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1화-각자 다른 후일담
갖은 해프닝을 겪었던 수학여행이 끝나고 찾아온 주말.
나는 주말 내내 공부에만 전념했다.
3박 4일 동안 놀면서 나태해진 몸과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공부 계획이 다소 밀린 것도 이유였고.
일요일인 오늘은 점심때까지 국어 공부를 하고 나서 수학 문제집을 붙들고 있었다.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할 사람이 있던가.
나는 몽당연필을 내려놓고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다름 아닌, 지아 누나였다. 웬일로 누나가 이 누추한 휴대폰에 전화를?
“여보세요.”
[아, 영재야. 오랜만이네.]
밝고 화사한 미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아 누나의 목소리는 전화로 들어도 엄청나게 좋구만.
속으로 만족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네요. 거의 1주일 만이죠? 그나저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어요?”
[얘는. 꼭 일이 있어야만 전화를 하니?]
보통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할 얘기가 있거나 약속을 잡거나.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경우라든지.
뭐, 지아 누나가 내 목소리를 듣겠다고 전화를 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겠지만.
[그냥. 우리 부장님 목소리 좀 들으려고.]
스피커 너머로 누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자 어안이 벙벙했다.
[어라? 엄청 의외라는 듯이 반응하네. 혹시, 나랑 통화하기 싫은 거야?]
“아아, 아뇨! 그럴 리가!”
나는 허공에 대고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부정했다.
“저는 당연히 뭔가 긴히 할 얘기가 있겠거니 싶어서 그랬죠.”
[나는 영재에게 그런 사람이었구나……. 일이 없으면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매정한 사람으로 봤구나…….]
나는 순간 당황해서 어버버 했다. 분명 장난인 것 같은데도, 한편으로는 진짜처럼 여겨져서 대응이 쉽지 않다.
“아, 저, 그게…….”
[푸흡.]
누나가 가볍게 웃음보를 터뜨렸고, 나는 그제야 이번에도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은 안 속는다는 말도 있는데 난 왜 또 속은 거지.
“누나. 솔직히 말해 봐요. 저 놀리려고 전화한 거죠?”
[그것도 있구.]
답하는 음성에 웃음기가 가득 배어있었다. 이게 바로 연상의 여유라는 건가.
다음번에는 절대로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동안에도 누나의 말이 이어졌다.
[심심하기도 하구 말야. 그래서 목소리 좀 듣게.]
지아 누나의 페이스에 말려서 대화가 빙빙 돌아갔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닫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설렌다고 표현해도 될 법한 기분이랄까.
지아 누나가 아휴, 하고 귀여운 한숨 소릴 내었다.
[내일 수학여행인데, 뭔가 기분이 참 복잡미묘해.]
“들뜨거나 설레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누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 보니 2학년은 이번에 어디로 간다고 했죠?”
[제주도야. 생애 처음으로 가보니까 기대가 되긴 하는데 이틀은 비 온다더라구.]
“아하. 비 오면 아무래도 다니기 좀 그렇죠.”
지아 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1, 2학년 다 같이 갔었으면 했거든. 그러면 스터디부 멤버들끼리 같이 다닐 수도 있었을 거 아냐. 너네랑 같이 사진도 찍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쉬움이 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나도 수학여행 내내 한편으로 아쉬움을 느꼈으니까.
스터디부 멤버들끼리 모여서 관람을 하고 사진을 찍고.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그건 분명 그것대로 좋은 추억 거리로 남았을 것이다.
“저도 그 점은 좀 아쉬웠어요.”
[진짜? 규원이는 엄청 재밌게 즐겼다고 하던데. 우리 생각은 전혀 안 났다면서.]
“아마 규원이만 그랬을 걸요?”
[그렇겠지? 우리 부장님은 계속 신경 썼겠지? 누난 그럴 거라고 믿어.]
“물론이죠!”
사실 도연이와 계속 얽힌 탓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긴 했지만, 구태여 긁어부스럼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아아. 누나느은, 너네가 먼저 가버려서 스터디부 활동도 못하고.]
