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7화-갈팡질팡하며 3일차(2)
음료와 츄러스를 다 먹고 나서 우리는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 도연이에게 물었다.
“풍선은 누가 들까?”
“네가 계속 들고 있는 게 낫지 않아? 나름 귀여운데.”
도연이가 배시시 웃었다.
……솔직히 그건 모양 빠지는 것 같은데. 창피하기도 하고.
둥그런 금테 안경을 쓴 거뭇거뭇한 남고생에게 하트 모양 풍선을 들고 흥겹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주 그냥 안구 테러가 따로 없지.
“남들 눈에는 전혀 그렇게 안 보일 것 거야.”
“영재 네가 뭘 모르네. 원래 핑크색은 남자들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라구.”
“그, 그런가?”
“그럼! 특히 까무잡잡한 애가 핑크색을 들고 있으면 얼마나 돋보이는데.”
아하, 그렇구나……가 아니다!
“잠깐만. 그거 그냥 나 놀리려는 거지?”
“앗. 거의 넘어갈 것 같았는데…….”
도연이가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을 했다.
“근데 진짜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해.”
“음. 정 그렇다면 나한테 줘.”
“좋아!”
나는 도연이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러자 도연이가 한쪽 팔을 내게로 쭉 뻗었다.
“쥐고 다니는 건 귀찮으니까 손목에 묶어 줘.”
나는 리본 형태로 매듭을 묶어 주었고, 도연이는 자신의 손목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리본 예쁘네.”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했을 뿐인 걸.”
“평소에 세심하단 소리 많이 듣지 않아?”
의외의 질문을 던지는 도연이.
하지만 나의 17년 인생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보였어?”
“응.”
도연이가 싱긋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리본을 손으로 살살 매만졌다.
이렇게 보니 도연이도 꽤 예쁜 축에 속했다. 핑크색 하트 모양 풍선을 매달고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림이 나오니까.
“이러고 있으니까 어릴 때 생각이 나. 유원지 왔을 때 엄마가 이렇게 풍선 매달아 줬거든.”
“오. 그런 것도 기억하는구나.”
“참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은 생생하게 기억이 나더라구. 아마 그만큼 행복감을 느꼈던 게 아닐까.”
도연이가 줄을 당기자 힘없이 이끌려 내려오는 풍선. 도연이는 풍선과 눈높이를 맞춘 채 풍선 입구를 살며시 잡았다.
“그 풍선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말야.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때 참 행복했구나 하는 걸 기억하는 거면 충분하잖아.”
도연이가 해맑게, 티 없이 미소 지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해. 제일고등학교에 와서 반장이 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다 함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본다는 게, 참 좋아.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 같아서.”
이야기의 흐름이 비약했지만, 어딘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진심이 묻어나서 가만히 듣게 되는, 그런 이야기랄까.
덕분에 나는 도연이가 느끼고 있는 행복감의 크기를 어렴풋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아. 갑자기 이런 얘길 해버렸네. 쑥스러워라.”
어색한 미소를 머금는 도연이를 향해 나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난 좋았어.”
“그럼 다행이구. 근데 영재야. 넌 이런 추억 없어?”
“음.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이 안 나네.”
기억이 안 난다, 는 말은 이럴 때 참 유용하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나중에라도 떠오르지 않겠어?”
“아마 그럴지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웃어보인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풍선을 선물해준 오리 인형이 우리들을 향해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열렬하게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 * * *
우리는 여기저기를 계속 돌아다녔다.
“괜히 자유시간을 많이 준 게 아니구나…….”
도연이가 매표소에서 챙겨온 에바랜드 팸플릿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곁눈질로 슬쩍 보니 에바랜드의 조감도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엔 어떤 것들이 있어? 놀이기구 말고 다른 것도 있나?”
질문을 했더니 도연이가 이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같이 볼래?”
도연이의 배려 덕분에 나는 좀 더 편하게 조감도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저 놀이기구만 많은 줄 알았더니 사파리 월드도 있고, 장미축제를 하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
왜 국내 최대 규모의 유원지라 불리는지 알겠네.
