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5화 진실의 범위
무슨 질문이든 자신 있게 되받아치겠다고 했던 결심이 흔들렸다. 그만큼 도연이가 던진 질문이 강력했으니까.
“과연 영재의 대답은?”
애들이 바닥을 때리면서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사실 도연이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알고도 계속 모르는 척했다. 도연이만 신경 써줄 수가 없으니까.
스터디드림의 멤버들 하나하나에게도 신경을 기울여야 하니까.
지금은 균형이 알맞게 이루어진 상태다. 이걸 깨트리고 나설 만한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깨트렸다간 두 번 다시 균형을 되찾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도연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답안을 찾는 것.
고민이 길어질수록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쏠렸다.
도연이를 슬쩍 쳐다보니 은근히 긴장감으로 굳어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은 진실 게임.
게임을 빙자하여 진실을 고백하는 행위.
그렇다면 다수 앞에서 개인이 발설할 수 있는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다수의 참가자가 거짓이라고 느끼지 않는 선은 어디쯤일까.
빙빙 돌아가며 말하고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적당한 선.
개인이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나머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느낄 만한 어떤 지점.
나는 잠겨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 그리고, 미소가 무척 잘 어울리는 사람.”
바닥을 때리던 손들이 일제히 멈췄고, 순식간에 정적이 주변을 에워쌌다.
“……그걸로 끝?”
“응.”
고개를 끄덕였더니 여기저기서 원성이 들려왔다.
“고민한 것 치곤 대답이 빈약한 것 같은데.”
“맞아. 도연이는 그런 식의 대답 원하지 않았을 거라고.”
“영재 눈치 없다아.”
이로써 애들이 어떤 대답을 원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없다.
남들의 눈치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내 마음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건데.”
적어도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을 만큼만의 진실을 얘기했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얘기할 수 있다.
원래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다 드러내는 사람은 없다. 다들 조금씩은 커튼 뒤로 가리는 법이잖아.
나 또한 그렇게 했을 뿐이고.
당사자인 도연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연아. 넌 어떻게 생각해?”
도연이 옆에 있는 연수가 물었다.
“음…….”
도연이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자 애들이 도연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다행이구나 싶어.”
도연이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내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거겠지.
“정말로 그것뿐이야?”
윤희가 내게 화살을 돌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응. 맞아.”
윤희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럼, 다음 판 이어가자.”
도연이가 게임 재개를 선언했다.
“그래! 아직 밤은 길어!”
줄곧 침묵을 고수하던 규원이의 기운찬 음성.
덕분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금 열기를 띠었다.
모두들 오른손을 펼쳤다. 그런 뒤 차례가 된 애부터 조건을 하나씩 말했다.
“여자들 접어.”
“안경 안 낀 사람 접어.”
“이름에 ‘ㅈ’ 들어가는 사람 접어.”
“2반 접어.”
누구를 노리는지 어렴풋 감을 잡았을 무렵, 지연이가 확인 사살을 했다.
“반장 접어.”
이번엔 도연이가 걸렸다.
“영재 어떻게 생각해?”
나는 어깨를 흠칫 떨고 나서 지연이를 쳐다봤다. 시선을 알아챈 지연이가 엄지를 치켜 올렸다.
아니, 왜 거기서 엄지를 올리냐고.
이윽고 도연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자만하지 않는,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
지극히 모범적인 답안. 내가 한 답변의 수준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거 말고 더 있을 텐데?”
연수가 도연이의 어깨를 찌르자 도연이가 우물쭈물했다.
“에이, 더 있잖아.”
이때다 싶었는지 하나둘 도연이 부추기기에 나섰다.
“이, 일단 이 정도로 넘어가면 안 될까?”
도연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그 전에 영재의 생각을 들어 보자구.”
지연이가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뭐…….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해 줘서 고마워.”
이럴까 봐 미리 대답을 생각해두길 잘했다.
