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2화-초여름과 동상이몽(1)
슬기와 저녁을 먹고 나서 바깥으로 나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좀 걷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었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중, 불현듯 수학여행 때 도연이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영재 넌 걷는 거 좋아해?’
그땐 좋아하는 편이라 답하면서도 속으로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이렇게 밤 중에 산책을 나오는 걸 보면 좋아하는 게 맞는 듯했다.
5월의 끝자락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서서히 더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은 밤 공기가 선선한 편이라서 다닐 만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릴 적 자주 놀았던 놀이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이 놀이터로 향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여기 진짜 오랜만인데.”
통학로 방향이 아니라서 몇 년 간 와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놀이터로 자전거 한 대가 들어섰다. 이 늦은 시간에 뭘 하러 온 거지?
나는 그쪽 방향을 예의 주시했고, 이내 자전거에 탄 사람을 알아보았다.
“오? 지아 누나. 여긴 웬일이세요?”
“누군가 했더니 영재였구나.”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지아 누나는 자전거 받침대를 세우고 나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영재야. 이 시간에 뭐 하고 있어? 뜀걸음하다가 쉬는 거야?”
“아뇨. 그냥 밤 산책 나왔죠.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만 하지만요. 누나는요?”
“운동하는 거지. 가끔 이렇게 밤에 자전거를 타거든.”
누나가 배시시 웃었고, 나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아하. 오늘은 재수가 좋네.”
나랑 만나서 재수가 좋다는 말, 이겠지? 그런 거라면 매우 기쁠 텐데 말이다.
누나가 내 옆에 앉았는데,불과 한 뼘 남짓한 거리였다.
그나저나 옆에서 좋은 향기가 나네. 누나의 윤기가 흐르는 베이지색 머리칼에서 나는 걸까.
나는 곁눈으로 누나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몸에 알맞게 달라붙는 반팔티에 청색 핫팬츠 차림이었다. 몸매가 워낙에 좋아서 눈길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목에 착용하고 있는 은색 목걸이를 발견했다.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신구였다.
“어우. 느끼한 시선.”
“앗! 미안해요.”
나는 황급히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저, 저는 그냥 본 적 없는 목걸이가 있길래……. 그래서…….”
실제로 목걸이도 봤으니까 완전 거짓부렁은 아니다. 되도 않은 변명처럼 들릴 것 같지만.
“아, 이거? 이번에 제주도에서 샀어. 예뻐 보이길래.”
“아하. 그렇군요.”
대답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반대쪽을 보고 있었다.
참고로 2학년 선배들은 저번 주 목요일에 수학여행에서 복귀했다.
“나 봐봐. 어울려?”
지아 누나의 손가락이 내 어깻죽지를 꾹꾹 눌러서 나는 다시 누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누나는 엄지와 검지로 목걸이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솔직히 옷걸이가 좋아서 뭘 하든 다 잘 어울릴 테지만.
“그게 다야?”
“어……. 잘 어울리고, 또……. 예, 예뻐요.”
솔직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진부한 칭찬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슬플 정도의 빈약한 어휘력이라서 나는 겸연쩍은 기분을 느꼈다.
“칭찬 고마워.”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집에 돌아가면 더 좋은 칭찬 표현을 찾아봐야겠군.
“그나저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있어도 괜찮아요?”
“응. 위험한 길로는 안 가니까. 여차하면 도망칠 수도 있고.”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이제 막 밤 9시를 넘긴 시간.
나는 지난번에 지아 누나가 양아치들에게 헌팅을 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혼자서 기죽지 않고 당당히 목소리를 내던 그 모습이 멋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험하단 사실은 변함이 없다.
“누나, 슬슬 일어날까요?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벌써? 나 아직 다리 아파서 좀 더 쉬고 싶은데.”
지아 누나가 주먹으로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 누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지아 누나가 평소와 다름 없는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내가 왼쪽 다리가 좀 안 좋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아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왼쪽 발목이 그래. 전에 인대를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
지아 누나가 서글퍼 보이는 웃음을 그렸다.
“아…….”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 그래도 저번에 도망칠 땐 잘 달렸잖아요?”
“덕분에 집 들어가서 밤새 앓았지 뭐야.”
괜히 나 때문에 뛰게 만들었던 걸까.
하지만 그땐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입술만 깨물고 있자 누나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탓하는 거 아냐. 그날 얼마나 고마웠는데.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떤 일로, 그렇게 되신 거예요?”
“알고 싶어?”
지아 누나가 거리를 좁혀오는 게 느껴졌다.
“말하기 힘든 거면 안 들려주셔도 돼요.”
바닥만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들어 지아 누나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누나가 콧김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놀란 나는 목을 뒤로 빼고 말았다.
“진짜로, 듣고 싶어?”
늘 봐왔던 여유롭거나 장난기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누나는 한없이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고는 누나의 시선을 피했다.
“영재야. 여기 봐.”
진지한 음성이었기에 나는 마법에 걸린 것마냥 다시 누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지아 누나가 말허리를 자르고 내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내 볼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건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나는 석고상이 되어버렸다.
지아 누나의 손이 아주 천천히 턱으로 내려오더니 갑자기 양쪽 볼을 움켜쥐었다.
“진짜 못생겼다.”
지아 누나가 웃음보를 터뜨리며 내 얼굴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우우웁.”
놓아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멍청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아이, 귀여워.”
지아 누나가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는데, 한참 뒤에야 내 볼을 놓아주었다.
“모처럼 진지하게 들으려고 했는데, 이게 뭐예요.”
짐짓 퉁명스레 얘기했더니, 지아 누나는 아예 박수까지 곁들여 가며 박장대소했다.
“누나. 일단 진정 좀…….”
그제야 누나가 숨을 들이마시며 웃음을 가라앉혔다.