“근데 사파리 월드는 대기 시간이 길다고 적혀 있어.”
도연이의 검지가 가리키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평균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제 막 점심때를 지난 참이었다.
“시간 여유도 있고 가볼 만한 것 같은데?”
“가보고 싶어?”
“응. 여기에 전용 버스로 투어한다고 적혀 있잖아. 투어 시간은 25분이고.”
내가 가리키는 부분으로 시선을 내리는 도연이.
“길지는 않네.”
“그래도 평소에 호랑이나 사자를 가까이서 보기 어렵잖아. 게다가 모처럼 에바랜드에 오기도 했고.”
“음…….”
나의 설득에도 도연이는 고민에 잠긴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는 놀이기구를 좀 더 타고 싶거든. 그러면, 4시쯤에 가볼까?”
마음에 드는 절충안이라서 나는 좋다고 승낙했다.
“이제부터는 눈에 보이는 대로 타자.”
도연이가 팸플릿을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대신, 너무 무서운 건 피하도록 하자.”
나의 요구 사항을 들은 도연이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발길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늘자전거를 발견했다. 도연이가 검지로 하늘자전거를 가리켰다.
“저거 탈래?”
“저 정도면 껌이지.”
우리는 탑승구에서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자전거는 전부 2인승이었는데, 때마침 자전거에서 내리는 커플의 모습이 보였다.
도연이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
“어서 타자.”
“아, 응.”
재촉하자 내게로 시선을 돌리는 도연이.
자전거에 앉아서 열심히 페달을 굴렸다. 페달이 뻑뻑해서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어우우, 힘들어.”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았는데.”
앓는 소리를 하는 나와는 달리,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연이.
분명 똑같이 페달을 밟았는데 왜 나만 더 힘들다고 느끼는 거지?
그렇게 묻자 도연이가 한 단어로 진단을 내렸다.
“체력부족.”
“아! 체력이 또…….”
부정하고 싶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참고로 나는 저녁에 항상 요가나 스트레칭을 하거든. 그렇게만 해도 몸에 좋으니까.”
“그렇구나.”
나는 공부하느라 운동은 항상 뒷전인데…….
그 뒤로도 우리는 다른 놀이기구를 계속 탔다.
공중 그네에서 스릴을 느껴보기도 하고, 범퍼카로 남들을 마구 밀치며 난폭 운전을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타자는 회전목마였다.
“으음. 이건 좀…….”
너무 애들용 아닌가?
내가 주저하자 도연이가 다른 놀이기구를 가리켰다.
“그럼 저거 탈까? 트위스트라고 하는 놀이기구인데.”
나는 보자마자 숨을 삼키고 말았다.
놀이기구가 공중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회전했는데, 거기에 탄 사람들이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 그냥 이거 타자.”
“이게 훨씬 낫지?”
나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풍선을 매단 채로 탈 수는 없었기에 도연이는 풍선을 잠시 난간에 매달아 놓았다.
그런 뒤 내게 2인승 꽃마차에 타자고 했다.
“좀 부끄러운데…….”
“난 괜찮아.”
저는 안 괜찮은데요?
하지만 도연이는 그런 나의 속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꽃마차에 훌쩍 올라탔다.
[잠시 후 출발하겠습니다.]
하필 안내 방송까지 재촉을 하네.
괜히 다른 목마에 앉았다가는 도연이가 언짢아할 테고.
결국 나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같이 타기.
내가 옆에 앉자마자 도연이가 셀카를 찍었다.
회전목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난간에 매달아둔 풍선이 흔들거리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진짜 어릴 때 생각난다.”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도연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차츰 옅어졌다.
예닐곱 바퀴를 돌고 나서 회전목마가 멈춰 섰다. 우리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꽃마차에서 내렸다.
