다.
“나는 지아 언니 좀 만나고 올게!”
규원이는 곧장 3층으로 달려갔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남은 시간은 30분. 오늘 수업 내용을 충분히 복습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필기 노트를 펼치고, 1교시 수업 내용을 읽으려는 찰나,
“영재야.”
윤희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홱 틀었다. 윤희는 국어 문제집을 들고 있었다.
“영재야. 여기 한 문제만 알려 줘. 되도록 자세하고 이해하기 쉽게.”
윤희가 내 책상 위에 문제집을 올려 놓았다.
“이 정도는 그냥 풀잖아?”
“그래도 한 번 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제 내뱉은 말도 있고.”
그제야 윤희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곁에서 수없이 들었을 텐데 또 들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의문점을 입에 올렸다.
“그 동안은 내 공부를 하기도 바빠서 잘 못 들었거든.”
“굳이 또 들어야 할 만큼 잘하는 것도 아닌데…….”
머쓱함을 느끼며 뒷목을 문질렀더니 윤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넌 정말로 잘 가르쳐 줘. 이참에 배우고 싶을 만큼.”
“너무 띄우지 마. 그래봤자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
“아메리카노 정도라면?”
윤희가 장난스레 웃었다. 일단 나의 부담을 윤희가 덜어주는 만큼 상응하는 보답이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나 살기도 빠듯한 지갑에게는 그마저도 힘에 부쳤다.
“어, 음……. 생각 좀 해보고?”
일부러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속으로 미안함을 느꼈지만 상황이 내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쩨쩨하네.”
윤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최, 최대한 긍정적으로 고려할…….”
“됐어. 진짜로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니까. 아까 부탁한 거나 들어줘.”
“응. 그럴게.”
나는 윤희의 바람대로 문제를 최대한 자세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마치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규원이인 것처럼.
“여기서 드러나는 화자의 심정은, 지문의 두 번째 문단에 나와 있어.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이 부분.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화자의 심정은 바로 그리움이야. 그러면 정답은 2번이지.”
그런 뒤 곧바로 정답지를 확인해 보니, 정답이었다.
“도움이 됐으려나 모르겠네.”
나는 문제집을 윤희에게 돌려주었다.
“아냐.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고마워.”
윤희가 문제집을 가슴팍에 껴안은 채 활짝 미소 지었다.
* * * *
스터디부 활동 개시.
윤희가 가운데 책상을 차지했다. 오른편에는 규원이가 앉았다.
오늘은 윤희가 규원이의 국어 공부를 전담하는 교사로서의 처음 데뷔하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어, 엄격하거나 그러지는 않겠, 지?”
규원이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음…….”
“아아. 윤희야 제발. 살살해 줘. 응?”
규원이가 아예 손을 싹싹 비비며 애원조로 부탁했다.
“일단 해봐야 알지 않겠어?”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윤희는 아마 지금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규원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할 리가 없지.
둘을 지켜보던 지아 누나가 규원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언니이. 나 어떡해애?”
규원이의 질문에 지아 누나는 엄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굳세게 커야지,규원아.”
“자자.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공부합시다!”
내가 나서자 모두들 한목소리로 ‘네’ 하고 답했다.
주현 선배는 이미 참고서를 보며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집중력하나만큼은 정말 인정해 줘야겠군.
각자 손에 펜을 쥐고 문제집을 펼쳤다.
“어라? 윤희야. 그거 뭐야?”
규원이의 음성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
지아 누나 역시 흥미를 드러냈다.
“이거 말하는 거야?”
윤희가 손에 쥔 것을 슬쩍 들어 올렸다.
“뭔데 그래?”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뺐다.
“만년필이야.”
지난번에 윤희네 집에 갔을 때 본 적이 있는 필기구였다. 그러고 보니 저것 말고도 몇 자루 더 있었지.
“와! 이게 만년필이란 거구나. 처음 봐.”
규원이가 흥분하여 목청을 올렸다.
지아 누나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서 윤희와 규원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윤희는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펼쳐놓은 참고서 사이에 펜을 올려놓았다.
까만 몸통에 금색 펜촉이 달려 있었다.
“멋지게 생겼다. 이거 비싸지 않아?”
지아 누나가 윤희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조금 비싸긴 해요. 한 10만원 정도?”
“…….”
일동 침묵.
갑자기 조용해지자 윤희가 천천히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실화야? 10만원?”
충격에서 가장 빨리 벗어난 사람은 규원이었다.
“윤희 혹시, 집 잘 살아?”
지아 누나의 눈이 평소보다 더 크게 뜨인 상태였다.
네. 엄청나게 잘 살아요.
그렇게 대답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지퍼를 단단히 채웠다.
“그냥, 용돈 모아서 산 거예요.”
“그걸 어떻게 쓰냐. 나 같으면 집에다가 고이 모셔둘 것 같은데…….”
“쓰라고 만든 걸 모셔놓기만 하면 어떡해.”
내가 한 말에 윤희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기 윤희야. 나 한 번만 써 봐도 돼?”
규원이가 조심스레 윤희의 눈치를 살폈다.
윤희는 간단하게 사용법을 알려준 뒤 규원이에게 만년필을 넘겼다.
규원이를 시작으로 지아 누나와 나도 펜을 만져보는 영광을 누렸다.
한바탕 소동이 흘러간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들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새 활동을 마칠 때가 다가왔다.
하굣길에 올랐더니 선선한 바람이 우리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윤희 되게 엄격할 줄 알았는데, 괜찮더라. 맘에 들었어. 따봉!”
발걸음을 옮기면서 규원이가 윤희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다행이네.”
윤희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주현 선배는 오늘도 약간 떨어진 곳에서 우리들을 따라왔다.
한참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경사로를 다 내려왔다. 서로 인사를 한 뒤 헤어지려고 하는데,
“아, 영재야.”
지아 누나가 갑자기 나를 불러세웠다.
“왜 그러세요?”
“잠깐 나랑 어디 가서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요?”
얼굴에 의문부호를 띄우자 지아 누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손나팔을 귓가에 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지만 지아 누나는 아랑곳않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주현이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