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60화-나아가고 나아가서 4일차(2)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로지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
도연이는 규칙적으로 눈꺼풀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
나는 무척 놀란 상태였기에 입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떡해야 될까?
사실 도연이의 마음은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단지 이렇게 고백까지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
나는 도연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표정은 도연이가 진심을 다해 고백했음을 느끼해 해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단칼에 거절하면 상처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곧장 수락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성에게 고백받는 일 자체가 처음이기도 하고…….
“좀. 갑작, 스러웠지?”
먼저 침묵을 걷어내는 도연이.
“아, 아냐…….”
반사적으로 부정문을 읊었다. 나는 그러고서 괜스레 목덜미를 문질렀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어색한 기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도연아.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어떤, 거?”
도연이는 반문하면서도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하긴, 나 같아도 고백하고 나면 부끄러워서 시선 못 마주칠 것 같다.
“그, 왜…… 날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말야…….”
“아. 그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것도 잠시, 도연이가 이내 술술 말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항상 밝은 모습이고 그래서 애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려.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그러면서 자만하지도 않아. 또 말도 잘하고.”
이거 내 얘기가 맞나? 다른 사람 얘기 같은데.
“나서야 할 때 과감히 나서는 결단력도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꽤 귀여운 구석도 있고.”
“귀, 귀여운 구석?”
나와 일억 광년쯤 떨어진 것만 같은 형용사 때문에 곧장 반문했다.
“응. 있어. 아니, 많이.”
도연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뺨에 미미하게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그게 뭔지 정말 궁금했지만, 더 캐물어 봤다가는 피차 창피해질 뿐이다.
“이유는 일단 그 정도인, 거지?”
“더, 더 있지만 일단은…….”
도연이가 눈을 내리깔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뺨도 살짝 달아올랐다.
자, 이 흐름대로면 이제 내가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서…….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돼?”
“그럴게.”
도연이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바로 답해주지 못해서. 아깐 엄청 놀랐거든.”
“아, 아냐. 충분히 이해하니까.”
할 말을 다 하고 나니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되찾아왔다. 나는 아래턱을 긁적이며 어색한 톤으로 말했다.
“일단 돌아갈까?”
“응. 애들 기다리겠어.”
상점으로 되돌아갔더니 규원이가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너희 둘! 어디 갔다 온 거야? 계속 찾고 있었는데.”
“잠깐 옆 가게 구경하러 갔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우릴 번갈아 보는 규원이에게 적당히 둘러댔다.
“그치만 너네 아까 걸어오던 방향에는 가게 없는데?”
그건 또 언제 봐뒀대.
“화장실 갔다 온 거야.”
“아하……. 어? 잠깐만? 왜 너네 둘이서 화장실을 가는 건데? 뭔가 이상한데…….”
이대로 넘어가는 줄 알았더니.
“오오. 왜 이렇게 많이 샀데?”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규원이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이거? 마음에 드는 게 너무 많아서. 헤헤.”
다행히 화제 돌리기에 성공했군.
속으로 안도하고 있을 때, 윤희가 규원이 뒤편으로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바구니를 들고 있었지만 고른 물품이 채 다섯 개가 되지 않았다. 윤희는 우리들을 스윽 쳐다보더니 쇼핑에 열중했다.
“우리도 마저 쇼핑할까?”
도연이가 나를 향해 물었다.
“난 구경만 좀 더 할 생각이야. 딱히 맘에 드는 게 없어서.”
“그렇구나. 알았어.”
도연이의 표정과 어조가 평소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마치 아까 고백했던 일은 한순간의 꿈이었던 마냥.
어느덧 집합할 때가 되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 우리들은 집합 장소로 이동했다.
나와 규원이가 앞장섰고, 윤희와 도연이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뒤따라왔다. 문득 뒤돌아보니 둘은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 * *
마지막 일정인 점심 식사.
장소는 불고기 전문 식당이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반찬 가지와 고기가 차려져 있었다.
나와 윤희, 규원이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도연이는 다른 애들과 합석했다.
“도연아! 여기 와, 여기.”
규원이가 도연이를 향해 바쁘게 손짓을 했다. 하지만 도연이는 싱긋 웃더니 손을 내저었다.
“히잉. 도연이가 나 바람맞혔어.”
규원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왜일까? 설마 우리들한테 벌써 질렸다거나…….”
“설마 그러겠냐. 다른 이유가 있겠지, 뭐.”
나는 적당히 둘러댔고, 윤희는 규원이 옆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네가 부러워. 정말 가끔.”
“응? 갑자기?”
규원이가 윤희를 향해 고개를 홱 틀었다.
“나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
“윤희 왜 저래?”
고개를 갸웃거리던 규원이를 향해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글쎄다.”
“으잉? 왜 나만 모르는 것 같지?”
토끼 눈을 한 채 나와 윤희를 번갈아 바라보는 규원이. 하지만 그 이상으로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윤희는 화로에서 건진 고기 한 점을 규원이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자, 먹어.”
“오오!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고기 한 점을 한입에 삼킨 규원이는 금세 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맛있다아.”
“자, 너도.”
윤희가 내 접시에도 고기를 덜어주었다.
“윤희야. 이젠 내가 할게.”
윤희에게만 맡기는 게 미안하여 손을 내밀었지만, 윤희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원래 음식 하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수제 쿠키를 대접한 적이 있었지.
“아하! 윤희 넌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규원이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영재 넌 그다지 놀라지 않네?”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화살이 돌아왔다.