원래는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지아 누나에게 열쇠를 건네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열쇠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 셋이 빠진 부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주현 선배와 서먹하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방과 후에 허전했겠네요?”
[허전하긴. 그냥 애들하고 놀러 다녔지, 뭘.]
“허얼.”
나는 곧장 실망감을 표출했다.
[얘는. 이 누나가 허전하니까 놀러 다닌 거지. 우리 영재 아직 멀었어.]
“뭐가 멀었는데요?”
[그건, 비밀.]
지아 누나가 즐거워하는 웃음소릴 냈다.
……역시 나를 놀리는 게 제일 재밌는 모양이다.
[이번 기회에 주현이랑 같이 다닐 생각이야. 같은 반에 스터디부 멤버인데도 얘기를 거의 안 나눠봤으니까.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는 몇 번 못 봐서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공부하는 모습 보면 크게 걱정은 안 들어요.”
그러자 지아 누나가 혀를 찼다.
[우리 영재가 아직 섬세함이 부족하네. 그런 애들은 겉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라구.]
“음. 그렇기야 하겠지만……. 저는 아직 큰 문제는 없다고 보거든요.”
[혹시 그건가? 지금은 나랑 통화 중이니까 다른 여자 얘기는 하기 싫다는, 그런 심리?]
“아아니! 왜 이야기를 그렇게 몰아가세요.”
다소 격하게 반응하자 지아 누나가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그러고는 한참 만에야 다시 말을 꺼냈다.
[아아, 미안미안. 네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그만.]
“제가 무슨 장난감도 아니고.”
대꾸하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이번에 제주도 가서 주현이랑 최대한 밀착해보려고. 반에서도 여전히 낯을 심하게 가리고 있으니까.]
“잘 부탁해요.”
[물론. 이 누나만 믿으라구. 그나저나 주말 내내 뭐 하고 있었어? 보나마나 공부겠지만.]
“…….”
나는 눈만 깜빡거릴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맞췄나 보네. 혹시 내가 방해한 걸까?]
“그럴 리가요. 솔직히 엄청 반가웠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지아 누나가 먼저 전화를 걸었는데 세상 어느 남자가 싫어하리.
[그렇게 말해주면 괜히 오해한다구?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짐 정리마저 해야 하니까 이만 끊을게. 공부 열심히 해.]
“여행 잘 다녀와요.”
통화가 끝났다.
나는 통화 시간이 찍힌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벼운 농지거리 사이에서도 지아 누나는 중요한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김주현 선배.”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불과 얼마 전에 스터디부에 들어온 신입 부원.
공부는 상당히 잘하지만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
우리들이 주현 선배에 대해서 파악한 것은 이 정도뿐이다. 이 외의 정보는 모두 미지수.
방금 전 지아 누나는 그런 주현 선배와의 거리를 좁혀보겠다고 선언을 했다.
서로 알아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그러므로 나는 지아 누나에게 그것을 일임할 생각이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으니까.
* * * *
월요일이 밝았다.
반 애들은 주말 내내 푹 쉬면서 여독을 풀었는지 혈색이 좋아 보였다.
규원이는 기운이 넘치다 못해 폭발할 정도인지 쉬는 시간만 되면 애들과 수다 떨기에 여념이 없었다. 윤희는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시집 삼매경에 빠졌고.
나는 필기 노트를 덮고 기지개를 켰다.
주말 내내 공부를 해서 그런지 목과 어깨가 좀 뻐근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더니 목 부근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주말에 공부만 했구나?”
시선을 돌려보니 윤희가 시집을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일언반구도 안 했는데.”
“너라면 그렇겠거니, 생각한 거야. 넌 알기 쉬운 면들이 꽤 있으니까.”
나는 싱긋 미소 짓고 있는 윤희를 향해 반문했다.
“그러는 너는 주말에 뭐 했어? 독서?”
“음. 독서도 했고…….”
윤희가 말끝을 얼버무리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시 습작도 했어.”
누가 봐도 뿌듯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 덕분이야?”
“맞아. 한동안 안 오던 영감이 다시 찾아오더라. 덕분에 막힘 없이 썼어.”