“아. 미안, 미안. 너무 웃겨서 그만.”
누나가 손으로 눈가를 훔쳐냈다.
솔직히 조금은 상처받았다. 스스로도 못 생긴 걸 알고는 있지만.
내가 고개를 수그린 채 한숨을 내쉬자 누나가 내 등에 손을 얹었다.
“그 얘긴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할게. 사실 별 얘깃거리도 아니긴 하지만.”
“……네.”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과거 얘기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법이니까.
다음 기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일 것이다.
지아 누나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 것도 좋다. 재미도 있었고.”
“누나만 즐긴 거 아녜요?”
“같이 즐겨놓고, 딴말 하기야? 누나가 그렇게 쉬운 여자였어?”
“아, 누나 쫌.”
지아 누나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전염이 된 것마냥 웃고 말았다.
역시 분위기를 휘어잡을 줄 아는 사람다웠다.
누나가 자전거로 다가가서 핸들을 잡고 받침대를 올렸다.
“그럼 슬슬 갈까?”
“바래다 드려요?”
“얘는. 내가 애도 아니고.”
누나가 손까지 내저었다.
“밤길은 위험하잖아요.”
“나는 자전거라 괜찮아. 걱정말아. 이래 뵈도 엄청 빨리 탄다구?”
누나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자전거 안장에 앉았다.
“이만 가볼게. 영재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걱정마세요.”
“그럼, 학교에서 보자.”
우리를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나는 페달을 밟기 시작했는데, 장담한 대로 정말 빨랐다. 나는 누나의 뒷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집으로 향했다.
* * *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우리들은 오늘도 부실에 모여서 공부를 했다.
활동 시간은 언제나 2시간 남짓.
나는 오늘도 저녁 7시를 넘긴 시점에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각자 짐을 챙긴 뒤 하나둘 부실 밖으로 나왔다. 우리들은 별관 밖으로 나왔다.
초저녁의 밤하늘은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연한 구름들 사이로 별들이 보였다.
정문을 통과하여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는 우리들. 맨 앞에는 지아 누나와 규원이가 섰고, 나와 윤희가 바로 뒤를 따라갔다.
주현 선배는 우리들과 두세 발짝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나 요새 공부 되게 잘 되는 것 같아!”
규원이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요즘 많이 나아졌어.”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규원이는 스터디부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집중력이 꽤 산만했다. 하지만 거의 매일 공부하는 습관이 들어서 그런지 최근에는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츰 나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진짜 영재 네 덕이야.”
“뭐, 내가 좀.”
내가 거들먹거리자 옆에서 윤희가 팔뚝을 쿡 찔렀다.
“왠지 재수 없어서.”
“심윤희 나이스!”
규원이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희 잘했어. 아주 칭찬해.”
지아 누나도 자못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어? 왜 내 편이 없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주현 선배를 불렀다.
“선배! 제 편 좀 들어주세요.”
하지만 주현 선배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할 뿐 여기로 다가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길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다.
“후후후. 이게 바로 홍일점의 숙명이라구.”
규원이가 콧대를 한껏 세웠다.
“규원아? 여기선 청일점이라고 해야지.”
나보다 한 발 빨리 지아 누나가 지적했다.
“아! 그런가?”
규원이가 턱에 검지를 올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윤희는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영재야. 앞으로 나도 규원이 가르쳐 줄까?”
“응?”
윤희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입술 사이로 반문이 뛰쳐나왔다.
“헐? 진짜?”
규원이도 무척 놀란 어조였다. 지아 누나도 토끼 눈을 하고 있었고.
“아. 좀, 갑작스러웠, 나?”
윤희가 멈칫거렸기에 나는 윤희의 손을 덥석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는 대환영이지!”
윤희가 도와준다면 스터디부에서 내 공부를 할 시간이 늘어난다. 당연히 찬성할 수밖에 없지.
“그, 근데 윤희는 뭔가 엄하게 갈 것 같은데…….”
규원이가 저어하며 한 발 빼려고 하자 지아 누나가 규원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이스 캐치.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아 누나가 손을 놓아주었다.
윤희가 규원이에게 다가가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앞으로 국어는 내가 봐줄게.”
“어? 으, 응.”
얼결에 그 손을 맞잡는 규원이.
지아 누나가 그 옆에서 박수를 쳤다. 그리하여 윤희도 규원이의 전담 교사가 되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계속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경사로를 다 내려왔다.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 헤어졌다.
주현 선배는 그때까지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스터디부 활동을 시작할 때 우리들에게 인사 한 마디를 건넨 것 빼고.
주현 선배가 스터디부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같이 가는 사람이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지금은 거의 혼자 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다. 말을 걸어보려고 해도 공부 얘기 말곤 통할 만환 화제거리도 없고.
곁눈질해 보니 주현 선배는 시선을 약간 내린 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저, 주현 선배.”
조심스레 부르자 이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일단 말을 붙이긴 했는데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야 좋을지.
“오늘 공부는, 어떠셨나요?”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나저나, 어째 나는 공부 얘기를 참 자주하는 것 같단 말이지.
주현 선배는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소리를 냈다.
“그냥…….”
두 음절에서 끝난 대답. 이후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는 한동안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던 중 주현 선배가 우뚝 멈춰 섰다.
나도 거의 동시에 서서 주현 선배를 돌아보았다.
“나, 이제 학원이라…….”
선배가 손가락을 슬며시 들어서 왼쪽을 가리켰는데, 선배가 다니는 학원이 있는 건물이었다.
“아. 잘 다녀오세요.”
나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주현 선배는 아주 미약하게 고갯짓을 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 어깨가 축 처진 것처럼 느껴진 것은 단순히 기분 탓이었을까.
주현 선배를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