“아. 이미 알고 있어서.”
“헐. 언제 알았대?”
“그야…….”
나는 말하려다 말고 말꼬리를 흐렸다.
윤희네 집에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가는 또 괜한 오해를 살 텐데.
어떤 식으로 얼버무려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윤희가 먼저 선수를쳤다.
“전에 우리 집에 온 적이 있거든.”
뭐지, 이 흐름은?
나는 입술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허얼? 너네 역시…….”
““그런 거 아냐.””
나와 윤희가 동시에 부정했다.
“단지 스터디부 홍보물을 만들러 갔던 것뿐이라고.”
나는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거. 같이 만든 거였구나.”
윤희가 고기를 건져서 규원이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초대할게.”
“뭐어? 진짜?”
“기회가 된다면.”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오오오오. 영재야! 윤희네 집 어땠어?”
흥분한 기세 그대로 규원인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때 보면 알게 될 거야.”
아마 너무 놀라서 뒤로 발라당 자빠질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그 웃음은?”
“아냐, 그냥.”
나는 남아있던 고기 한 점을 집어먹었다.
* * * *
점심 식사가 끝났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버스에 탑승했다.
애들은 저마다 한두 마디씩 수학여행이 끝났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담임선생님이 인원 체크를 하고 나자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우리들의 학교인 제일 고등학교.
피로가 쌓인 마당에 점심까지 배불리 먹은 탓인지 대부분이 곯아떨어졌다.
나 역시 몸이 피로하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정신이 또렷했다. 잠들 수가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까.
옆자리를 곁눈질해보니 윤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최대한 밀착했다.
수학여행은 이걸로 끝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아있다.
도연이의 고백에 대한 대답.
일단 대답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여전히 결정을 내지리 못하고 있었다.
도연이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터.
하지만 나는 어느 쪽에도 확신을 두지 못하고 있다.
도연이는 내게 결단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평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으니까.
“잠이 안 와?”
윤희의 나직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서로의 눈길이 마주 닿았다.
“응……. 너는?”
“마찬가지야.”
원래 버스에서 잠들지 않는 애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묘했다.
“……고백, 받았다며?”
DDP에서 단둘이 그런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맞아.”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예상치 못했어. 정말로 고백을 할 거라고는.”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윤희가 내 말에 동조했다.
“너와 도연이가 계속 붙어 다니게 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응.”
나는 고개를 끄덕거린 뒤 가늘고 긴 한숨을 흘려보냈다.
“사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 이런 일 처음 겪어보기도 하고.”
심경을 토로하는 동안 윤희의 눈길은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처음이라…….”
단지 그 말을 곱씹을 따름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도연이를 어떻게 생각해?”
윤희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다. 지금은 저 눈빛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진실게임은 이미 끝났어.”
나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렸다.
“내용을 바꿀게. 어떻게 지내고 싶어?”
윤희의 어조는 덤덤하고 평온했다. 대답을 들려주길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신호 같았다.
“…….”
입을 굳게 다문 채 정면을 주시했다.
윤희도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답은 내 안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드시 나의 진심이 담겨야 한다.
버스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학교를 향해서.
혹은, 어떤 결말을 향해서.
* * * *
오후 5시 반이 되자 버스가 학교에 도착했다.
나는 이동 시간 내내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애들이 버스에서 내린 뒤 각자의 짐을 찾아갔다. 나는 미리 짐을 챙긴 채 도연이를 기다렸다.
도연이는 제일 마지막으로 자신의 짐을 내리는 중이었다.
“도연아.”
“아, 영재야.”
도연이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러고 회색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었다.
“대답, 할게.”
도연이의 동공이 커졌다.
“도연아.”
“영재야. 저기, 자리를 좀 옮길까?”
나는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밖에 없어.”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그 말을 듣자 도연이에게 실수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화단으로 갈까?”
“응.”
내 제안을 수긍하는 도연이.
우리는 짐을 든 채 교사 뒤편 화단으로 이동했다.
물레방아가 세워진 화단을 옆에 두고 우리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앞장서서 걷던 도연이가 두 팔을 벌려 심호흡을 했다.
“응. 준비됐어.”
몸을 빙글 돌려서 나와 마주했다.
막상 대면하자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고, 그제야 결심이 섰다.
그리고 신중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해. 너를 좋은 친구라고만 생각해 와서……. 그리고 지금은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
그것이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아…….”
도연이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한 표정을 내비쳤다.
“미안.”
“그렇구나…….”
도연이가 옆으로 돌아섰다. 고개를 살짝 들고 물레방아를 응시했다.
“사실, 알고는 있었어.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어렴풋이……. 하지만 알아도, 하지 않으면 더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말을 들었다.
“지금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는 거지?”
“아냐. 없어.”
“거짓말.”
도연이가 고개를 틀었다. 그 얼굴에 서글퍼 보이는 미소가 어려 있다는 걸 눈치채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진짜야.”
도연이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턱을 치켜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참 예쁘다.”
아직은 해가 저물지 않은 새파란 하늘.
“영재야. 가 봐. 나 괜찮으니까.”
도연이의 시선은 하늘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미안해.”
“아냐. 사과하지 마. 고백이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네 진심을 들었으니까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아.”
후우. 도연이가 거친 한숨을 토해낸 뒤 다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연인은 아니지만.”
“그래. 늘 해왔던 것처럼.”
그 손을 맞잡았다. 한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악수를 풀고 나서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연이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누군가를 떠올렸다는 사실 한 가지만 제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