“안녕. 다들 푹 쉬었어?”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거의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도연이가 밝은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억지로 만든 게 아닌,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덕분에 나도 안심하고 대꾸할 수 있었다.
“나는 공부하면서 쉬었지.”
“그게 어딜 봐서 쉬는 거야.”
도연이가 어이없어하며 웃음을 터뜨리자 윤희도 가볍게 따라 웃었다. 그러고 나서 윤희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윤희 넌?”
“독서를 하고, 잠을 자고……. 독서를 했어.”
“응? 그건 그것대로 좀…….”
도연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도리질을 했다.
하긴, 시를 쓴다는 얘기를 다른 애들한테까지 오픈하기에는 많이 쑥스러울 것이다.
“그러는 너는 뭐 했는데? 하루종일 잠만 잤어?”
“땡! 토요일엔 엄마랑 같이백화점 갔고, 어제는 친구들하고 놀러 다녔지.”
“체력이 좋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윤희가 대신했다.
“음. 좀?”
도연이가 그러면서 어깨를 폈다.
그때 수업 종이 울렸다.
“앗. 가봐야겠다. 바이바이.”
도연이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 돌아섰다. 도연이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윤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좀 괜찮아졌나 봐.”
나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알고 있었구나.”
“일단은 관계자였으니까.”
그러더니 윤희가 나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너는,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거지?”
나는 고개를 묵직하게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걸로 납득했다는 듯 윤희는 시집을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 * * *
종례를 마치고 나서 우리 셋은 근 일 주일 만에 스터디부로 향했다.
나는 가운데 자리. 윤희는 내 왼편, 규원이는 오른편에 앉았다. 항상 이렇게 앉다 보니 어느새 고정석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셋이 있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따지고 보면 5명이 된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말야.”
윤희가 감상을 입에 담았다.
“그러게.”
나 또한 윤희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스터디드림의 부장을 맡을 때만 해도 5명이 모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규원이가 옆에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영재야. 나 뭣 좀 물어봐도 돼?”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는데, 규원이는 내 어깨를 계속 툭툭 쳤다.
“그 전에 이 손 좀 멈추지 그러냐?”
그제야 규원이가 내 어깨에서 손을 치웠다.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장난을 한 번 치고 싶었던 모양이었구만.
“뭐가 궁금한데?”
“오늘 애들 몇 명이 쑥덕거리더라구. 그래서 내가 곧장 뭔 얘기들을 그렇게 하냐며 끼어들었지. 그랬더니 애들이 그러더라구. 도연이가 너한테 고백했다면서. 윤희 너도 몰랐지?”
“아니. 진즉에 알고 있었어.”
윤희가 칼 같이 맞받아쳤다.
“어떻게?”
“보통은 눈치채기 마련이라고 생각해. 너는 예외지만.”
“아냐!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근데 영재 너나 도연이는 티를 전혀 안 내서 미처 몰랐던 거라구.”
규원이의 대답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의문 부호를 띄웠다.
나는 그렇다 쳐도 도연이는 엄청나게 티를 냈는데?
“근데 영재 너, 결국 거절했다면서. 왜? 나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것 같은데.”
내가 너처럼 단순하게 살지는 않아서.
“……그런 게 있어.”
나는 일부러 눈을 피했다.
“뭐야아. 또 나한테만 숨기려고.”
규원이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윤희가 정리에 나섰다.
“자. 영재한테도 다 사정이 있는 거니까 이쯤하자. 슬슬 공부해야지.”
“다시 또 공부 시작이구나…….”
한숨을 푹 쉬면서도 규원이는 가방에서 언어 문제집을 꺼냈다.
나는 윤희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윤희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책상에 올려놓은 수학 문제집과 오답 노트를 펼쳤다.
나는 규원이와 똑같은 언어 문제집을 펼치고, 까만 몬아미 볼펜을 잡았다.
“자. 공부 시작!”
나의 활동 선언과 함께 집중 모드로 들어가는 둘.
그런 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본 뒤 나도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들의 공부는 현재진행형이니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