“에잇! 얘네들 재미없게 하네.”
연수가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어찌하겠냐. 이런 자리에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닌데.
“이걸론 부족해. 몇 판 더 해야 돼. 그치 얘들아?”
지연이의 발언에 나와 도연이, 윤희를 제외한 나머지 애들이 찬성한다며 목소릴 높였다.
이거 잘못하면 앞으로 더더욱 곤란한 질문이 쏟아지겠는데…….
이럴 때는 자리를 벗어나는 게 상책.
“으하아암.”
나는 과장스레 입을 쩍 벌리면서 하품을 했다.
“어우. 나 어제도 제대로 못 잤더니 졸려 죽겠어. 나 먼저 잘게.”
“어딜 도망 가.”
일어서서 도망가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 진짜 졸려. 몸도 피곤하고.”
“몸 피곤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
그때 윤희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놔 줘. 어제 진짜로 밤샜다고 하니까.”
“뭐 때문에?”
“……담임선생님코골이 때문에.”
“리얼?”
다들 놀라워했다.
“응응. 엄청나다던데? 막 버스 소리 같다고 영재가 그랬어.”
한 마디 더 보태는 규원이.
“헐. 우리 담임쌤 그런 줄은 몰랐네.”
다들 그런 반응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이만 자자.”
연수의 말을 끝으로 진실 게임이 막을 내렸고, 모두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영재야 잘 자.”
도연이의 음성이었다.
“응. 너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 금세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
다음날 아침.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애들이 외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도 빨리 준비해야겠구만.
이부자리를 정리하려는데 담임선생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오늘은 숙소를 옮기니까 짐 다 챙겨서 8시까지 로비로 내려와. 버스에 미리 짐 넣어두고 아침 먹을 거야.”
“네에!”
모두들 하던 동작을 멈추고 대답했다.
벽시계를 보니 7시 반이었다. 씻고 짐 정리를 하려면 시간이 약간 빠듯해 보였다.
“영재야. 지금 애들 들어가 있으니까 좀 있다 씻어.”
도연이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나에게 알려주었다.
“알겠어. 그런데 너 짐은 다 챙겼어?”
물어보자 도연이가 아니라고 답했다.
방 안을둘러보니 여기저기에 물건이 많이 널브러져 있었다. 충전기와 손거울, 빗, 틴트, 외출복 등등.
여자애들이 이것저것많이 챙겨 다니기는 하네.
씻기에 앞서 먼저 가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다행히 꺼내놓은 물품이 별로 없어서 순식간에 끝낼 수 있었다.
“영재야. 화장실 비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빠르게 세면세족을 했다. 그렇게 서두른 덕분에 집합 5분 전에 1층 로비에 모일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정숙을 외치며 손뼉을 치자 소음이 다소 잦아들었다.
우리들은 버스에 짐을 넣은 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늘 아침 메뉴는 갓 구운 빵과 스프 등이었다.
우리 넷은 벽에 붙어있는 식탁에 자릴 잡았다. 규원이와 윤희가 붙어 앉았고, 내 옆자리는 도연이가 차지했다.
나는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스프를 떠먹었다.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음식이 무척 잘 넘어갔다.
어제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는데.
“크으. 드디어 3일 차다. 오늘은…….”
기세 좋게 빵을 욱여넣던 규원이의 음성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에바랜드!”
“정답!”
도연이의 대답에 규원이가 활짝 미소 지었다.
“진짜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몰라. 한밤, 두밤 세면서 기다렸다니까?”
내가 피식 웃자 손가락을 하나씩 접던 규원이가 뚱한 얼굴을 했다.
“왜애.”
“그냥. 어린애 같아서.”
“애는 아니거든!”
규원이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그러자 구경하고 있던 도연이와 윤희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무얼 먼저 탈지 찾아봤는데, 역시 에바랜드하면 롤러코스터 아니겠어?”