도연이의 손목에 다시 풍선을 매달아 준 뒤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길 양옆으로 잘 가꾸어진 화단이 펼쳐져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도연이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도연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가 매끈했다. 봄기운을 머금은 양 화사한 볼. 살짝 틴트를 발랐는지 입술에 윤기가 있었다.
솔직히 두근거렸다.
“뭐 묻었어?”
시선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냐, 그냥.”
“어이! 거기 커플 두 분.”
낯익은 음성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규원이와 연수, 지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휴, 눈꼴 시려.”
지연이가 과장된 억양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트 모양? 커플 암시인가?”
연수가 음흉한 미소를 그린 채 고개를 기우뚱했다.
“아, 아냐. 무슨 그런…….”
말꼬리를 흐리는 도연이.
“와아! 풍선도 샀네? 갖고 싶다아.”
그 와중에 얘는 풍선이나 탐내고 있고.
“이거 그냥 공짜로 주더라고.”
“어디서? 누가? 언제?”
갑자기 육하원칙으로 추궁을 하네?
규원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기에 나는 친절하게 그때의 정황을 들려주었다.
“허얼. 나 좀 있다가 받으러 갈래!”
“아마 안 줄 텐데.”
“그런 게 어딨어! 이건 차별이야.”
규원이가 볼을 부풀렸다.
“호옥시, 커플처럼 보이면 주는 거 아닐까?”
연수 넌 왜 갑자기 애한테 바람을 넣는 거냐.
내가 눈을 흘기자 연수는 입을 가린 채 호호, 소리 내어 웃었다.
“영재야. 풍선 받으러 가자!”
규원이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끌고 가려고 했기에 얼른 손을 빼냈다.
“아 싫어. 귀찮아. 안 가!”
“그럼 사 줘!”
“싫어. 너 돈 있잖아.”
완강하게 거절하자 규원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도연이는 우리들의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했다.
“우리 마침 바이킹 타러 갈 건데, 너네도 합류할래?”
지연이의 권유를 들은 도연이가 대번에 승낙을 했다.
“영재야. 바이킹은 괜찮지?”
“그 정도면 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매우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 * *
바이킹에서 내리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이게 괜찮은 거냐…….”
도연이를 비롯한 나머지 애들은 멀쩡해 보였다. 다들 강심장으로 태어난 모양이구만.
“역시 바이킹은 맨 끝자리가 제일 재밌다니까.”
매우 흥겨워하고 있는 규원이.
그래. 저 녀석 때문에 하필이면 맨 끝자리에 앉게 되었다.
덕분에 지옥을 맛보았다. 중간에 도연이가 손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지…….
나는 애들의 도움을 받아서 근처 벤치에 착석했다.
“영재가 기가 약하네.”
연수가 말하자 지연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나저나 윤희는 어디 갔어?”
갑작스런 규원이의 질문. 그러고 보니 규원이는 가장 먼저 헤어졌었지.
“그걸 이제야 물어봐?”
“풍선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했다구!”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보통 이 나이에 풍선 들고 돌아다닐 생각은 잘 안 하니까.
“그럼 가질래?”
도연이가 풍선 줄을 풀려고 하자 규원이가 곧장 만류했다.
“에이. 아냐. 그냥 하나 사지 뭐.”
풍선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구만.
“그래서 윤희는?”
규원이가 재차 질문했다.
“혼자 가볼 데가 있다고 했는데…….”
행선지까지는 듣지 못했던 탓에 말꼬리를 흐렸다.
“깨톡 넣어볼게.”
도연이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하지만 답신이 오지 않았다.
“전화해봐야 하려나.”
“그건 내가 할게.”
도연이를 제지한 뒤, 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어이지는 신호음.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나는 휴대폰을 닫았다. 한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얘들아. 나 잠깐만 윤희 찾으러 갔다 올게.”
“혼자서? 이 넓은 데를?”
도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되물었다.
“아, 그럼 나도 도울게!”
규원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나머지 애들도 거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애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너희들은 같이 다녀. 일단 찾아보고 연락할 테니까.”
나는 곧장 처음 우리가 헤어졌던 장소를 향해 달음박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