규원이가 우리 셋을 번갈아 보았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도연이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나 그거 타보고 싶어. 국내에서 제일 빠르다고 하는 나무익스프레스.”
“오! 맞아, 그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규원이.
이러고도 애가 아니라고?
반면에 윤희는 묵묵히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너네 둘은 기대 안 해?”
규원이가 숟가락으로 나와 윤희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꽤 기대하고 있어.”
“그런 것 치곤 엄청 차분하네.”
“거기서 신나게 즐기면 되니까.”
즉각 대답을 한 나와 달리 윤희는 묵묵부답이었다.
“윤희야, 너는?”
“음……. 그냥 그래. 별 생각이 없어.”
윤희 또한 차분한 반응이었다.
“몇 번 가본 적도 있으니까.”
“헐? 언제?”
“예전에. 안 간 지 오래되긴 했어.”
그래서 그렇게 무덤덤했군.
생각해 보니 윤희 정도면 국내 여행은 물론이고, 해외 여행도 웬만큼 다녀봤을 것 같다.
“여하간 오늘은 하루종일 놀 거니까 많이 먹어야지.”
규원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서 기세 좋게 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우리 셋도 수저를 움직였다.
이 자리에서 아무도 진실 게임을 화젯거리로 삼지 않았다.
* * * *
버스에 올랐다. 담임선생님이 에바랜드까지는 1시간 넘게 걸릴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원래 이러고 있으면 금방 잠이 오기 마련인데, 오늘은 눈이 말똥말똥했다.
이것 역시 숙면의 힘인가.
옆을 보니 윤희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말문을 열었다.
“어제 말야.”
“응?”
여전히 창가에 눈길을 두고 있는 윤희.
“도연이에 대해서 정말로 그 정도로만 생각하는 거야?”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윤희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어디서나 티 없이 맑은 눈망울이 나를관찰하고 있었다.
“진짜로…… 그게 다야?”
“갑자기 왜 그래.”
나는 실없이 웃었다.
“얼버무리지 말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그쳤다.
시비를 거는 듯한 어투. 다만 윤희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너무 정색하지 마. 다른 애들한테 그러면 오해받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수십 초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나였다.
“어우. 눈 시려.”
눈두덩이를 문지르는 동안에도 윤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근데 왜 그걸 네가 신경 쓰는 거야?”
요 이틀 간 윤희가 보인 행보를 보면 의도는 명백하다.
나와 도연이 사이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
그렇게 따져보면 이런 질문을 내뱉는 행위 자체가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단지 궁금한 점이라면, 어제 내놓은 대답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것.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 왜 하필 네가 그걸 신경 쓰는 건지.”
“그건…….”
말을 잇지 못하는 윤희.
적당한 말을 찾으려는 듯 살짝 눈을 피했다.
“……너희들이 잘됐으면 해서. 관계자이기도 하고.”
윤희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해. 마음이 조급했나 봐. 나도 모르게 몰아붙이는 모양새가 돼 버렸네.”
“너는 가끔 나를 당황하게 만드네.”
윤희의 눈썹이 움찔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신선하다고 느끼며 말을 덧붙였다.
“좋은 의미로 한 얘기야. 그리고 도연이에 대한 내 생각은 어제 말한 대로고. 그 이상은 아직, 생각 안 해봤어.”
“정말로?”
“응. 진짜로.”
“그렇구나.”
대답하는 윤희의 표정이 오묘했다.
여전히 미심쩍은 건지, 안심하는 건지, 안타까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복잡미묘한 얼굴.
윤희가 다시 창가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나는 조금 전 윤희가 머뭇거렸던 구간을 상기했다.
윤희가 말한 내용 중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나에게 얼마만큼 공개한 것일까.
궁금증을 품은 동안에도 계속해서 달리는 버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우리는 에바랜드에 도착했다.
모두가 고대했던 3일 차 일정의 시작이었다.